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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안염전과 주안신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1. 16. 23:44

     
    1963년 6월 2일, 인천에서는 답동의 무허가 화공약품공장에서 화재폭발이 일어나 18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화상을 입는 대형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콜레라가 발생해 137명이 사망했는데, 그 이듬해인 1970년 2월에는 용화사라는 주안의 사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유독가스에 질식되는 사고가 있었다. 인근 주안공단의 염산공장에서 누출된 가스가 사찰에 모인 사람들을 덮친 것이었다.
     
    그중 30명은 상태가 위중해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다행히도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사고의 자료를 찾다가 당시 사고가 일어난 절을 방문하게 되었다. 앞서 '1999년 일어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과 그후'를 포스팅한 이후, 인천지역의 사건 사고를 좀 더 들여다볼 양이었는데, 그러던 중 사고가 난 위의 사찰이 과거 주안신사(朱安神社)가 있던 곳에 세워진 절이라는 기사를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즉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로 43은 일제강점기 주안신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은 용화선원이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음이다.

     

     

    주염로에서 보이는 용화선원
    용화선원에서 바라본 주안역 북쪽의 주안5공단

     

    주안신사는 인천신사, 애탕신사와 달리 남은 자료가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주안신사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인천에서는 매년 10월 5일 염전제(鹽田祭)라고 하는 축제가 치러졌고,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염조대신(鹽窕大神)을 합사한 주안신사의 신주(神主)와 인천신사에서 파견된 사사(社司)행사를 주관했다는 기사가 이번에 아울러 검색됐다. 주안신사는 일본의 대빵 귀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카미)과 소금의 신 염조대신(엔무쯔로 오오가미)을 봉안한 신사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안신사의 유일한 흔적인 표석 / 경기신문 사진

     

    염전제는 10월 4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이튿날까지 벌어졌는데, 전야제 때는 주안신사에서 출발한 신주의 뒤를 에도시대의 무사와 평민 등으로 분장한 무리들과 조선인 풍물패들이 구호를 외치며 따르는 일본식 마쯔리 행사가 치러졌고, 이튿날에는 인천전매국 마당에서 염전의 노동자인 염부들의 운동회가 벌어지고 상품권 추첨, 그리고 게이샤(기생)들이 동원된 연회로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

     

     

    염전제 행사가 벌어졌던 십정사거리 부근 길

     

    앞서 인천전매국 간부였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남편 김행도에 대해 말하며 지난날 소금이 담배와 더불어 일제의 전매사업 물품임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주안염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염이 생산된 곳으로, 일본이 타이완을 병합하며 그곳 원주민의 천일염 기술을 들여온 후 그것을 최초로 입식(入植)한 곳임도 말한 바 있다. 넓은 갯벌에 밀물과 썰물이 있고, 비가 적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이 지역은 천일염 생산에 있어 가히 천혜의 장소였던 것이다. 

     

     

    부평구 십정1동 주안염전 표지석 / 한국 최초로 천일염이 생산된 곳으로 과거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인천in 사진)
    인천시 남구 주안동은 현재는 아파트와 상가건물이 가득하지만 과거에는 사방 수십 리가 광활한 염전지대였다. 왼쪽 홈 플러스 근방에 위 표지석이 있었다. (표지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주안연전의 염부
    1910년대의 주안염전

     

    위 주안동 지역에 시험염전이 개설된 것은 1907년으로, 곧이어 서구 가좌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로 지역이 넓어졌다. 여기까지가 대략 주안염전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역이다. 일제는 이후 4차례에 걸친 확장 축조공사 끝에 주안뿐 아니라 남동·군자·소래 등지에도 염전을 확보하게 되는 바, 1945년까지 5925 정보를 완성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전국생산량의 60% 이상을 점하였다.

     

    소금은 식용뿐 아니라 수출용 정어리 등의 수산물에 대한 염장과 수출용 염우피(소금에 절인 소가죽) 등에도 사용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울러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소금 가마니 생산은 전국 농촌의 큰 부업으로 자리해 겨울 농한기가 사라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나, 일대의 염전은 해방 후 소금 가격이 하락하고 국토개발이 진행되며 차츰 쇠락하였다. 주안염전은 1968년 폐전되었으며, 1970년대 초 그 자리에 한국수출공단 5단지, 일명 주안공단이 준공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주안염전은1963년 '염관리법'에 의해 소금 전매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정부 대행 기관인 대한염업주식회사(1963~1991)가 운영하였다. 그러나 주안염전은 공업화를 주창한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시행에 의해 1968년 폐전(廢田)되고, 그 자리에 1973년 주안수출5·6공단이 조성되었다. 대한염업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한 고(故) 김 명국(1928년생, 평북 개천군)씨에 따르면, “회사 내부에서는 주안염전 가운데 주안염전 시험장인 십정동 1호 염전만큼은 역사적 상징성이 있어, 보존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정부 입장을 거스를 수 없어 그대로 염전을 폐전하게 되어 아쉬웠다”라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ㅡ <부평사(史)>에서 옮김.

     

     

    '염전로'와 '주안시범공단' 글자가 대비되는 용화선원 앞 길

     

    이처럼 근방이 평지였던 까닭에 주안신사가 있던 곳의 레벨은 인천신사와 애탕신사가 자리했던 곳과 달리 높지 않다. 하지만 일대에서는 높은 언덕이었겠는데, 지금도 용화선원에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시야 아래 있었다. 주안신사는 언제 지어지고 사라졌는지 기록은 전무하지만 그 추정컨대 염전이 크게 활성화된 1930년경에 지어져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염전로 표지판과 근방의 아파트단지
    용화선원에서 바라본 근방의 아파트단지

     

    가스 중독 사고가 있었던 1970년 당시 용화사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었으나 2010경 재산 분쟁이 일어나며 2014년 용화선원이라는 이름의 독립 사찰이 되었다. 주안신사 자리였던 이곳에 처음 절이 들어선 때는 1950년 봄으로 일명 청신녀(淸信女)로 불리던 정금강 보살이 용해사(龍海寺)를 창건한 것이 시원이다. 이후 1954년 화성 용주사 출신의 전강선사(田岡禪師)가 주석하며 기틀을 닦았는데, 즈음하여 절의 이름도 용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용화선원 일주문
    용화선원 대웅전 / 아마도 신사 본당도 이 자리에 위치했을 것이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을 모범으로 1991년 건립된 전강선사 사리탑
    폐사지의 옥개석과 기단석을 잘 살려 복원시킨 신라 삼층석탑 / 폐석탑 모범복원의 예로 삼아도 좋을만큼 원형에 충실히 복원됐다.
    수작(秀作)으로 보이는 시기를 알 수 없는 석불입상
    용화선원 여기저기
    용화선원 앞 길가의 '염전골 이야기'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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