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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I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이 떠도는 여의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8. 21. 23:29
오랜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과대망상증에 걸렸다. 이에그는 명나라를 정복해 중국도 손에 넣고자 했는데, 더 나아가 인도 고야의 영국 총독부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 조속히 항복하지 않으면 무력 공격하겠다는 협박과 같은 권고였다. 더불어 히데요시는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에게도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정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스페인 총독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일본과 싸워 완승을 거둔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니 1582년 철포(조총)와 일본도로 무장을 하고 루손도(島) 카가얀에 쳐들어온 1000여 명의 왜구를 40명의 스페인군이 몰살시킨 바 있었다. 그 왜구들은 명나라 해안에 출몰하여 거의 무인지경을 헤집듯 약탈을 자행하던 놈들이었지만, 중남미에서의 많은 전투 경험을 지닌 스페인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한 것이었다. 무기의 질이 뒤진 것도 원인이었으니, 스페인군은 철포에서도 앞섰고 불랑기포와 비슷한 화포로써 왜구들의 넋나가게 만들었다.
1680년 제작된 불랑기 자포(子砲) / 국립진주박물관 카트리지식 불랑기 자모포 전쟁기념관의 카트리지식 불랑기 자모포
다만 선전포고와도 비슷한 협박을 받은 마당이니 루손도 북쪽 해안 경비를 철저히 하며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뜻밖에도 일본군은 조선을 향했다. 사실 스페인령 필리핀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보다는 필리핀을 택해 쳐들어오라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여서 별로 취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예상을 깨고 조선으로 진군한 것이니, 이유는 외적에 대한 방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허약한 나라라는 첩보에 귀가 쏠린 듯했다. 히데요시의 입장으로서는 조선을 점령한 후 명나라 침공 시 병참기지로 쓰면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가 없을 듯싶었다.
이렇듯 스페인령 필리핀도 인지하고 있던 사실을 조선은 몰랐으니 배가 부산 앞바다에 새까맣게 밀려오고서야 비로소 침략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물론 전쟁 전, 동래의 왜인들이 조만간 히데요시가 쳐들어 올 것이라며 하도 떠드는 바람에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의 사정을 정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사와 부사의 보고 내용이 달랐으니,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한 것이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마치 쥐새끼처럼 생긴 것이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의견을 따랐다. 전쟁이 나는 쪽보다는 안 나는 편이 좋았으니 편의 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려 7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바, 그간 조선 백성이 겪은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같은 것을 보고서도 황윤길과 김성일의 생각이 달랐던 것일까? 그들은 단지 히데요시의 관상만을 본 것이 아니라 1년 가까이 머물며 첨단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막강한 정병의 왜군 진영도 직접 목도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과연 왜? 무엇 때문에?
부산성 순절도 / 부산포에 상륙한 빽빽한 왜선을 강조해 묘사했다. 성루 위에 부산첨사 정발의 모습이 보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은 동인이기 때문이었다. 훗날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을 변호하고자 함인지 그의 변명을 <징비록>에 실었다. "저도 전쟁을 의심했습니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그렇게 말했습니다"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만에 하나라도 전쟁을 의심했다면 그 만에 하나를 말하고 방비를 철저히 시켰어야했거늘, 백성이 놀라고 민심이 흉흉해질까 생각과는 다른 말을 했다니.... 이럴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이 말인지 막걸리인지 헛갈린다.
당시 동래(부산)에 의지해 먹고 사는 왜인들은 전쟁의 발발을 조선 사람보다도 더 걱정했다. 그것은 대마도 도주(島主) 종의지도 마찬가지였으니 종의지는 전쟁 전인 1589년 조선 조정에 조총 몇 자루를 진상했다. 조총의 위력을 보고 대비를 잘하라는 깊은 뜻이 담긴 선물이었다. 과거의 일본처럼 이 조총들을 역설계해 대량생산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조총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저 군기시 창고에 방치되었다. 그 3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실학박물관의 초기 조총 복제품 안내문 / 일본 철포의 초기 모델인 대화승통(大火繩統)으로 조선 출병을 위해 제작된 총이라고 쓰여 있다. 포르투갈 전래 초기 화승철포 조총의 일본 전래의 순간 / 1543년 명나라 닝보(寧波)로 가던 포르투갈 상선 한 척이 규슈의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좌초했다. 이때 젊은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는 포르투갈인이 소지하고 있던 서양식 철포의 위력에 반해 현재 시세 수억 원의 돈을 주고 총을 구입한다. 놀란 포르투갈 상인은 1+1으로 한 자루를 더 선사했고, 이 제작법이 전국 다이묘들에게 퍼져나가며 전국시대의 판도를 바꾼다. 철포가 전래된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 다네가시마의 철포전래기공비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동상 / 이 16세의 젊은 도주는 총 한 자루를 2천 냥을 주고 사들였다. 2천 냥은 현 시세로 1억 엔에서 2억 엔 사이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9~18억 원이다. 도키타카의 손에 그 조총이 쥐어 있다.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정5품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 분당이 이루어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1575년, 선조 8년의 일이다. 이후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으니, 이쪽이 서라 하면 저쪽은 앉아야 한다고 버텼고, 저쪽이 왼쪽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 이쪽은 일제히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서로는 정책이라는 게 따로 없었으니 오로지 상대의 의견에 반대를 하는 것이 정책이었다. 그 전통은 그로부터 4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의 그때처럼 백성들은 죽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서울 여의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이 떠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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