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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V)-미야모토와 우범선의 최후

기백김 2020. 6. 26. 06:49

 

건청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찌른 놈이, 말하자면 명성황후를 죽인 놈이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라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일본 중앙대학 겸임강사이던 이종각이다. 그는 2009년에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라는 책을 쓰다 과연 명성황후를 누가 죽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고 이에 <일본외교문서>를 비롯한 여러 관련자료를 뒤진 끝에 범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뜻밖에도 놈은 사건 1년 9개월 뒤인 1897년(메이지 30년)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이 격렬했던 타이완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12월 20일 타이완 의병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런데 그 놈은 왜 다른 놈과 달리 혼자 사지(死地)에 가게 되었을까? 혹시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일부러 보내졌던 것은 아닐까? 이종각은 저명한 일본근대사 연구자인 나카츠카 교수의 의견을 들어 그러할 충분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역 군인이 타국의 왕궁에 난입해  왕비를 살해한 일이 밖으로 알려져서 좋은 일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전시도 아니었을 뿐더러 설령 전시라 하더라도 이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까닭에 일제는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군 훈련대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 한 것이었으나, 실패를 한 마당이니 미야모토의 존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타이완으로 가게 된 건 을미사변 때 같은 현역 군인으로서 활약(?)했던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는 앞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I) - 살해범들은 어찌됐나?' 거듭 사진이 올려질 만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깊숙이 관련돼 있는 인물이다. 사건 후 구스노세는 1985년 10월부터 1896년 1월까지 영창 생활을 하였으나 다른 민간인 가담자들이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는 시기에 맞춰 풀려난다. 이후 구스노세 타이완 총독부 참모부에서 복무를 하게 된다.

 

 

* 사건의 재구성

  

일본인들의 경복궁 진입 경로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반 경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군과 무뢰배는

 

왕비의 침소인 곤녕합에서 난리를 피우고

 

명성황후는 난리 통에 곤녕합 뒤편 쪽문으로 도망쳤으나 1 또는 2에서 붙잡혀(1은 영국영사 힐리어, 2는 일본영사 우치다의 보고서)

 

1 또는 2의 장소에서 목숨을 잃는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단은 관문각이 있던 곳이다.

 

당시 있던 서양식 건물 관문각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스노세는 188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자였다. 이후 소위로 임관하여 프랑스 포병학교에서 4년간 유학하고 육군 참보본부, 독일 군사학교, 모스크바 러시아 공사관 무관을 거쳐 1894년 12월 경성 공사관 무관(조선군부 고문 겸임)으로 부임한다. 그를 조선으로 보낸 놈은 청일전쟁의 영웅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 대장으로, 야마가다 아리토모 육군 대신과 함께 미우라 고로를 조선 공사로 파견했던 바로 그 자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 - 그날의 진실')

 

가와카미(川上)와 야마가다(山縣)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고 미우라 공사는 단지 종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앞서, 1, 2, 3편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가와카미가 직접 파견한 구스노세가 을미사변에서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을 쓴 재일교포 2세 김문자 교수는 위의 주범 3인 가운데 특히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 대장을 주목했는데, 그가 을미사변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전신망(電信網)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가와카미 소로쿠

을미사변 당시 대본영 참모차장 겸 육군중장이었다. 가와카미는 프로이센을 견학하고 일본군의 병제를 공격 중심의 독일식 사단제로 바꾸는데, 이때 그를 보좌한 자가 구스노세 유키히코였다. 이 무렵 구스노세는 가와카미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후 특명을 받고 육군중좌로써 조선에 파견된다.

  

구스노세 유키히코

이놈 사진은 벌써 세 번째다. 그만큼 이놈은 을미사변의 중추였다는 반증일 터, 미야모토 다케다로 소위에게 명성황후 살해 지시를 내린 것도 이놈이고 그를 타이완으로 불러들여 사지(死地)에 밀어넣은 것도 이놈일 터이다.

 

미야모토 다케다로

명성황후를 죽인 이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1858년 10월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스노세와 마찬가지로 을미사변 후 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풀려나 복귀하나 곧 타이완에서 전사한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낙승할 수 있었던 요인을 개전 이틀 전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정보총국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는 첩보전의 귀재라는 자신의 별명에 어울리는 판단이었는데, 앞으로 벌어지게 될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도 의주~부산 간 설치된 전신선의 확보를 급선무로 여겼다. 하지만 3국간섭 이후 친러정책으로 선회한 명성황후가 전신망 사용권을 내줄 리 없었을 터,(☞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 - 그날의 진실') 왕비를 제거하기 위해 미우라 공사와 구스노세 중좌를 파견한 것이었다. (☞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김문자 저, 김승일 역, 2011년 태학사)

 

 

명성황후 시해가 대본영의 계획임을 최초로 밝힌 재일동포 2세 역사학자 김문자의 책(※표지 사진은 명성황후가 아님)

 

 

김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이 한국 근대사를 아무 감정 없이 읽거나 쓴다면 나는 그것을 불가사의하게 여길 것 같다. 나는 일본 사료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도록 분노를 느끼다.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그 사료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재일교포 역사학자 김문자와 더불어 을미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한 사람은 위에서 말한 이종각이었다. 그는 특히 명성황후를 최초로 찌른 놈이 누구인가를 발본색원했는데 당시의 일본영사로 있던 우치다의 보고서를 도태로 범인을 쫓았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이러한 사실은 공문으로 보고 드리는 것도 결코 타당치 않아 극비리에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일람하신 후에는 태워 주시기 바랍니다."

 

위 보고서는 하라 다카시 문서연구회 소장 '우치다 사신(私信)'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치다의 보고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우치다보다 높은 사람임은 확실한 텐데 이 편지는 1918년 평민으로서는 첫 총리가 된 하라가 소각하지 않고 잘 보관해둬 살해범의 단초를 제공해주게 되었다. 이종각은 당시 일본인 수비대의 소위가 위의 미야모토를 포함한 4명(馬場績, 武永鐵之助, 宮本竹太郞, 立川成道)임을 밝혀내고 이중 살해 현장에 있던 놈은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 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는 또 당시 육군사관(미야모토)이 명성황후에게 칼을 내리칠 때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라는 자가 왕비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으며 이때 나카무라가 손끝을 다친 사실, 그리고 나카무라가 하수(下手)한 사실도 밝혀냈다.('하수'는 '다음에 손을 댔다'는 뜻으로 나카무라도 명성황후를 찌르거나 베었음을 의미한다/<일한외교사료 5권> 153쪽) 아울러 데라자키 다이기치(寺崎泰吉)라는 34살의 낭인이 '왕비로 판명되지 않았는 데도 난폭하게 궁녀들을 벴다'는 사실도 밝혀냈는데, 이때 데라자키와 같이 행동했던 토 가츠아키(藤勝顯)도 칼을 휘둘렀다.

 

~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 건청궁에 난입힌 무뢰배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비를 찌르거나 벴다고 자랑해댔던 바,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토 가츠아키가 후쿠시마 구시다 신사에 기증해 유명해진 히젠도(肥前刀) 역시 궁녀를 살해한 칼일 가능성이 높다. 작은 신문사 사장이 동원한 낭인들 따위가 감히 왕비를 어쩌지 못했으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는 말 많은 시간(屍姦)도 마찬가지다.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흑심을 품었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돼 그럴 짬도 겨를도 없었을 터.....(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종합적으로 언급하기도 하겠다)

 

앞서 말한대로 미야모토는 석방 후 원대복귀해 타이완으로 가게 되나 육군 소위에서 가장 위험한 병과인 헌병 소위로 전보된다. 알다시피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에 할양된 섬이다. 그런데 타이완에서는 당시 우리의 의병운동보다 훨씬 치열한 주민 항쟁이 전개돼 많은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미야모토도 이때 '토비 진압'에 나섰다가 타이완에 도착한 지 3개월여 만에 죽게 되는 바, 정말로 사지(死地)로 불려들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를 불러들인 자가 누구인가는 이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동정할 가치는 눈꼽만치도 없지만 미야모토는 딱하게도 전범들의 위패가 봉안된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안되지 못했다. 알려진대로 그곳엔 강제로 참전했다 죽은 한국인 징병자 위패도 합사돼 있다. 전장에서 죽은 군인들은 모두 그곳에 봉안되게끔 돼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야모토는 '명예로운 전사'에 속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일본의 타이완 점령 과정에서 희생된 1,130명의 명단에서 누락돼 있으며 약 12만 8천 명이 등재돼 있다는 합사자 명부 <야스쿠니신사 충혼사(靖國神社 忠魂史)>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종각 교수는 왜 미야모토가 명성황후 살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제시하고 다음과 같은 답을 제시했다.

 

아마도 그들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적임자를 찾았을 것이다. 첫 번째로 하사관이나 병졸에게 그 같은 중책을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대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중대장(대위)을 제외한 중위나 소위 등 초급장교 중에서,

 

두번 째로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만큼 상당한 군대 경험과 인명을 살상한 경험, 즉 실전 경험이 있는 자,(미야모토는 동학농민전쟁 진압에 참가해 무수히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세번 째로 임무를 수행한 후 발설하지 않을 '신뢰'할 수 있는 자를 골라야 했을 것이다. 이 같은 기준에 미야모토는 여러 면에서 부합되는 자였을지 모른다.(☞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2015년 메디치>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그는 사고무친한 불쌍한 자였는지도 모른다.(이를테면 고아 같은) 그래서 미야모토를 잘 알고 있던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이와 같은 약점을 이용해 출세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마야모토를 끌어들였고 마침내 을미사변을 성사시켰지만 이것은 그를 폐기시키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일가족이 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야스쿠니 신사에의 봉안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억울하게 이용만 당한 고혼(孤魂)으로 지옥문을 두드렸을지도.....

 

영악한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어쩌면 처음부터 미야모토를 일회용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일이다.(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없을까봐 얘기하는데, 나는 구스노세가 조선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을 쏘았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도 쏘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억울하게 이용만 당하고 죽은 못난 놈이 한국인 중에도 있었다. 다름 아닌 우범선으로 당시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무리에 참가한 자였다.

 

우범선은 평소부터 일본의 개화를 흠모해온 친일파였다. 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오카모도 류노스케와 진작부터 을미사변을 공모했지만 그들이 조선 훈련대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누명 씌우려는 음모는 알고 있지 못했다. (이 꼼수는 날이 밝고 살해의 목격자가 많아져 실패하고, 대신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신이 불태워지는 현장까지 지키게 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바보는 오히려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찌됐든 상황이 나빠진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에 살았으나(이때 낳은 자식이 우장춘 박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고종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되는 바, 그 자세한 얘기와 후일담, 우범선의 부하였다가 훗날 동서지간이 된 훈련대 중대장 구연수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 소개해 올리도록 하겠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V)-최후의 진실' 이어짐(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