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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정율성 거리와 인천 백범김구 거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10. 21:14

     

    대한민국의 주요도시에는 연고를 가진 유명인의 이름을 딴 거리나 공원 등이 조성된 예가 꽤 있다. 최근에 가타부타 말이 많은 광주의 정율성 공원도 그중의 하나인데, 차제에 말이거니와 이것은 절대 아니 될 말이다. 그가 뛰어난 작곡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중국 국립묘지 '팔보산(八寳山) 혁명 공묘'의 정율성 묘 비문에 새겨져 있는 글로써 충분한 방증이 가능하다. 
     
    인민은 영원하며, 율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그는 중국으로 가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그 해 '팔로군 행진곡'(중국공산당 군가)을 작곡했다. 그의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나 이 무렵 중국 이름인 정율성(鄭律成, 정뤼청)으로 개명했다. 음율로써 대성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으로서, 그는 중국 국가(國歌) 다음으로 유명한 공산당 군가를 작곡하였으니 뜻대로 성공한 음악가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중국 팔보산 국립묘지의 정율성 묘

     

    정율성은 1945년 12월 북한으로 넘어가 인민위원회 간부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노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자격으로 김일성과 면담했다. 그는 1947년 북한 인민군 소좌(한국의 소령)가 되었고 북한협주단 단장도 겸하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김일성과 북한군을 찬양하는 30여 곡을 작곡했다. 북한 인민군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더불어 전국 공연도 수차례 가졌으며 그와 같은 음악적 공로로 1948년 11월 김일성 포상장을 받았다. 이후 정율성은 6·25 대남 침략 전쟁에 참전했다.
     

     

    정율성이 받은 김일성 포상장

     
    그가 한국전쟁에 참여한 전범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로서 서울 점령 후 약 3개월간 주둔하던 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후 북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가 아예 귀화한 뒤 중공군이 되었다. 이후 중공군과 함께 참전한 그는 이번에는 중공군 장교로서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그는 이때 서울 시내를 돌며 조선궁정악보 등 유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휴전 후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중국 공산당과 중공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백 곡 작곡하다 1976년 죽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그가 생전에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정식 지정하는 안을 의결하였고, 덩샤오핑이 재가함으로써 동년 7월 25일 중국인민해방국의 공식 군가로 확정되었다. 2009년 건국 60주년 행사에서는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인물 100인 중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살아 있었다면 더 없는 영광이었겠는데, 사후라도 그 위대함을 기리겠다는 듯 2010년 이후 그의 고향인 광주직할시에 탄생기념 표석과 정율성 도로와 공원과 동상이 만들어졌다.
     
    근자에는 정율성 역사공원과 기념관 건립 예산을 두고 보훈부와 갈등을 빚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정율성로 입구에 서 있던 그의 동상이 한 광주시민에 의해 쓰러져 훼손되었다. 나는 그 동상이 다시 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동네 일본 파출소에 폭탄 한 개를 던졌더라도 젊은 날의 김일성이 무력 항일운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를 항일투사로써 대한민국의 도시에 기념거리를 조성하거나 동상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광주 정율성로에 있던 그의 동상 / 네이트 뉴스 사진
    그의 동상은 최근 이렇게 되었다. / 단언커니와 정율성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아무런 한 일이 없고 오히려 해를 끼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사람이다.
    정율성 거리 / 거리 전시관 초입의 정율성 이름이 피아노 건반 아래 선명히 빛난다.
    거리 전시관 정율성 연보사진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 악보 / 연안은 국공내전 동안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정율성의 업적(?)과 기념사업이 소개된 안내문
    거리 전시관의 1930년대 중반 정율성 사진
    1930년대 말 중국 연안 노신예술학원에서 지휘하는 정율성
    1940년대 말 평양군악대를 지휘하는 정율성
    1945년 8월 조선의용군 기념사진
    그밖의 정율성 관련 사진들
    정율성 연보 위에 누군가 "한국 전쟁 때 이 사람 무엇을 했나요?"라는 손 글씨를 남겼다.
    광주 남구의 정율성 생가 / 내부는 관리 소홀로 너무 지저분해 사진을 싣기 민망할 정도.
    생가 안내문 / 설명은 장황하지만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대한민국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다.
    중국 한단시 서현(邯郸市 涉县) 우즈산(五指山)의 조선의용군 옛 터 / 정율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1948년 4월 19일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당시 분위기를 굳혀가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중도파인 김규식과 함께 방북해 평양으로 들어갔다.(김규식은 21일 방북) 김구는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인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하자"며 역설하고, 4월 26일과 30일,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모인 4자회담을 가졌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남과 북 어느 쪽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 남북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남과 북이 영원히 나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948년 4월19일 김구는 김일성과의 통일회담을 위해 3.8선을 넘었다.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김일성 주석과 김구 선생

     

    김구의 주장은 선견지명을 담은 훌륭한 제안이었던 바, 김일성 역시 적극 찬동했다. 그는 "선생님 말씀이 옳습네다"를 연발하며 남북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김구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자신도 단독정부 수립을 묻는 인민 투표를 실시하지 않을 테니 대한민국에서도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입장을 갖춰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고무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들의 뜻은 미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북한 총선거에 의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제안은 이미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결렬된 바 있었다. 까닭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넘겼고, 1947년 11월 14일, 제2차 UN총회에서 UN이 파견한 위원단의 감시 아래 한반도 전역에 걸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그리하여 1948년 1월, 9개국으로 구성된 'UN임시한국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도착했으나 소련은 이들의 입북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이 총선거를 거부하는 이상 UNTCOK에 의한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힌 마당이었다.  

     
     

    미군정이 조직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결행되었고(5.10 총선거)  95.5%라는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로서 국회의원 200명이 선출되었다. 사실상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들어간 셈이었다. 김구는 5.10 총선거를 끝까지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5.10 총선거는 겉으로만 보면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김구와 김일성의 노력에 반하는 결과였다. 그런데 정말로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원했을까?

     
     

    5.10총선거 포스터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원했다. 단 그 방법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었다. 소련과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정부가 세워질 경우 이남보다 인구가 적은 북한이 선거로써 정권을창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UNTCOK의 방북을 불허한 것이었다. 대신 김일성과 스탈린은 남침을 착실히 준비했다. 김구의 1948년 4월  방북은 남북한 통일을 위한 열혈단심과 우국충정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지만 결국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생존하였다면 아차 싶었을 것이다. (그는 꼭 1년 전에 피격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통일 노력 자체는 값어치 있는 일이었고 이후로도 그의 국가를 위한 헌신은 계속되었다. 물론 정파적 계산도 있었을 터였으니, 미군정에서는 송진우나 장덕수 등에 대한 암살 배후에 백범 김구가 있다고 보고 그를 블랙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경계했다. 그러던 중 백범이 사저인 경교장에서 포병 장교 안두희에 피격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1949년 6월 26일의 일이었다.  

     

    이제는 암살범 안두희도 죽어 백범 살해에 대한 명백한 배후는 알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어릴 적 아저씨 뻘되는 홍종만 씨로부터 김구가 KCIC(중앙정보부의 전신)에 의해 살해되었고 배후에 경무대가 있었다는 말을 수없이 들은 바 있다. 홍종만은 평북 신의주 태생으로 국가대표 빙상선수 출신의 서북청년단 간부 단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KCIC가 제공한 권총으로 북한산에서 사격연습을 한 사실을 <동아일보>에 폭로하기도 했는데, 거의 매일 보던 얼굴이 신문 1면에 크게 실려 놀란 기억이 있다. 

     
     

    김구가 살해된 서대문 경교장
    경교장에 전시된 혈흔과 탄흔이 남아 있는 김구의 옷

     

    2021년 인천시 중구 신포동 거리에 '청년 김구 역사거리'가 조성되었다. 김구가 일제강점기 2차례나 복역을 한 연고를 따라서였다. 역사거리는 1차 복역을 했던 인천감리서(현 스카이타워 아파트) 아래에서부터 신포동 문화의 거리를 지나 성신아파트 앞에 이르는 약 200m 구간에 걸쳐 조성됐다.
     
     

    옛 인천감리서 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세워진 백범 모자상(母子像)
    백범이 1차 옥살이를 했던 인천감리서
    인천감리서가 있던 곳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구는 1898년 3월 19일 밤 인천감리서 감옥의 탈출을 감행해 성공한다. 그는 <백범일지>에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라 짐작하고 걸어갔다"고 적었다. 천주교당 뾰족집은 위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답동 성당을 말하는 것 같다. / 개인 집 벽에 그려진 그림 앞에 차가 세워져 있어 김구가 마치 찻길을 뛰는 듯하다.
    청년 김구는 1911년 8월 안악사건 및 105인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인천과의 인연을 이었다. 그는 인천감옥소에 수감된 후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1915년 8월 가석방됐다.
    축항 강제노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백범일지>에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불과 반나절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됐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계단에 매랍된 '노역의 현장' 푯돌

     
    하지만 2019년 2월 총 71억 6천만원을 투입해 만든 이 역사거리는 처음부터 과도한 구석이 있었다. 일례로 중구의회 주차장 담장에 그린 백범의 감옥생활을 형상화한 벽화와, 감옥문짝을 들여다보며 모니터로 감옥생활을 관람하게 만든 독특한 아이디어는 오히려 혐오감을 부른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지고 지금은 동상과 위에서 소개한 몇몇 기념물만 남았다. 백범 동상이 있는 신포동 로타리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는 미야마찌(宮町)로 불린 번화가로서, 당시 러시아 마담이 운영하던 '긴빠'(金波)라는 유명한 3층 카페는 아직도 건재하다. 기타 이 일대에는 '긴빠'와 같은 칼집(세장한 형태의 건축물)이 거리 모서리마다 서 있어 이색적이다. 인천에 가거든 신포 로타리 주변의 칼집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하다. 그러다보면 '긴빠'를 발견하게 된다. 

     
     

    김구 동상이 서 있는 광장과 그 주변 건물
    일제강점기 금파 거리의 '긴빠'
    인천시립박물관에 그림으로 재현된 금파거리
    옛 '긴빠'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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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