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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II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흔적이 이곳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8. 22. 23:25
임진왜란 후 그 잘난 양반네들은 다 어디 갔는지 일개 중에 불과한 사명당 유정이 선조 임금의 국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회담을 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사명당은 왜군에게 잡혀간 3,5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전후 회담이 이렇듯 무난하게 처리된 데는 일본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력이 컸다.
야심가였던 그는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 승리 후 에도(江戶, 지금의 동경)에 에도막부를 열었는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막부를 시작하는 만큼 할 일이 태산인지라 조선과는 빠른 국교정상화로서 전후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름 노력했던 것이니, 그가 사명당에게 "내 부하들은 단 한 사람도 조선 땅에서 해를 끼친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은 그에 대한 방증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543~1616)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출정하지 않았고, 덕분에 힘을 상실하지 않고 세력을 보존시킬 수 있었다. 다만 이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쇼군 히데요시의 동원령을 받고 조선침략의 전초기지인 규슈 나고야 성까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출정하지는 못했다. 그를 못미더워한 히데요시가 끝내 출정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는 미야코(都,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에도를 봉토로 주었다. 미야코로부터 먼 땅을 받은 다이묘들은 대개 히데요시에게 밉보인 케이스였다.
에도는 당시 바닷물이 범람하는 땅으로서, 네덜란드와 같이 둑을 쌓지 않으면 살 땅을 확보할 수 없었다. 물이 짜 식수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원래 이에야스의 봉토는 지금의 아이치 현이 있는 미카와였는데, 미카와의 이에야스를 멀리 간토(관동)지방으로 옮기게 한 것은 그에게 척박한 땅을 줘 힘을 기르지 못하도록 한 면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밉게 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인물로도 여겼던 바, 나쁜 땅을 줌으로써 이에야스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치수(治水)사업을 벌여 넓은 땅을 확보했다. 지금 도쿄도 당시의 매립지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에야스의 노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부터 간척지를 만들어 땅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으니 우선은 에도만(灣)의 여러 섬에 에둘러 바닷물의 침투를 막기 위한 뚝을 쌓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 뚝을 윤중(輪中, わじゅう) 혹은 윤중제(わじゅう つつみ)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빙 둘러쌓은 제방이란 뜻이었다.
그로부터 370년이 지난 1968년 6월 1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여의도 섬 둘레 7,533m를 잇는 윤중제(輪中堤) 준공식이 열렸다. 수시로 강물이 범람하는 모래섬 여의도를 빙 둘러 윤중제라는 제방을 쌓아 약 3㎢의 땅을 육지화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방의 40만3,001장 째 화강암 블록에 ‘한강개발’이라는 휘호를 새겨 넣었다. (이 휘호 블록은 이후 모래에 묻혀 사라졌다가 2014년 재발견되었다)
한강개발의 서막을 연 박정희 휘호석 이후 여의도는 '여의도 개발계획'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며 국회의사당, 방송국, 각종 금융관계사, 유명기업, 거대교회, 고급아파트들이 들어서며 금싸리기 땅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여의동로와 여의서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윤중제 제방을 따라 만든 길 윤중로는 여의도 순환도로의 역할을 했고, 윤중의 이름을 따라 윤중초등학교, 윤중중학교 등의 학교도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일제가 창경원에 심은 왕벚나무가 여의서로에 옮겨 식재되며 이루어진 벚꽃길은 명물이 되었는데, 매년 4월 만개 때의 봄꽃축제는 따로 윤중제(輪中祭)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 아주 뒤늦게 이 '윤중'이라는 단어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완전한 일본어식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했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래서 어제 다녀온 곳도 삼성생명 여의도 윤중지점이다. 너무 늦기는 했어도 이제라도 뭔가 개선책이 마련돼야 할 듯싶다.
1968년 윤중제 공사 사진 최초 윤중제의 흔적 당시 심은 버드나무가 지금은 군락지가 되었다. 아래에서 본 샛강다리 올라가서 본 샛강다리 샛강다리 위에서 내려본 현기증 나는 계단 여의샛강생태공원 연못 위 다리 샛강생태공원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수 같은 물 / 이 엄청난 물의 수원은 어디? 여의도의 터줏대감 여의도공원 내의 150년 된 뽕나무 모네의 그림 같은여의도공원 내 연못 천체주의식 11만 4,300평 여의도광장, 혹은 여의도 비행장의 흔적? 여의도공원 내의 C-47 군용기 / 해방 직후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여의도공항을 통해 귀국하는데 이승만은 다시 이곳을 통해 출국했다. 1960년 5월 29일 하와이 망명을 위해 여의도 비행장 트랩을 오르는 이 대통령 지금은 KBS 연구동으로 쓰이는 이 아파트는 거의 문화재급이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 어쩔? 그냥 모른 체 하고 갈 건가?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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