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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 사진사 구와바라 시세이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9. 20:36

     
    지난 2001년 청계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보수유지냐 철거북원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당시 서울시 건설안전본부는 전면적 보수 내지는 철거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는데, 그전까지는 별 말이 없다가 미8군에서의 자체점검 결과 자국(自國) 차량의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는 소문이 일자 급 돌변해  전면적 보수 내지는 철거가 시급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미8군에 관한 소문의 진위는 지금도 불투명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을 반대했다. 청계고가는 서울시 교통난 해소의 일등공신이던 도로였기에 무작정 철거하면 곤란할 듯싶었다. 예를 들어 청계고가를 이용하면 삼일·서울역·아현고가도로를 타고 서울 동쪽의 청량리에서 서쪽의 신촌까지 논스톱으로 단숨에 도착할 수 있는데, 만일 고가도로가 철거된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계천은 복업사업이 끝난 2005년 10월 무렵, 청계천 7가에서 을지로 입구의 기업은행 본점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을 때는 정말이지 화가 나고 욕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는 10분이면 충분했을 거리를 1시간 걸려 도착했으니..... 길은 한정돼 있고 차는 점점 많아지는데, 늘리지는 못할망정 있는 도로마저 위·아래를 모두 뜯어냈으니(청계고가와 청계로) 정체는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고가도로가 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근대화의 상징이던 청계고가
    1969년 완공된 고가 양편의 삼일아파트
    1969년 삼일고가도로 개통식

     

    정말이지 청계천 고가도로는 수도서울의 대동맥과 같은 도로로서 청계고가에서 여기저기로 갈라지는 입체교차로는 대동맥에서 파생되는 인체의 혈관을 방불케 했다. 시각적으로도 그럴싸해서 사회 교과서에는 나라의 발전상이라며 현대식 고층 빌딩과 삼일고가도로가 교과서 한 페이지에 수록됐는데, 삼일고가도로변 31층 110m 높이의 삼일빌딩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층빌딩이었다.
     
     

    대한뉴스 속의 삼일고가도로와 삼일빌딩
    삼일고가도로와 삼일빌딩 / 모두 3.1절에서 기인해 명명됐다. 대일목재공업( 삼미그룹의전신)의 사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70년 완공되었으며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다.
    다수의 눈에 익은 사진 / 삼일빌딩은 여의도 63빌딩이 출현할 때까지 대한민국 최고층건물로서 군림했다.

     

    아무튼 청계고가와 청계로는 이명박 시장 시절에 깨끗하게 사라지고 청계천이 복원됐다. 하지만 그 청계천은 백악산에서 발원한 옛 청계천 물이 아니라 수돗물을 펌프로 강제순환시키는 인공수로이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그럴듯하고, 또 물이 있어 보기 좋으니 결과적으로는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노가다 출신 이명박의 주특기와 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셈이니 그는 이 청계천 복원을 바탕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해 결국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울시는 한양 500년의 청계천 물길이 다시 시민에게로 돌아왔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바, 이 또한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서울시민들 역시 이제는 '빨리빨리'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여유'를 추구하게 되었던지라 나처럼 비호감으로 대하는 사람은 적은 듯했다. 하지만 청계로에 의지해 생활하던 많은 소상공인(봉제·포목·철공소·헌책방·잡화 등)은 갈 곳이 없어졌는데, 그래서 한때 시위꾼이 되어 경찰들에 이리저리 몰리던 그들은 지금 다 어디 정착해 사는지 궁금하다. 

     
     

    미니어처로 재현된 평화시장과 청계로
    청계천박물관 전시물이다.

     
    그곳 청계로는 2003년 7월 1일 복원사업을 개시하여 2005년 10월 1일 완전히 뚜껑이 열렸다. 복개되었던 아스팔트와 고가도로가 모두 걷히고 청계천 물길이 흐르게 되었다는 얘기다. 공사기간은 2년 3개월, 총공사비는 약 3천800억 원이 들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전부터 흐르던 청계천은 왜 덮이게 되었을까?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아래 사진을 보면 답이 나온다. 일본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을 찍은 것으로 1960~70년대의 모습이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1958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77년 완전히 복개되었다. (이것을 이명박 시장이 뜯어낸 것임)
     
     

    구와바라 시세이가 찍은 청계천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1936~     )

     
    그런데 이게 대체 뭔가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니, 복개가 진행될 때 태어난 1970년대 생이나 복개가 완료된 후 태어난 1980년대 생은 아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계천로 8가에 있는 청계천박물관의 전시물을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에 대한 설명에 앞서 올려본다. 5~60년 전 청계천변의 사람들은 똥물을 생활기반으로 삼아 이렇게 살았다.  
     
     

    청계천 판자촌 미니어처
    청계천박물관 내의 전시물이다.
    박물관 맞은 편에 재현된 옛 판자집
    박물관 계단에서 찍은 사진
    청계천 천변에서 찍은 사진


    60년대 중반 청계천의 천변풍경을 흑백사진에 기록한 구와바라 시세이 일본의 사진작가이다. 그는 시마네현 가노아시군 쓰와노정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하지만 부친은 한국에 관한 언급을 피했던 듯, 그와 한국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도쿄농업대학 시절 만난 H군이라는 한국인 유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H는 한국전쟁을 피해 밀항해 온 학생으로 구와바라는 이때 처음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을 찍으면 많은 기록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던 구와바라는 다시 동경종합사진전문학교에 들어가 1960년 졸업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2년, 일본 구마모토와 가고시마 두 지역에서 발생한 괴질인 미나마타병을 취재해 일본사진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받았다. 미나마따병은 공장의 폐수에 함유된 수은으로부터의 중독이 원인인 병으로 구와바라가 이에 대한 사진전을 갖기 전에는 기업들이 쉬쉬하던 병이었다. 그는 이로써 사진가로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2년 후인 1964년 7월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의 그래픽 월간지 <다이요(太陽)>가 기획한 '분단 한국'의 특집 기사 취재 차였다. 이후로  50여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며 10만 컷의 사진을 찍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전쟁과 분단, 한일수교반대 데모 등 정치에 관한 것들로 모두가 매우 역동적이다. 
     
     

    한일수교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구와바라 시세이가 찍은 유명한 사진이다.
    시위대를 공격하는 경찰과 이를 구경하는 동네사람들
    경찰에 쫓기다 개천에 빠진 학생들

     
    그러던 어느 날 구와바라의 눈에 청계천 판자촌이 들어왔다. 그리고 머잖아 사라질 희귀한 풍경이라는 생각에 청계천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무슨 의도로 굳이 궁핍한 동네를 촬영하느냐"며 욕도 많이 먹었고,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조사도 받았다. "북한이 당신 사진을 이용해 가난한 남조선의 모습이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혹시 이적단체에 가입돼 있는 자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는 두 번째 한국 체류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결국 강제출국 당했다. 그를 이적단체의 사람이라 의심했다기보다는 체제 유지에 불리한 사진만을 골라 찍는 것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어찌어찌해 다시 한국에 왔지만 또다시 강제출국을 당해야 했는데, 그동안도 청계천의 여러 모습을 찍었다. 하지만 복개가 완전히 이루어진 1977년 이후로는 입국이 자유로워진 몸임에도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고, 1988년 이후로는 한국에서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구와바라는 "이제 한국에도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이 많이 등장해서 굳이 외국인인 내가 기록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피사체가 되었던 한국인들과, 사진에의 천착으로 가난을 물려받은 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찍히는 사람이 언제나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 나는 어쩌면 그동안 많은 한국인에게 상처를 입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 행위는 아니었다. 다만 사라져 없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가 한국사람에게 남긴 말이다. 그리고 청계천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청계천은 악취가 나고 마치 하수구와 같은 곳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가난하고 고단했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청계천 주민들의 모습에 언제나 감동을 받았다."
     
    청계천 복개공사와 더불어 이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1990년대 들어 청계천 복개 구조물과 청계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대두되자 서울시는 2003년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고, 2005년 시민들에게 청계천을 공개하였다. ( <서울육백년사>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기록, 1997년)
     
     

    1962년 12월 복개된 동대문 위쪽 구간
    1968년 고가 교량 건설 사진 / 콘크리드 거더(giider) 대신 거더와 상판을 모두 철강으로 만드는 미국과 일본 기술이 도입됐고, 철강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2005년 청계천 복원 후 하류 쪽 교각 3개를 기념으로 남겼다.
    청계천의 상전벽해
    청계천 박물관 / 옛 고가도로를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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