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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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사의 변곡점 신익희 후보 서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8. 18. 22:58
서울 강동구 강동역에는 구리빛 찬연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해공(海空)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무척 낯선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선생은 격동의 시기 189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해 갑오개혁과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있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해 신문물을 익힌 그는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요직을 거치며. 독립에 헌신했다. 그의 임정 활동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평화적인 방식을 표방하되 실질적으로는 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 각지를 돌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만들려 애썼고, 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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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정을 사른 서른다섯 불꽃의 삶 나석주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30. 22:38
2019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두고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신용하와 경제사학자인 이영훈(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이 크게 충돌한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영훈이 *라는 책을 펴내면서, 그 내용 중에 신 교수를 거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용훈은 당시 "신용하라는 학자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일선 군청이나 법원에 있는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를 열람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그 일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싸움의 불씨를 지폈다. 는 2019년 7월 미래사에서 출판한 역사학 서적으로, 이영훈, 주익종, 김낙년 교수 공저로 집필한 책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책은 일본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이른바 반일 종족주의)에 저항하여 나름대로 올바른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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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난 왜군, 근대 일본군과 미군, 용산강 그 오욕의 강물을 넘어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23. 19:18
* '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에서 이어짐. 심원정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바로 위 언덕에 있던 정자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패배하던 왜군과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따라서 이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후 이곳은 고종 때의 영의정 조두순(1796~1870)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고,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碑).라고 음각된 비가 남아 있다. 윗글은 2016년 용산문화원 뒤 오래된 느티나무와 천연기념물 6호 백송이 있던 공터에 세워졌던 '심원정터' 안내문의 내용이다. 하지만 즈음하여 심원정이 복원됐고, 이에 지금은 '현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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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15. 23:31
16세기 후반 센고쿠(전국)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종식시켜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아 정복이라는 과대망상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 만들어진 사무라이의 가타나(장도)가 잘 드는가 어쩐가를 시험하기 위해 목이 잘린 빈천한 자였다. 히데요시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자였으니 그와 같은 망상을 품을 법도 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명나라는 물론 인도 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총독에게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 조속히 항복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정복해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조선에는 선조 24년(1591) 통신사 편에 보내온 서신을 통해 상호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치자고 했다. 이와 같은 공갈과 권유가 먹힐 리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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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궁 자리에 지어진 원구단과 조선호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3. 14. 05:09
최근 다시 남별궁(南別宮)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좀 더 포괄적인 정보(/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를 가지고 구글 어스를 검색을 해본 것인데 역시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호텔 근방의 표지석과 일치하는 셈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은 남별궁을 허물고 1897년 그 자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원구단을 건립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자리였을까? 남별궁은 대체 어떤 곳이길래.....? 남별궁이 있던 소공동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동네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른 까닭으로, 그 이름이 파생된 사연은 좀 슬프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명나라는 신생국 조선이 혹시라도 북원(北元,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에 붙을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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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의 의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3. 2. 00:16
몇 차례의 내부 변형이 있기는 했지만 서울역은 일제시대인 1925년에 준공된 건물이 지금껏 쓰이고 있다. 서울역에 갈 때면 이 점이 늘 새삼스러운데, 더불어 건물 자체의 미적 아름다움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이 건물은 1923년 현재의 서울역 자리에 있던, 당시에는 남대문역이라 불리던 멋대가리 없는 목조건물을 대신해 지어졌는데, 예산부족으로 처음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되어 완공되었지만 1924년 준공된 도쿄역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훨씬 미려하다. 당시 경성역으로 불리던 이 역사의 시공은 조선철도호텔(☞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을 건설한 아오미 하지메가 했으나 설계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당시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쓰카모토 야쓰시의 유품으로 경성역의 설계입면도 2장이 발견되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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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유관순 열사의 흔적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2. 28. 00:28
과거(편의상 20세기라 하자)와 달리 지금 21세기 학생들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니, 대부분의 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의 항일운동이 기재되지 않은 탓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대략 구시대의 아이콘쯤으로 치부된 듯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은 대략 7천500명인데(박은식의 ) 그중에서 유관순만 특별대접(?)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다, 20세기에 유행한 영웅 만들기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것 같다. 작금의 조국(曺國) 전 청와대수석 사태가 말해주듯 요즘 젊은이들은 '특혜'에 민감하다. 그들은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극혐과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랄까..... 그것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유관순 열사에 관해서는 독립운동 영웅 중의 한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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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쌍권총 김상옥 의사의 활약 루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2. 16. 04:48
지난 1월 22일은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지 99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날에 맞춰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포스팅하고 싶었으나,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숨었던 행당동 사찰 및 일본 경찰과 1 : 1000의 총격전을 벌였던 효제동 현장을 찾는 일이 늦어져 날짜를 맞추지 못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그곳들을 찾게 되었던 바, 그간 찍은 사진, 수집한 자료들과 함께 글을 올린다. 김상옥 의사의 일생에 대해서는 그간 , 등에서도 다뤄 많이 알려져 있으나 약술(略述)하자면 다음과 같다. 1890년 서울 종로의 한 가정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김상옥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며 가계를 도와야 했다. 그는 14세 때, 당시 나이로서는 힘들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