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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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1. 01:16
1866년 9월 30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물러나자 조정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양선이 침입했을 때 싸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전달해준 수령방백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에서부터 김포 부평 행주 양천을 거쳐 서강에 이를 때까지 정신 나간 지방관들로부터 소, 닭, 돼지, 계란, 청태, 백채 등을 전달받아 잘 처먹으며 진군하였던 바, 함선이 진입했을 때 강력 항의한 영종도 첨사 심영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벌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며칠 후 이상의 처벌론은 모두 없던 소리가 되었으니, 물러간 줄 알았던 이양선이 10월14일 다시 강화도 해상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당인지라 수령방백들을 처벌하고 어쩌고 할 짬이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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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1차 침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0. 22:27
병인양요는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서양 오랑캐의 소요라는 뜻이다. 글자가 말해주듯 병인년의 외침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으니 양코쟁이 오랑캐의 등장은 5천년 역사에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오랫동안 외침을 겪어 나름대로 내성을 지닌 민족임에도 병인년 프랑스의 침범에는 쉽게 무너졌다. 과정을 보자면 프랑스군의 화력도 화력이었지만, 사령관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의 치밀한 계획도 한몫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프랑스의 침입은 그해 일어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겉으로의 구실이었다. 흔히 병인박해로 불리는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조선인 신자 8,000명뿐 아니라 몰래 포교하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9명도 붙잡혀 처형당했는데, 이때 펠릭스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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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충신 충정공 민영환과 러일전쟁 뒷얘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2. 01:17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 1905)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과 함께 시호가 가장 친숙한 사람일지 모른다. 대한제국 신하로서의 충정이 그 정도로 깊다는 얘기다. 그들의 죽음은 삶만큼 강렬했으니 전쟁 후 상황이 어찌 흐를지 경험으로 체득했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의 뱃전에서 스스로 몸을 노출해 왜적의 탄환을 맞았다. 이순신이 걱정한 예는 충의공(忠毅公) 정문부에게 나타났다. 함경도에 진군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과 여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한 정문부였으나 전후 그는 역모죄의 누명을 쓰고 참살당했다.(☞ '불패(不敗)의 가등청정을 박살 낸 정문부 장군') 충정공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칼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그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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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을 폭파시킨 3인의 의병과 연트럴파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0. 17. 10:27
호머 헐버트의 에도 실렸고, 일제가 발간한 사진엽서에도 실렸으며, 프랑스와 독일 등의 외신에서도 대서특필된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3인은 술김에 철도시설물을 파손시키거나 운송물자를 훔친 도둑들이 아닌 의병들이란 사실을 앞서 1편에서 설명했다.(☞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조선인 스페셜리스트') 즉 1904년 8월 27일 거사 후 체포되어 9월 20일 재판을 받고 그다음 날인 21일 오전 10시 마포 공덕리 산기슭에서 총살된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의 3인은 러일전쟁의 병참으로 건설 중인 경의선 시설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선로에 폭약을 매설, 군용열차를 폭파시키는 전무후무한 거사를 치른 후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폭파시킨 도로변 철도건널목 부근에서 강제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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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방해죄로 처형된 조선인 스페셜리스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0. 13. 05:24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사진 1장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는 3명의 조선인 사진으로, 지금까지 찾은 이 처형 장면이 담긴 일련의 사진이 총 9장이나 된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제가 엽서로 만들어서 배포한 것도 있는데, (아래) 그것으로써 처형당한 사람들의 죄목과 연도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지은 죄는 '철도선로 방해죄'이고 연도는 1904년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한 그 사진들을 우선 살펴보자. 1904년이면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기 6년 전의 일이니 대한제국의 주권이 엄연할 때이다. 아울러 대한제국의 실질적 자치권이 상실된 1905년의 을사늑약에도 1년 앞선다. 그런데도 총살형이라니....? 그들의 죄목인 '철도선로 방해죄'는 뭔가? 그것이 과연 사형에 이를만한 죄인가? 그들은 재판의 과정이라도 거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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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여중사의 자살 - 루크레티아의 죽음에 로마가 분노했듯 분노하자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6. 5. 08:48
공군으로 복무하던 여군 중사가 혼인신고 당일, 죽음의 영상을 남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 이해 지금 세상이 떠들썩하다. 사건을 정리하면 대강 이렇다. ◆ 지난 3월 어느 날, 위의 여중사는 직속상관인 장모 중사로부터 회식 참석의 명령을 받음. 여중사는 좀 께름칙했으나 직속상관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참석함.(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다 안다. 직속상관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게다가 그 새끼는 평소에도 성격이 지랄같은 놈이었던지라..... ◆ 그런데 막상 가보니 단체회식이 아닌 그 장모 중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의 개업식이었음. 즉 장모 중사는 다른 흑심으로 그를 불러낸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 여중사는 차 뒷좌석에서 몹쓸 짓을 당함.(운전병도 있었는데 그는 아무 것도 못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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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참회록'과 영휘원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2. 17. 02:07
참회록(懺悔錄)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의 시는 굳이 해석이 필요 없다. 어렵던 쉽든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것은 사실 시 감상의 본질이기도 할 텐데, 윤동주의 시는 어떤 것이든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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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던진 남산 조선총독부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2. 18. 23:38
1995년 조선총독부로 쓰이던 중앙청 건물의 철거가 결정 났을 때 보존이냐, 철거냐를 두고 다시 설왕설래, 갑론을박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가차 없이 집행했고, 결국 폭파 해체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잘한 일로서 건물 뒤에 가려졌던 경복궁 근정전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아마도 해체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조선의 법궁(法宮)을 부수고 그 자리에 식민통치기구를 세웠던 것이니 그와 같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당시를 돌아보면 그저 참담할 뿐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사실 총독부 설치 당시의 것이 아니고 1926년에 새로 지은 청사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며 총독부를 설치했으나 청사를 신설하지는 않고 1906년 남산 왜성대에 건립했던 통감부 건물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