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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북학회와 서북청년회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12. 9. 18:43

     
    서울 지하철 안국역에서부터 낙원상가 사이의 삼일대로(三一大路)는 3.1만세운동의 시발지로 길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다.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서는 '독립선언문 배부 터'라는 표석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천도교 신도이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이종일이 1919년 2월 27일, 자신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여 부를 인쇄한 후 천도교 회관 앞 자신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거사일인 3월 1일, 집 앞에서부터 배포하였던 것이다.  
     
     

    삼일대로 안내문
    독립선언문 배부 터
    수운회관 앞 천도교 3.1운동 마당 표석 / 이종일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
    조계사 옆 수송공원의 보성사 터 표석
    2021년 보성사 터에 세워진 이종일 동상

     
    그외도 삼일대로에는 시대를 휩쓸고 간 역사의 흔적이 오롯한데, 특히 해방 직후 혼란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지금은 세인들에게 잊혔고 별 관심도 없지만 삼일대로 안내판 아래의 조선건국동맹 터 표석은 해방 후의 극심한 반목을 대변한다. 그곳은 아직도 여전한, 지긋지긋한 좌·우 대립의 출발지 같은 곳이다.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이후, 광풍은 식민지 조선에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해방 1년 전인 1944년 8월 10일,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대비하기 위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일본의 패망을 직감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민족지도자 여운형에게 일본이 패망할 경우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안전과 치안을 은밀히 부탁했는데, 그러자 여운형은 이미 조직을 갖추고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연계해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조선건국동맹 터 표석 / 길 건너로 운현궁이 보인다.
    서울노인복지센터 옆 고합빌딩 자리에 삼광의원이 있었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구 통계국 청사가 있던 곳으로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이희태가 설계한 건물이다. 앞서 말한 양화진 성당을 설계한 사람이다.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모태로 다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했다. 건준은 삽시간에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면 · 동 · 리 단위까지 조직이 정비되었다. 이에 건준은 해방정국의 최대 정치조직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써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켰으나 미군정과 이승만 지지자들의 압박을 받았다. 건준에 빨갱이가 득실득실하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여운형은 결국 좌·우 모두에게 배척받아 살해되었다. (☞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ㅡ그는 왜 살해당했나?'

     
     

    계동 여운형 집터 표석 / 건너편 안동칼국수 식당이 그가 살던 집이다.

     

    삼일대로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역사 유적지가 존재한다. 대강 추려보면, 1921년 손병희가 건립한 천도교 중앙대교당, 1930년대 박길룡이 설계한 친일파 민영휘의 손자 민병옥 가옥, 1908년 서북인에 의해 건립된 서북학회의 터, 조선 중종조 때 개혁정치를 펴다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생가 터, 1880년 우리나라 최초로 우두 접종을 실시한 지석영의 집터, 1894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관립교동소학교, 1912년 일제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에게 헌사한 양관,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 등이 있다.  

     
     

    2018년 서울시의 삼일대로 조성계획도 / 낙원상가 5층은 옥상공원으로 조성해 삼일대로의 역사성을 살란다는 계획이었으나 흐지부지되었는데 지금은 올라갈 수조차 없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
    천도교 중앙대교당
    중앙대교당 내부
    길 건너에서 본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
    교당의 내부
    민병옥 가옥
    서북학회 터 표석과 위치 / 미니어처 왼쪽이 운현궁, 가운데가 천도교 중앙대교당, 수운기념관, 중앙종리원, 그 위쪽 ● 표시한 곳이 서북학회다.
    ①천도교 중앙대교당, ②수운기념관, ③중앙종리원이 있을 때의 사진 / 수운기념관은 동아공과학원(한양대의 전신), 성신가정여학교(성신여대의 전신)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사진처럼 영화관(문화극장)으로 쓰인 적도 있다.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석이 있는 곳에 중앙종리원이 있었다. / 어린이운동을 이끈 소파 방정환은 천도교인으로 의암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했다.
    서북학회 자리는 지금 주차장이 됐다.
    서북학회 터 표석
    서북학회 건물 / 서북학회는 건국대학교 내로, 중앙종리원은 우이동 천도교연수원으로 이건되었다.
    조광조 집터 표석
    지석영 집터 표석
    교둉초등학교 교문 앞의 관립교동소학교 표석
    옛 모습대로 복원된 교문
    교동초등학교 담장에 걸린 1918년 교동공립보통학교 8회 졸업생 사진
    1927년 교동공립보통학교 사진
    운현궁에서 본 양관 건물
    운현궁의 안채 이로당
    운현궁 입구 / 고종은 이 집에서 12살까지 살았다.
    운현궁 전시관의 공근문 (恭覲門) /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출입할 때 이용하던 전용 문이었으나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폐쇄시켰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10년 권세는 막을 내리게 된다. 문은 오래 전 사라지고 현재 일본문화원 내에 기초만 남아 있다.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사실 그중의 서북학회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곳이지만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말기, 기울어진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의 초석이 된 곳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북 사람들이 세운 구국단체이다. (당시는 3.8선이 설정되기 전이므로 이북, 이남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폐가 있으나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겠다)
     
    서북학회는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며 발족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의 향우회 격인 서우학회의 '서'와, 함경도 사람들의 향우회 격인 한북흥학회의 '북'을 따서 이름 지어진 서북학회는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과 민권회복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그 본부로써 대표자 33명의 공동 소유로 낙원동 282번지에 회관 건물을 짓고, 각기 운영하던 서우학교와 한북학교를 통합시켜 서북협성학교로 명칭하고 이 건물에 입주시켰다.
     
     

    1909년 10월 15일 준공된 서북학회
    당대의 서북학회는 종로의 한미전기회사, 황성기독교청년회관과 함께 장안의 명물이었다. / 사진 왼쪽 첨탑 건물이 한미전기회사, 그 오른쪽이 황성기독교청년회관(현 YMCA)이다.

     

    대표자 33명 가운데 박은식, 안창호, 이동휘, 이갑, 이종호, 정운복 등이 있었는데,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반일운동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던 바, 일제는 한일합병과 더불어 서북학회를 폐쇄시켰다. 이후 건물은 서북협성학교의 교사로 상용되었고, 이어 서북 5도민 대표자 명의로 건립된 오성학교가 사용하였으나 오성학교 역시 1918년 폐교당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이후로도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선전문학교, 고려대학교의 전신)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의 전신) 등으로 사용되며 고려대학교, 건국대학교, 단국대학교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조병옥 등 당대 지식인들의 반일 동맹인 수양동우회 사건의 중심지로서 탄압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서북학회가 해방 후의 극우 테러단체인 서북청년회의 구심점, 혹은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북청년회(혹은 서북청년단)은 해방 후 이북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한 사람들이 조직한 청년단체로, 처음의 각각의 단체(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1946년 11월 30일 종로 YMCA에서 헤쳐모여 창단식을 갖고 결성된 우익단체이다.
     
    이들은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지주, 개신교 인사, 민족주의자, 혹은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우익 진영의 광포한 돌격대로써 활약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평안남도 평원 출신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가 세운 서울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의 본부 격이었는데, 지금 그 교회 관계자들이 아무리 부정을 해도 이는 한경직 목사의 생전 증언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빼박인 상황이다.
     
    이를 테면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열렬한 반공 청년들이라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에) 가서 쳐부수고 해산시켰거든.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장로 됐수다"라든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는 말 등이 그것이다.
     
     

    우익의 돌격대 서청(서북청년회)
    소련의 한국 철수 요구 시위를 벌이는 서청단원들


    서북청년회의 대표적 활동 사례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 대구폭동 유혈 강제 진압, 제주 4.3사건 때의 살인과 약탈, 기타 여러 정치 테러에 가담한 일을 들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자주 보았던 평북 신의주 출신의 서북청년회 간부로 김구 암살사건에도 관여했던 홍종만에 대해서는 앞서 '제주 4.3사건의 현장을 가다 - 우리가 몰랐던 4.3' 등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그 외 평남 개천 출신으로 서북청년회 총본부위원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냈던 문봉제(2004년 작고)의 증언 등을 따로 정리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지금은 건국대박물관으로 쓰이는 서북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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