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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장 독일조계지와 파울 바우만 저택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9. 22:44

     

    오래전 양꼬치 집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칭다오 맥주에 감탄했던 기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중국 맥주의 기대 밖의 맛에 놀라 그 연유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니, 제국주의 독일이 1898년 중국 산동반도 교주만(膠州灣) 일대의 땅 552㎢를 조차(租借)한 결과이다. 청나라가 비실비실할 때의 이야기다. 

     

    '조차'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양측의 조약에 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서 통치함'으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교주만 일대를 빌렸다기보다는 빼앗았다 봄이 옳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의외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독일은 1897년 11월에 일어난 독일인 선교사 피살사건을 핑계로 자국의 군대를 파견해 교주만에 주둔시키고, 이듬해 3월 청나라 정부를 윽박질러 칭다오 시가 속해 있는 '키아우초우'(교주의 독일식 발음)에 대한 99년간의 조차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청·독의 조차 계약의 결과, 독일 측은 조차지는 물론 그 주위 50km 중립 지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나아가 독일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산동반도 일대의 철도 부설권 2건과 광산·탄광 채굴권을 얻어냈던 바, 지금 산동성의 대부분이 독일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독일은 교주만에 새로운 동양 식민지를 만든 셈이었는데, 덤으로 칭다오 라오산(崂山)의 풍광과 빼어난 물맛의 광천수를 얻었다. 그리고 그 물맛은 독일과 영국 장사꾼의 입맛을 자극하였던 바, 1903년 8월 독일과 영국의 합작 맥주회사인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가 설립되었다. 중국 최초의 맥주 회사였다.

     

     

    맑은 물이 빛나는 칭다오 라오산
    칭다오의 키아우초우 독일총독부
    교주만과 칭다오시 독일인 주거지 유적
    교주만의 위치
    교주만 독일조차지와 영향력의 범위 / 이곳을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과 함께 일본이 점유하게 된다.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는 곧 독일에서 생산설비와 원재료를 들여와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산 개시 3년만인 1906년, 독일에서 열린 뮌헨국제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독일의 기술력과 라오산 광천수의 빼어난 물맛이 합작된 결과였다. 이후 칭다오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나 그 영화는 채 10년이 이어지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군은 영국군의 지원 하에 산동반도 키아우초우에 진군하여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아래 <매일신보>의 광고는 그 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위력에 자의반 타의반의 합작광고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후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는 '대일본맥주 주식회사'가 인수했다가 다시 국민당 정부에게 빼앗기며 '칭다오맥주회사'가 되었고, 그것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칭다오 함락을 축하하는 <매일신보> 광고

     

    독일인 파울 바우만(Paul Baumann)은 그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독일 상인이다. 중국 교주만과 일본 나가사키 및 인천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그는 1906~1907년경에 인천 개항장의 독일 조차지에 북유럽풍의 근사한 저택을 지어 주택 겸 별장으로 썼다. 흔히 간과되는 것이지만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과 서양 열강들의 조계지(租界地=조차지)가 설정되었을 때 독일은 어느 나라보다 넓은 조계지를 확보하였다.

     

     

    인천개항박물관의 조계지 안내판 / 분홍색이 독일 조계이다.

     

    이는 독일이 조선에도 욕심을 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나, 청나라 교주만 경략에 열중한 나머지 조선에는 미처 신경을 못쓴 듯하다. 그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영국과 맺은 제3차 영일동맹에 의거, 교주만에 진군해 독일의 조차지를 빼앗았다. (하지만 1922년 제1차대전 종결 후 승전한 연합군은 일본의 행위가 너무 얍삽하다 하여 점령지를 중국에 돌려주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인천의 독일 조계지도 빼앗으며 조계지 자체를 없애버렸는데, 파울 바우만의 아름다운 주택도 일본에 몰수되었다. 

     

     

    파울 바우만 주택
    북부 독일의 슈파이어 성 / 바이에른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함께 미국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궁전이다. 파울 바우만 주택의 모델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 모양과 위치와 전망으로 볼 때 인천 최고의 저택으로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집이다. / 왼쪽으로 일제가 가설한 월미도 목교가 보인다.

     

    일본은 이 집을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별장으로 삼았다.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의 3대 총독(1920~1927년)과 5대 총독(1929 ~1931년)을 지냈는데,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 一成)가 월미도 유원지 아사유(朝湯)을 방문했을 때 사업가 고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의 별장(현재 인천시민애집 자리)에 머문 것을 보면 파울 바우만의 집은 총독의 별장 용도가 아니라 사이토 마고토의 개인 전용 별장으로 쓰였던 듯하다.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 1858~1936)

     

    사이토 마코토는 1920년 9월 2일,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길에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폭탄이 마차 뒷 행렬에 떨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구했고, 1926년 4월 28일에도 송학선 의사의 공격을 받았으나 송 의사가 오인해 다른 사람을 찌름으로써 암살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사이토는 이후 일본총리가 되었으나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인 1936년 2.26사태 때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이후 주인 잃은 별장은 방치되었던 듯한데, 광복 후에는 미군 휴게시설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손상을 입었고, 이후 복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55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송월초등학교·북성초등학교·인천과학교육원이 거쳐갔고 2000년에 현재의 자유유치원이 들어섰다. 그 유치원 때문인지 전방의 바다 쪽은 동일방직의 공장건물이 무겁게 앞을 가로 막고 있음에도 명랑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아마도 가로등에 매달린 여우와 코알라가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파울 바우만 주택이 있던 자유유치원
    자유유치원 바깥 길
    그 길 전신주의 여우와 코알라
    그 길 아래의 진짜 옛날 골목

     

    그와 같은 분위기는 근방에 위치한 송월동 동화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살아난다. 요술궁전, 아라비안 나이트, 재크와 콩나물, 백설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라푼젤, 아기사슴 밤비, 엄지공주, 미녀와 야수, 겨울왕국 엘사,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브레멘 음악대, 사바나의 기린, 북극 곰과 남극 펭귄, 깡통 로봇 등이 보는이의 마음을 동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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