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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II)
    성서와 UFO 2016. 9. 16. 22:14

     

     ( I )에서 이어짐

     

    유월절을 앞두고 로마군들과 유대 당국자들 사이에서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방안이 구체화된 가운데, 예수는 즈음하여 예루살렘 근방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장에서 발췌)

     

    그리고 그 직후 배신자 유다가 유대의 대제사장과 로마군을 끌고 와 입맞춤으로써 예수를 지목하고, 결국 예수는 체포돼 대제사장의 집으로 호송되게 된다. 말하자면 예수는 자신이 체포될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신(神)인 여호와에게 위와 같은 간절한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지만, 예수가 피의 땀을 흘렸다는 사실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다. 예수가 정말로 피의 땀을 흘렸는지, 아니면 그만큼 절절히 기도했다는 의미의 은유적 표현인지 위 성서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드나, 다만 '피의 땀' 만큼은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가 있다.

     

    이는 의학적 용어로 '히머티드로시스(hematidrosis, 혈한증)'라 불리는데,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땀샘에 있는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배출되게 되고 이로 인해 소량의 피가 땀과 함께 섞여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의 강행군으로 심신이 크게 지쳐 있었던 바, 자신의 신을 향한 마지막 기도에서의 피의 땀은 딴은 이해되기도 할 일이다. 하지만 위 성서의 내용에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예수가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잠에 떨어져 헤롱거리고 있는 것이니, 이 상황은 오히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더욱 자세하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더라. 그들이 예수께서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번 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그만)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 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그와 함께 하였더라.(마가복음14:32-43에서  발췌)

     

     

    안드레아 만타냐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1455년경, 63x80cm)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승은 절망에 싸여 기도하는데 팔자 좋게 잠을 자는 제자들의 한심한 작태가 아니다. 내가 정작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 모두가 잠이 든 이 마당에서 예수의 기도를 보고 들은 자는 누구이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돌아와 한 말을 들은 자는 또한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상황을 분석하자면, 예수가 딱하게 생각할 정도로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예수는 배신자 유다가 유대 당국자들과 창검으로 무장한 로마군들을 몰고 왔을 때 비로소 제자들을 독촉해 깨웠고, 제자들은 이에 화들짝 놀라 깨어 일어났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때 깨어 있는 자는 오직 예수뿐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복음서를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될 터, 이 상황을  보고 듣고 기록한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소설 작법에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게 있다. 작가가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서술을 하는 방법으로서, 서술자가 감춰진 만큼 독자들의 충분한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점이 특징이다.

     

    성서에서는 예수의 얼굴이 묘사된 부분이 전혀 없음에도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예수의 얼굴이 미남형의 온유한 서구인의 모습을 취하는 것, 이것 역시 복음서의 시점이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따른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얼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종교 화가 워너 샐먼의 작품.(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얼굴이다)

     

      

    그에 비해 최근에 발표된 예수의 얼굴(영국 맨체스터 대학 연구팀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출토된 1세기 유대인의 인골 수천 구의 평균적 특징을 찾아내 복원한)은 가히 충격적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영락없는 소 도둑놈이나 말 도둑놈이다. 

     

     

    예수의 얼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맨체스터 대학 리처드 니브 교수가 복원한 예수의 얼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설명하자면, 위 성서의 내용에서 예수의 행동을 보고 듣고 기록한 사람이 누군가는 이제 명확해졌다. 바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복음서를 쓴 제3의 인물이 있었음이다. 

     

    재차 말하지만 소위 복음서라는 책은 거의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돼 있다. 마태복음은 철저히 3인칭이고, 누가복음은 1인칭과 3인칭이 혼용돼 있지만, 편지 형식의 첫 글을 제외하고는 3인칭이다. 때문에 복음서는 위와 같은 모순을 자주 노출할 수밖에 없는 바, 복음서의 내용을 픽션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픽션이 아니라 하기에는 위와 같은 모순이 눈과 양심에 걸린다. 도무지 변명거리가 없는 요소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도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이 복음서들을 누가 썼는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세리(稅吏) 마태가 아니고, 마가복음의 저자가 베드로의 제자 마가가 아니며, 누가복음의 저자가 의사 누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제자였던 어린 요한이 아님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의 이름은 다만 각 복음서의 편집을 끝낸 후학들이 갖다 붙인 이름일 뿐이다. 마태복음을 예로 들자면,

     

    '생각컨데 아마도 예수의 제자이자 말단 세무공무원이었던 마태가 썼을 것이다. 어부였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세리였던 만큼 글을 알았을 것이고, 그가 예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만큼 주님의 사후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이 체험한 예수를 글로 남겼을 것이다.'

     

    하는 식의 추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덧 정설로 굳어져 이제 마태복음의 저자가 마태가 아니라고 하면 한 마디로 '혼이 난다'. 이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의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아래 마태복음의 문장은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태복음 9:9-10)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태복음은 철저히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책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등장인물들은 다만 '그들'로서 관찰될 뿐 '우리'로 표현되지 않는다. 만일 마태가 썼다면 설령 1인칭 '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마태라 하는 사람(a man named Matthew)'이라는 식의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서는 이와 같은 모순을 마구 드러내며, 그 글 쓴 이를 알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과장은 있으되 그 전체가 허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의 기적들을 '과장'으로 인정하고 그 과장의 틀을 제공되게 만든 어떤 모델을 찾아내는 길이니,(과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는 그 기적이란 것들이 너무 허황되므로) 가령 예를 들자면 유대인 떠돌이 의사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나 회복자라 불린 사마리아인 '타헤브(Taheb)',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언급한 유대인 무당 '엘레아자르(Eleazar)' 같은 이들이다. 

        

      ~나는 한때 탈무드에 등장하는 동시대 사람 '하니나 벤 도사'가 예수의 유력한 모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으나, 다만 '무소유의 실천'이라는 어려운 일을 행했다는 것 외에는 거리로 삼을 것이 부족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찾아낸 사람이 '예수 벤 아나니아(Jesus ben Ananias)'이다. 이 자는 예수보다 약 30년 후에 태어났는데, 누가복음에 실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령에 의거하자면 그 역시 예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황제의 인구조사령은 서기 14년에도 있었으므로) 게다가 그 이름뿐 아니라 행적까지도 복음서의 예수와 유사하였던 바, 자신을 예언자라 여기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으며, 유대인의 각성을 호소하는 선동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로 인해 유대 당국자에 의해 피소되었고, 또한 재판까지 받았던 바, 이 역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과 유사했는데, 다만 반전이 있었다. 예수와는 달리 재판에서 정신병자로 판정돼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중에 '예수라는 과대망상증의 유대인 청년이 신의 아들을 사칭하였는가?'를 적용하자면 어쩌면 딱 들어맞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주요 테마에서 배제되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면, 이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질문 중 남은 것은 두 가지로, 그가 정말로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난 외계인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 물음은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거의 동일 선상에 있는 이야기다. 성서의 해석을 위해서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끌어 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앞서 말했듯 나는 신보다 외계인을 택했다. 

     

    나로서는 그것이 성서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외계인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확언하거니와, 그 옛날 이 지구를 찾아와 지구의 역사에 간섭했던, 그리하여 마침내는 여호와라는 신적인 존재로서 군림하게 된 외계인이지만, 그 존재는 다만 초문명의 세계에서 온, 보다 정확히 지적하자면 단지 지구보다 발달된 과학 문명의 세계에서 온 고등생명체일 뿐, 신과는 절대 무관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따라서 나는 외계인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거나, 혹은 이러한 염두로써 접근하는 사고를 배격할뿐더러 이와 같은 생각의 종교단체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이를테면 라에리언이나 사이언톨로지 같은 단체인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성서의 진실이 절실할 뿐이다.

      

    이제 나의 글은 자연히 나름대로의 성서 해석으로 흘러갈 터, 하지만 맹세커니와 그것에 신앙적 색채를 입히거나 SF적 요소를 가미하거나 혹은 기존의 종교를 비난하거나 하는 식의 전개는 하지 않겠다. 그것이 스스로 우를 범하는 길임을 알고 있기에...... 다만 어쩔 수 없이 기존 교계의 해석을 비판할 수는 있을 터, 이에 대해서는 강호제현들의 넓은 이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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