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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허 현진건과 그의 가난한 아내가 살았던 서울의 마지막 집
    작가의 고향 2024. 2. 13. 20:39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우리에게 <빈처(貧妻)>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과거 국어교과서에 그 소설의 전문(全文)이 실렸기 때문인데,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와 같은 가난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겠거니와 간접적으로라도 와닿지 않을 터,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법하다. 아울러 현실적 가난과 자존심을 둘러싼 심리 묘사도 현대 고등학생에게는 와닿지 않은 면이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일 법한 현진건 부부는 내내 가난했다. 반면 현진건의 처가는 경주에서 알아주는 부자집이었던 바, 혹간 처가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계를 이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처갓집에 가오('얼굴'에 해당하는 일본 말이지만 적당한 표현이다)가 서지 못했는데, <빈처>는 친정집에 간 아내가 하대(下待)를 받고 처남댁이 부(富)를 과시하는 것에 분노하는 주인공의  자격지심을 묘사한 소설이다. <빈처>는 '가난한 아내'라는 뜻이다.  
     
     

    현진건과 그의 가족 / 가운데는 양어머니, 오른쪽이 아내 이순득이다.
    오른쪽이 아내 이순득이다.

     
    그렇다고 빙허가 자신의 자격지심을 아내에게 분노로써 퍼붓는 못난이는 아니었으니, 오히려 아내에 대한 사랑이 끔찍했던 사람이다. 그의 또 다른 단편 <술 권하는 사회>는 <빈처>, < 운수 좋은 날>과 더불어 시대의 암울을 노래한 사실주의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그는 여기서도 아내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과 남편의 자조를 동정하는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의 아내 이득순은 필시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왔음이다.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렀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 낟 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아물었으려니 하고 손을 떼면 또 얼마 아니 되어 피가 비치어 나온다.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서 났다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아내는 남편이 말하는 사회가 무언지 모른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릿집 이름이려니 하고 치부한다....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술 권하는 사회> 중에서)
     
     

    「빈처」가 실린 『개벽』 2호지
    『백조』 창간호 / 현진건은 박종화 나빈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 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백조』 창간호에 수필 「영춘류(迎春柳)」를, 2호지에 단편소설 「유린」을 발표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그의 호 '빙허'는 '허공에 의지한다'는 뜻으로서,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소식(蘇軾)의 명문(名文) <적벽부(赤壁賦)> 중의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탔도다(浩浩乎! 憑虛御風而)'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우리에게 소동파라는 아호로써 익숙한 소식은 명문장가임에 분명하니, 김부식, 이규보, 이제현, 이색 등의 학자가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으며 조선시대에도 그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끊이지 않았다.
     
    현진건은 위 <적벽부>의 '허공에 의지한다'는 문장이 당시 자신의 심경에 가장 들어맞는 말이라고 여겨 '빙허'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밝혔는데,(1930년 잡지 <삼천리>) 역사를 좀 더 깊이 알았다면 그와 같은 호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동파는 "고려가 싹수없이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공한답시고 허접한 물건을 들고 와 더 많은 귀한 하사품을 가져가는데, 필시 그것들을 거란에 바쳤을 것이다", (고려가 요·송과 쌍방외교를 이어가는 관계로) "고려는 금수와도 같은 나라이니 금수처럼 다스려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내던 극혐파였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현진건은 투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집안 또한 그러했으니 대한제국 육군 참령을 지낸 맏형 홍건은 훗날 러시아 통역관으로서 독립군을 도왔고, 셋째 형 정건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아울러 재종형 상건도 대한제국 정부의 밀명을 받아 유럽을 돌며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셋째 형 정건은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 형무소에서 3년 옥살이를 하다 병보석으로 출소했으나 열흘 뒤 후유증으로 죽었고, 이듬해 형수 윤덕경도 자실함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던 현진건 자신도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한 경력이 있는데, 그 무렵 친일로 돌아선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에게 송년회 자리에서 싸대기를 갈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앞서 말한 김동인을 비롯해 이광수, 최남선, 박태원, 유진오, 유치진, 정비석, 이무영, 채만식 ,최재서 등 주변의 문인들도 거의가 친일을 했다.

     
    하지만 현진건은 드물게 독야청청했는데, 민족시인 이상화와 현진건이 같은 대구 계산동에서 동무로써 자랐다는 사실이 신기하기조차하다. 현진건은 대구 중구 계산동 2가 69번지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에서 1900년 9월 2일 출생했고, 이상화는 중구 서문로 12번지 양옥에서 1901년 4월 5일 출생했는데, 우연찮게도 이 두 이웃은 당대의 문인 중에서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몇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현진건은 그로 인해 가난과도 이웃해야 했다.
     
     

    1937년경 천재화가 이인성이 그린 계산동 성당 그림
    대구 계산동 성당과 선교사 사택이 있는 청라언덕
    언제나 굳건히 닫혀 있는 서울 계동 인촌 김성수의 집
    제기동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앞둔 제기동 135번지 일대 (2020년 서울시 제공사진) / 빙허가 마지막으로 살던 동네다.

      
    이후 현진건은 동아일보를 사직하고(1937년) 신문사 근방 관훈동 집을 떠나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업을 시작하며 <흑치상지> <무영탑>과 같은 긴 호흡의 소설을 썼다. 그가 이제껏 쓴 20여 편의 사실주의 단편에서 벗어나 역사 장편소설을 쓴 것은 글로써 생계를 잇겠다는 뜻이었지만, 동아일보에 연재한 <흑치상지>는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58회 만에 강제 중단되었다. 백제부흥운동 같은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인데, 더불어 단행본으로 낸 <적도>, 단편집 <조선의 얼골>도 판매금지되었다.
     
    그 무렵인 1939년은 그가 동아일보에 복귀하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던 때였으나 일이 이렇게 되자 생에 대한 낙담이 왔다. 게다가 양계업으로 재미를 본 훗날의 김수영(시인)과 달리 현진건의 양계업은 신통치 않았던 듯했으니, 어려운 삶에 비례해 귀를 얇게 만드는 심술 도깨비가 찾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구경 한번 가자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명동의 증권회사를 찾았고, 당시 유행하던 미두(米豆) 선물거래의 막차를 탔다.
     
    하지만 막장에 투자했던 탓에 돈을 모두 잃었고 그나마 생계를 이어주던  양계장 및 부암동 집을 처분해야 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부근의 허름한 초가집(현 동대문구 제기동 137-61번지)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후로는 드문 드문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는 술독에 빠져 있는 날이 많았다. 그리하여 결국은 중풍에 걸렸고 거기에 폐결핵과 장결핵이 겹치며 1943년 4월23일 사망하고 말았다. 죽마고우 이상화가 위암으로 죽은 날과 같은 날이었다. 사랑하던 아내 이순득도 이듬해 경주 친정에서 사망했다. 

    빙허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되었으나 이후 개발의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제기동 초가는 진작에 없어졌고 부암동 집도 2003년 철거되었다. 부암동 집은 비교적 근래까지 존속된 셈이지만, 현진건 집과 안평대군 별서 자리를 포함한 일대 11,000㎡ 땅이 소송과 경매에 휩쓸리며 보존이나 복원 같은 소리는 꺼내지도 못한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현진건 집의 2002년 사진
    부암동 집터는 흔적이라도 남았지만
    안암로20길 7-7에 위치한 제기동 집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 혹 찾아가실 분은 

    고려대학교 정문 길건너 '고대앞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방향 골목으로 들어가면
    곧, 개발이 한창인 골목을 만난다.
    직진하여 Flamu 간판이 보이면 옆 골목으로 바로 좌회전
    그러면 이런 골목이 나오는데
    오른쪽 집이 안암로20길 7-6이므로
    그 맞은편 집이 목적지가 된다. 집주소 표시는 없다.
    모퉁이 집이므로 왼쪽 담장 안쪽도 안암로20길 7-6에 속한다.
    위의 현진건 집자리는 물론, 부근의 이와 같은 풍경도 곧 사라질 듯하다.
    서울시가 고시한 제기동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끝나면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부근 제기교에서 본 정릉천과 종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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