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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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 - 시간(屍姦)은 정말로 있었나?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25. 00:37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과 그 옆 쪽에 있던 고종의 서재 집옥재, 그리고 빈전(殯殿)으로 사용된 태원전 지역은 예전(2009년 이전)에는 군인과 고위관료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쿠데타의 무리들이 청와대 보호의 명목으로 신무문과 통하는 그 일대에 30경비단 사령부를 두고 계속 군사를 주둔시켰기 때문인데,(이른바 5160 부대) 그 사령부에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12. 12 쿠테타까지 모의했으니 애써 좋게 표현하자면 혁명의 요람이요 성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당시 30경비단의 면적은 약 2만 평, 장세동 대령이 단장이었다) 이에 1979년 신군부가 12. 12 쿠테타를 일으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할 때 필동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지금 남산한옥마을 일대)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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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9. 05:30
비단 명성황후 시해사건뿐만이 아니라 구한말 개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비극이었다. 위로는 국왕 고종과 왕비 민왕후(명성황후)가 오직 왕권에만 집착해 부국강병의 길을 저버렸고, 밑으로는 백성들의 자주의식이 없었다. 1894~5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관한 우위를 점하려 이 땅에서 박 터지게 싸울 때, 이 땅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곤 제 집 방 문짝을 떼어 산으로 지고 올라갔다 밤에 가지고 내려온 일뿐이었다. 전투 중에 혹여 방문이 훼손되면 찬바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상태로 가면 국가의 문이 송두리째 없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나라 · 일본 간의 전투에서 의외로 일본이 이겼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고 타이완과 요동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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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V) - 순종황제의 국토순행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 23:40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 황태자 이척(李坧)이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즉위부터가 일제에 의한 것이었으니 꼭두각시 신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그는 즉위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하라는대로 전국을 순행하며 황제의 얼굴을 백성들에게 디밀었다. 황실이 일제에 의해 핍박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무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쇼였다. 아무튼 대항할 힘이 없었던 순종은 1909년 1월 4일, 아래와 같은 조칙을 발표하고 지방 순행길에 오른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어찌 한시인들 모른 체하고 나 혼자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有司)들을 인솔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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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과 독립협회 (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31. 00:11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천하의 매국노로 알려져 있지만 태생으로 따지자면 사실 그는 매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처지였다. 그 태생이 워낙에 미천한 탓이었다. 경기도 광주(지금의 분당)에서 똥지게 지고 거름 주던 이완용은 나이 열 살 때 32촌 쯤되는 이조판서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호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부잣집이었다. 하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었던 바,(서자 이윤용이 있었으나 서출인 탓에 대를 잇지 못함) 조선의 상속법에 따라 적자 문중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호준의 일가는 대부분 양자로서 대가 이어졌던 바, 주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자 계열을 찾다보니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 6대조에서 갈려 나온 32촌 되는 가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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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27. 06:58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인조 임금이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끌려와 항복의 예를 표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장소에 세운 청태종 홍타이지의 기념비로, 본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와 처음 이 비석을 보았을 때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세워진 이 비가 얼마나 높고 위압적으로 보이던지.....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2005년경, 이 비석을 찾아 석촌역까지 왔으나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은행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었지만 실패했다. 이후 한참을 서서 식자(識者)로 보이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찍어 물었는데, 기대에 걸맞게 그 신사 분은 주택가 골목 골목을 돌아 목적지까지 안내해주었다.(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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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홍종우 (I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1. 23:58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경, 중국 상해 뚱허양행(同和洋行)의 한 호텔 방에서 고균 김옥균은 세 발의 총을 맞고 절명했다. 범인은 일본 동경에서 이곳 상해까지 고균과 동행해서 온 홍종우(1850-1913)로, 협력자가 아닌 자객으로서의 정체를 비로소 드러낸 것이었다. 홍종우는 방문을 연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고균을 향해 그대로 총을 발사했는데, 첫 발은 그의 뺨을 관통했으며 다음 발은 복부, 마지막 한 발은 어깨에 맞았다. 자객 홍종우는 현장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오후 체포됐다. 당시 고균의 나이는 43세였으며 홍종우는 44세였다. 당대의 풍운아는 그렇게 갔다. 고균이 상해로 간 것은 홍종우의 유인책에 빠진 탓이었다. 홍종우는 자신이 중국의 최고 실력자 리훙장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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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홍종우 (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9. 23:57
갑신정변의 주역 고균(古筠) 김옥균(1851-1894)은 요즘 말로 스팩이 화려한 인물이었다. 우선은 출신이 명문 안동 김씨 집안으로 아버지 김병태는 관직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절의를 보인 문충공 김상용의 직계 후손이었다. 옥균은 나이 5세 때 '월수소조천하'(月雖小照天下,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춘다)라는 글을 지어 동네 훈장인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옥균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병태는 자식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그 이듬해 옥균을 서울 북촌에 사는 5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보냈다.(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갔을 때 옥균은 그를 따라 강릉으로 갔다가 16살 때 북촌으로 돌아온다) 옥균은 그러한 아비의 뜻을 충분히 발현하였으니 1872년 불과 22살의 나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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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5- 백제 멸망의 수수께끼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4. 23:00
의자왕이 왜 그렇게 쉽게 항복을 했는가는 지난 20세기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로 여러 추측만 난무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중국 낙양 골동품상에서 백제인의 묘지명(墓地銘) 하나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비석의 주인공은 대당 좌위위 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 예식진(祢寔進, 615-672)으로 660년 의자왕 항복 당시 웅진성 방령(方領, 성주)이던 사람이었다. 그 묘지명을 2012년 12월, KBS 역사 프로그램 '충격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비밀'에서 전격 공개함으로써 세인들은 비로소 백제 망국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비밀에 접근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웅천 방령 예식진이 지키던 웅진성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앞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