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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탄 박종화와 춘원 이광수가 살던 세검정
    작가의 고향 2024. 3. 17. 00:36

     
    작가 박종화의 호 월탄(月灘)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아호이다. 그 여울(灘)이 저 월(月)세계의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달빛 비추는 여울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저 멋지게 여겨진다. 작가라고 모두 다 작명에 능한 것은 아닐 것임에도 그는 작명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의 집 사랑채에는 조수루(釣水樓)라는 당호를 붙였다. 물의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물을 낚자는 것인데, 월탄과도 상통하는 당호(堂號)이다.
     
    세검정(서울 종로구  평창11길 80)에 있는 월탄의 집은 그가 죽기 6년 전 구입해 살던 곳이다. 사실 오고 싶어 온 것은 아니고 충신동 55-5번지의 옛집이 1975년 동대문~이화동 간 도로확장 공사 구간에 포함되며 어쩔 수 없이 이사하게 된 것인데, 오면서 충신동 집을 그대로 뜯어와 복원했다. 집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정원수도 가져왔다. 그럴 만한 것이, 그 집은 한말 어영대장 지낸 이봉의(李鳳儀) 아들 이기원(李起元)이 1935년에 지은 대지 150평, 건평 70평의 집으로, 전형적인 전통가옥 배치라 하여 옛 문화공부보에서 해외에 '한국의 집'(KOREA HOUSE)이 지을 때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갓집은 아니고 조선시대 중인 계급의 전형적인 집이라 할만한 곳인데, 1937년 월탄이 이 집을 구입하여 살았다. (원주인인 이기원의 아버지 이봉의는 대한제국시절 판돈녕사사·육군부장·헌병사령관을 지내으나 군대해산 후 변절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추종하였고, 한일병탄 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사후 그 아들 기원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평창동 집터는 월탄이 직접 발품을 팔아 찾은 곳으로 전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담장 밖에서 본 처마 날렵한 외관
    사랑채
    안채
    '조수루' / 원래 이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조수루에 모인 아들 가족 / 오른쪽이 박종화이고 왼쪽이 현진건의 외동딸이자 며느리인 현화수이다.
    '일편빙심(一片氷心)' 현판이 걸린 행랑채
    문 앞으로 보이는 풍경
    박종화의 집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 현재 손녀 내외가 거주한다.

     

    그렇다고 월탄이 그 집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그의 생가는 한성부 남부 반석방 자암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1가)에 있었다. 그곳에서 12년을 살았다. 이후 충신동 충신시장 부근으로 이사와 그곳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교)를 다녔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시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1920년 졸업 후 시 전문지 장미촌에 <오뇌의 청춘>과 <우유빛 거리>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는 시보다는 애국적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역사를 쓰는 글쟁이로 스스로를 탈바꿈시켰다.

     

    그는 1979년 <박종화대표작전집> 서문에서, 자신이 역사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나날이 쓰러져 가는 아름다운 이 조국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자는 슬프고 외롭던 의도 때문"이라고 했는데, 23세 때인 1923년에 발표한 <목 매이는 여자>는 우리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역사소설로 알려져 있다. 

     

     

    『백조』 창간호 / 박종화 현진건 나빈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등이 창간한 문예지이다.

     

    월탄은 1930년대부터 충신동 위의 집에 거주하며 역사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작업에 몰두하였는데, 연산군의 광란의 복수극을 다룬 '금삼의 피'를 첫 장편 역사소설로 탄생시켰다. 금삼(錦衫)은 '비단으로 만든 적삼'으로, 금삼의 피는 연산군의 어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으며 흘렸던 피를 말한다.

     

    소설은, 어릴 적부터 어미를 그리워하며 자란 연산군이 장성해 왕이 된 후 자신의 외할머니가 가져온 금삼의 피를 보고 눈이 돌아가 분노의 복수를 벌인다는 내용으로, 1936년 3월 20일부터 12월 29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3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이후 그는 <대춘부>, <여인천하>, <세종대왕>, <다정불심>, <양녕대군>, <임진왜란>, <여명>,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등을 계속적으로 발표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는데,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세종대왕>은 2,456회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라디오 연속극이나 TV 드라마, 영화화되며 인세 외의 수입을 거두기도 했으며 특히 <월탄 삼국지>가 큰 수입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는 <삼국지>하면 월탄의 것이나 일본작가 요시가와 에이지의 것, 둘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내 기억으로 월탄의 것은 <삼국지 연의>의 번역이 아니라 거의 창작에 가까워 특히 재미있었다. 그는 창작력 과잉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소설이라고 고증에만 매달린다면 단순한 역사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소설에는 문학의 향기가 있어야 하며 작가는 인간적 생명력을 넣어줄 의무가 있다."

     

     

    박종화(朴鍾和, 1901~1981)
    yes24에 나온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번개장터에 올라온 1966년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드라마 '왕의 여자' 역시 '자고 가는 저 구름아'가 원작이다. / '자고 가는 저 구름아'는 당쟁의 시대 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江娥)의 사랑을 그렸다.
    평창동 입구의 평창 터 표석
    평창 터 표석 / 조선시대 이곳에 평창이라는 군창이 있었다.
    평창동 입구의 느티나무
    부근의 산하 / 문자 그대로 산자수명하다.
    그 물이 세검정 정자 밑을 지나간다. / 작년 8월 물 많을 때 찍은 사진이다.

     

    세검정에는 또 춘원 이광수가 살던 집도 있다. 거주 시기가 효제동 집과 겹치므로 집이라기보다는 별장이라 부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안내문에도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라고 쓰여 있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40번지이다. 춘원에 대해서는 앞서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삶'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어, 여기서는 안내문의 내용만을 옮겨 싣기로 하겠다. 

     

    이 터는 소설가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별장을 지어 머물던 곳이다. 이광수는 이곳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는 1937년 독립운동 단체 수양동우회와 관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이곳에서 휴양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이광수는 세검정 일대의 풍경 좋은 이곳에 한옥 별장을 지었다. 

     

    원래의 가옥은 ㄷ자 형태의 개량한옥으로 당시 유명했던 건축업자 정세권이 지었다. 이광수가 쓴 <성조기>와 <육장기>에서 이 집을 짓고 팔기까지의 생활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으며, 우물과 향나무, 감나무만이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한옥은 1970년경 새로 지은 것이다.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한 한국 근대문학사의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이광수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이자 1930년대 조선인 재력가 및 문인들의 도성 밖 별장 건립 상황을 보여주는 예다. 

     

     

    이광수 별장 입구
    처마 선이 아름답다.
    지금은 이렇다.
    입구의 안내문
    위쪽의 '춘원'이란 이름의 다세대주택
    .'춘원' 현판
    아래쪽의 다세대주택
    이광수 별장에서 내려 보였을 홍지문
    홍지문 문루는 1921년에 퇴락하여 주저앉았고, 오간수문도 그해 장마에 떠내려간 후 1977년 복원되었으므로 이광수가 살던 시절에는 홍지문 석축만 있었을 것이다.
    세검정 사거리와 백악산은 그대로 였을 듯.
    당시에는 없었던 근방의 핫플레이스
    이 영화에서
    단꿈에서 깬 가족들이 비를 철철 맞으며 걸었던 곳이다.
    위에서 본 계단
    터널 위 / 비가 개인 하늘은 이렇듯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대체로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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