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주말에도 꿈지럭대려 애쓰는 편이지만 장마철 꾸물거리는 일기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아천동 계곡을 찾았다. 구리시 아천동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구지면 지역으로, 구지는 육지가 강이나 바다로 돌출한 지역을 일컫는 '곶'이라는 말에서 변형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지형을 보면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아차산에 면한 아차리(峨嵯里)와 우미천에 면한 우미천리(牛尾川里)가 합쳐지며 아천리라는 이름으로 편제되었다. 따로 아치울이라고도 불리며 뒷쪽 아차산과 동남쪽 한강을 배산임수로 한 이 조용한 동네는 과거부터 '과시하는 않는 부촌'이자 '알려지지 않은 예술인 마을'로 자리해, 과거에는 소설가 박완서, 탤런트 주현, 가수 조성모가 살았고, 가까운 우미내에는 큰손 장영자의 한옥 별장도 있었다.
아천동은 그간 그린벨트에 둘러싸여 있는 관계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왔다. 까닭에 과거 인근의 왕숙천이 똥물일 때도 아천동 계곡에서는 일급수에서만 서식한다는 가재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쾌적함이 아름아름 입소문을 타며 2000년대 들어 인구 유입이 늘었다. 전후로 JYP 박진영, 김수로, 박해미, 감우성, 오연서, 현빈·손예진 부부가 이사를 왔고, 최근에는 배우 한소희에 관한 목격담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소희는 마을 초입의 '빌라드그리움W' 전용 155㎡를 작년 12월 매입했다는 후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이곳 아차산에서 고구려군에 포로가 된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달아났고,(495년)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고자 남진한 고구려 온달 장군이 유시(流矢)를 맞고 전사한 곳도 바로 아차산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 장군의 무덤도 이곳 아차산에 있었다. 이억기는 1597년 7월,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부산포 공격에 참가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했는데, 그 무덤이 아차산에 있다 사라졌다. (☞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이 묻힌 아차산')
아천동은 이렇듯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유구한 역사와 스토리가 스쳐갔는데, 90년대말 배우 배용준이 우미내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를 찍을 무렵 발견된 아천동 계곡의 인면암(人面巖)은 따로 '욘사마 바위'로 불리며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코스가 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아무튼 아천동은 과거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주거지 혹은 유택지(幽宅地)로 자리매김을 해온 듯하니,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요코야마 쇼자부로(橫山將三郞)가 발견한 선사시대 주거지만 해도 아천동을 중심으로 수십 곳이다.
앞서 '암사동 신석기 유적을 세계에 알린 사라 넬슨'에서도 잠시 언급됐던 요코야마 교수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음에도(그는 예과 윤리학 교수였다) 1925년부터 1944년까지 서울·경기지역의 선시시대 유적을 조사하며 약 2,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집하고 유적지만 100여 곳을 확인하는 열정을 보였다. 대중교통이 취약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그 열정과 노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것으로서,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중 이른바 '요코야마 자료'라고 불리는 것이 중요유물로써 자리한다.
요코야마는 구리시 교문동 구릉지(현 구리시립 체육공원), 인창동 동구릉 부근, 사노동 등에서 선사시대인의 주거지, 고인돌, 유물 등을 발견하였고 유적의 일부는 아직도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아차산 일대에서도 여러 선사시대 유적을 찾아냈는데, 다만 오늘 말하려는 아치울 고인돌은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200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이 조사한 것이다. 이때 박물관 팀은 아차산·망우산에서 청동기 시대의 간석기와 무문토기편을 발굴했으며, 그 밖에도삼국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연질토기편과 통일신라시대의 경질토기편을 수습했다.
또한 아천동에는 아치울 마을의 산지에 전주이씨 묘역이 넓게 산재되어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정빈(李廷賓, 1539~1592) · 이충(李沖, 1568∼1619) · 이척(李滌, 1572~1639)를 들 수 있다. 아울러 남양홍씨 익산군파 휴휴당계 선영 묘역이 조성돼 있는데, 고인돌 바로 뒤에 있는 무덤군이 그것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홍응(洪應, 1428~1492) · 홍상(洪常, 1457~1513) · 홍윤휴(洪允祐) · 홍인수(洪仁壽, 1804~?)를 들 수 있다.
이중 눈여겨볼 것은 홍상의 신도비로, 그곳 홍상 비문에는 명숙 공주(추존왕 덕종의 딸)와 혼인하게 된 일화와, 올곧은 성정으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제주도에 귀양 간 이야기 및 중종에 의해 복권되어 원종공신에 봉해진 일 등이 쓰여있는데, 넓은 도량과 온화한 성품으로 모든이를 차별하지 않고 대해 그가 부마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써 천하를 호령하려 드는 요즘의 국회의원들이 귀감 삼아야 할 내용이다.
기타 남양홍씨 묘역 좌측 약 150m 떨어진 곳에는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아차산 고분군이 존재하는데, 고분 축조에 사용된 석재들 외에 발견된 유물이 없어 정확한 연대와 국가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