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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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호머 헐버트와 주시경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4. 06:09
1891년 육영공원 교사 계약기간이 만료 후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가 1893년 아펜젤러 등의 감리교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1893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일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이후 그는 조선 정부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교사들을 양성하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장 겸 교사로서 강단에 서게 되는데, 그에 앞서 잠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울러 감리교 선교사의 본분으로 아펜젤러가 운영하는 삼문출판사(Trillingual Press)의 책임자로서 아펜젤러와 함께 성서번역사업을 추진했다. ~ 영어 Trillingual은 ' 세 언어'라는 뜻이나 흔히 '3개 국어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유럽제국의 언어는 어형과 어미의 변화로 문장을 만드는 라틴어 계통의 굴절어군(群)에 속함으로써 단어만 알면 문장을 엮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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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헐버트ㅡ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2. 06:26
흥미로운 썰을 먼저 늘어놓자면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은 호머 헐버트가 아닌 중국인 위안스카이(원세개)였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쿠데타 갑신정변의 진압을 위해 내한한 23살의 위안스카이가 이후 조선 정부에 얼마나 모욕적인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앞서 '청일전쟁이 남긴 것(I)ㅡ한미수교를 대신 체결한 청나라 리훙장' 등에서 누누이 설명했다. 정말이지 그놈은 못된 자식이었는데, 이 하급 장교는 훗날 황제가 되었다. 인품을 떠나 명석한 구석은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그는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였고 이에 매료된다. 그는 중국 글자인 한자는 그 수가 너무 많고(언필칭 5만 자) 익히기 어려운 문자로서 중국 국민의 높은 문맹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정확한 진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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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와 육영공원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1. 07:31
길모어의 부인은 꼬박 일주일을 누워 있다 겨우 기력을 회복하고 일어섰다. 뉴욕에서 제물포까지 온 약 두 달 간의 여행보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의 하루 여정이 훨씬 힘들었을 터였다. 아무튼 훗날의 회고처럼 헐버트에게는 한국에서의 첫날이 힘들고도 기쁜 날임에 틀림없었겠는데, 잠시 후 말을 타고 나타난 언더우드는 그 기쁨을 배가시켰다. 목적은 달랐지만 먼 조선 땅에서 같은 미국인을 만났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기쁨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젠틀한 사람이었다. ~ 북미 장로교회에서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1859-1916)는 선교 목적으로써 헐버트보다 약 10개월 앞선 1885년 4월 5일 조선 땅을 밟았다.(☞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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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I)ㅡ조선과의 운명 같은 조우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0. 05:55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일생을 몇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한국과 관련된 그의 일생은 그만큼 파란만장했으며 다사다난했다. 그리고 너무도 희생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푸른 눈의 애국지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말로 그러해서 그에 관한 여러 자료를 읽고 나니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는가 하는 감동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 가는 잘 알려져 있는 편이나, 최근 내가 알게 된 몇 개를 덧붙이고자 한다. (물론 기존의 자료와 중복될 수는 있다)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빈 헐버트는 버몬트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고,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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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온 벽안(碧眼)의 여의사 로제타 홀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1. 30. 03:35
구한말의 푸른 눈의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의 일생을 약술(略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1889년) 뉴욕에서 빈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하다 1890년 10월, 보구여관(普救女館)의 두 번째 여의사로 내한했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 병원으로, 이름은 명성황후가 하사했다. (※ 保救女館은 잘못된 한자표기임) 당시 서울에는 알렌(Allen)이 경영하는 왕립병원 제중원이 있었고述,(☞ '박영효와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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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고아들을 돌본 의인(義人) 소다 가이치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1. 28. 19:24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래서 그 역시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일본인 선교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교사가 아니다. 다만 크리스천이긴 한데, 그가 크리스천이 된 이유는 오히려 한국 YMCA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에게 감회됐기 때문이다. 이 낯선 이름의 묘비명에는 '고아들의 자부(慈父)'라는 문구가 함께 쓰여 있다. 즉 그는 이 땅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삶을 살다 영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이치의 젊은 날의 생을 보면 그는 고아들과는 물론 한국과도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나가사키의 광부를 거쳐 26살 무렵 노르웨이 화물선박회사의 선원으로 홍콩 등지에 체류하였고, 대만 주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