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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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사(조선신궁) 자리를 돌아보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1. 15. 00:56
일제는 1919년 7월 18일,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朝鮮神社) 건립을 확정·공표하였다. 3.1만세운동이라는 민족적 거사에 놀란 일제는 조선인의 사상을 바닥부터 개조할 필요를 느꼈던 바, 일본의 신도(神道) 사상과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를 조선에 입식(入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수도 한양에 일본 귀신들의 대빵이자 일왕가(王家)의 직계 조상신으로 모시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 텐노'(明治天皇)을 합사한 신사를 만들어 참배토록 하자는 관폐대사 조선신사안(官幣大社 朝鮮神社案)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 장소로는 서울 남산 중턱이 낙점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인 왜성대 경성신사(京城神社) 인근(지금의 리라초등학교 자리)과 경복궁 신무문 뒤쪽 백악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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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장충단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25. 23:59
* '장충단과 박문사'에서 못다한 이야기 앞서 말한 대로 장충단이라는 앞면의 예서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썼고 뒷면의 해서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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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과 박문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24. 00:51
초등학교 시절 장충단(奬忠壇) 공원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살았다. 그래서 장충단 공원에는 정말이지 많이 왔고 특히 근방의 어린이 야구장(당시 리틀 야구장)에서는 거의 살다시피 했다. 당시 이웃 학교 애들이나 동네 친구들하고 야구공 내기 시합(당시 홍키공이라 불리던 약간은 귀했던 )에 미쳐 있었던지라..... 이후로도 이사 가지 않고 한참을 그 동네에 살았으니 장충단 공원에는 수없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충단 공원 이름이 왜 장충단인지 몰랐다는 거..... 그저 동네가 장충동이어서 장충단 공원인가 보다 했을 뿐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유래를 안 것은 최근이었다. 최근이라 함은 미스터 트롯 출신의 어느 가수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멋드러지게 불렀을 때이니 매우 가까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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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14. 23:25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 (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이로쓰여 한민족 역사 중에서 적어도 조선은 천신(天神)에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었고 땅과 곡식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제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예기》에 써 있는 규범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규범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 했던 듯, 1464년(세조 10)까지 환단(圜壇=원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 국초(國初)의 환단은 지금의 한남동 매봉산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세조가 제사를 지낸 환단은 남단(南壇)으로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 부근에 있었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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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V)-최후의 진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6. 28. 06:35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이 남아 있음에도 우리가 그날의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까닭은 그 기록들의 내용이 전부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중 내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여 사건의 재구성에 인용한 글은 영국 영사 힐리어와 일본 영사 우치다의 보고서이고, 여기에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보고서를 보완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는 없다. 하지만 각국의 외교관이 본국에 올린 사건 보고서인 만큼 허투루 작성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니 이것은 각자의 공명심과 영웅심리에 의해 작성된 현장 낭인들의 과장된 구술보다 훨씬 정확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곤녕합에 난입했던 다카하시 겐지(高橋源次, 앞서 말한 데라자키 다이키치와 동일 인물임)라는 낭인*은 자신의 회고담에서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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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V)-미야모토와 우범선의 최후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6. 26. 06:49
건청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찌른 놈이, 말하자면 명성황후를 죽인 놈이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라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일본 중앙대학 겸임강사이던 이종각이다. 그는 2009년에 라는 책을 쓰다 과연 명성황후를 누가 죽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고 이에 를 비롯한 여러 관련자료를 뒤진 끝에 범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뜻밖에도 놈은 사건 1년 9개월 뒤인 1897년(메이지 30년)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이 격렬했던 타이완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12월 20일 타이완 의병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런데 그 놈은 왜 다른 놈과 달리 혼자 사지(死地)에 가게 되었을까? 혹시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일부러 보내졌던 것은 아닐까? 이종각은 저명한 일본근대사 연구자인 나카츠카 교수의 의견을 들어 그러할 충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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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I) - 살해범들은 어찌됐나?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6. 21. 00:00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에도 고종은 일본에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으니 만고(萬古)의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을 듯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일본공사 미우라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누명을 쓰고 폐서인돼야 했던 바, 고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표출할 길 없는 분노는 친일 내각의 김홍집 총리대신을 향하였으니,(김홍집, 유길준, 서광범 등은 폐서인에 찬성함) 고종은 아관파천에 성공하자 김홍집 체포령을 내려 결국 광화문 육조거리에서 친러 군인과 보부상들에게 맞아 죽게 만든다) 못난 가장(家長)은 밖에서 당한 일에 대한 분풀이를 제 가정에 한다.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자 3번이나 위기의 내각을 이끌었던 총리대신 김홍집을 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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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다시 본 북두칠성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4. 4. 20:13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무렵이면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늘 가슴 아프다. 그 유언을 상기하자면 아래와 같다.(잠시 사정을 말하자면, 8.15 후 남북이 나뉘었고 그 남북 모두 해방 후의 복잡한 정국을 수습하느라 유해 송환에 차일피일하였다. 그러다 뒤늦게 남북합동의 대책팀이 꾸려져 안 의사의 유해 송환을 기도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을 늦었으니 여순감옥 사형수 매장지였던 곳은 상전벽해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 안중근 의사 유언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내가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