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불멸의 여신 모건티나의 비너스(혹은 페르세포나)
    미학(美學) 2024. 5. 6. 16:46

     
    모건티나(Morgantina)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가운데에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지이다. 모건티나 유적은 크게 두 곳으로 분류되는데, 이중 시타델라 지역은 BC 11세기부터 BC 450년경까지 존속했으며, 셀라 올란도 지역은 BC 450년부터 AD 50년경까지 존재했다. 
     
    모건티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BC 465?~400?)의 것이며, 로마의 역사가 테이투스 리비우스(BC 59?~17)가 남긴 '이 땅이 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페인 용병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졌다'는 기록이 주목받는다. 20세기 초 발굴조사 중 발견된 HISPANORUM이라고 각인된 동전 속 주인공이 그 용병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로마 정치가 키케로는 이 땅을 무르겐티니(Mugentini)라고 불렀다.
     
     

    모건티나 유적
    모건티나의 그리스 도시 유적 / 그리스의 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도시의 흔적이다.
    발굴된 고대 그리스인의 욕조
    HISPANORUM 코인

     
    이 모건티나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미국의 석유 재벌인 J. 폴 게티(1892~1976) 때문이라 해도 괜찮을 듯싶다. 그곳에서 유전이 발견됐기 때문이 아니라 모건티나에서 출토된 후 1988년 게티 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떤 미술품이 화제를 모으면서부터였는데, 그 미술품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이름 없이 '여신상(Statue of a female deity)'이라고만 불린다.
     
    참고로 말하자면, 게티 미술관은 폴 게티가 195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부촌 말리부 지역에 세운 미술관으로서, 1976년 죽은 게티의 유산을 기반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술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게티 미술관은 막대한 자금력을 무기로 세계 각지의 고대 유물을 수집하였던 바, 그 결과 지금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문화재를 유명 박물관 못지 않게 소장하게 되었다. 2010년까지 있던 '여신상'(이하 모건티나 여신상)도 그 중의 하나였다. 
     
     

    게티 미술관
    게티 미술관 전시품

     
    모건티나 그리스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기원전 5세기경의 이 여신상은 1988년 유럽의 미술품 큰손인 로빈 심스에 의해 시장에 나왔고, 게티는 여신상의 구입에 1800만 달러(약 200억 원)를 투척했다. 당시까지의 미술품 거래액으로서는 최고가였다. 게티가 그와 같은 거금을 쓴 것은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 우선 그 여인상을 감상하고 가자.
     
     

    높이 225cm의 이 여신상은 현재 이탈리아 아이도네 고고학박물관에 있으며, 아이도네 고고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면
    측면
    후면
    여신이 걸어가는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으로 내민 오른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여신상은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Scandalously beautiful) 자태를 자랑한다.

     
    강한 바람을 맞으며 의연히 걸어가고 있는 이 여신은 그로 인해 옷이 온몸에 감겼다. 또 그로 인해 육덕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까닭에 '스캔들러스한 아름다움(Scandalously beautiful)'이라는 표현으로도 불리는데, 바로 이것이 이 미술품의 가치일 것이다. 모건티나 여신상이 파르테논 엘긴 마블(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조각상)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는 이유도 그것이니, 바로 고대 그리스 조각의 특성인 사실성을 가감 없이 표현한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모건티나 여신상은 머리 부분의 관(冠)이 날아가 정체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헤라(쥬피터의 부인)나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추측되었다. 아프로디테는 그 유명세에 따라 붙여진 듯하고 헤라는 시칠리아의 주신(主神)처럼 받들어지기 때문인 듯한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풍요의 여인 페르세포네(Persephone)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 지는 모르겠고, 만일 페르세포네가 맞다면 그의 머리 형태는 아래와 비슷했을 것이다. 
     
     

    시칠리아 피스툼의 헤라 신전 /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페르세포네의 대리석상 / 국립 로마박물관
    위의 석상과 닮은 것도 같다.
    이탈리아 조각가 로렌초 베르니(1598-1680)의 작품 '페르세포네의 납치' / 페르세포네에 반한 명계(冥界)의 신 하데스가 불문곡직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고 있다.

     
    혹자는 강한 바람에 감긴 모건티나 여신상의 몸매에 대한 묘사를 평가절하할런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질 화강암과 달리 연질의 대리석으로 이 정도의 묘사를 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로써. 딴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딱딱한 화강석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돌인 대리석에 옷감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니, 아래의 두 작품은 대표적인 예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승리의 여신 니케 신상 / 1863년 그리스 사모드라케 섬에서 발견됐으나 그리스 유물이 아닌 기원전 190년경의 로마 유물이다.
    영어 나이키로 익숙한 니케는 아테나 여신의 다른 말로서, 이 여신상의 머리와 팔은 끝내 찾지 못했다.
    1994년,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에서 건져낸 이시스(혹은 오리시스) 신상의 시스루 의상은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그러나 모건티나 여신상의 몸체는 우리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대리석이 아닌 화강석이다. 모건티나 여신상은 화강암 몸체에 대리석 머리와 팔을 이어 붙인 이른바 아크롤리스(acrolith) 양식으로, 각 부분은 따로 조각해 합체되었다. 그리고 이 여신상은 출토된 후 오랫동안 각 부분이 따로 따로 '고아(孤兒, orphan)'로 떠돌았다. '고아'는 출토지와 소장자, 소장 경위 등이 적힌 정당한 서류를 갖추지 못한 문화재를 이르는 미술품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은어 같은 말이다.
     
    또 이 여신상은 훗날 정밀 조사 과정에서 가슴께를 중심으로 3분할되었으며, 그것도 최근에 절단된 것으로 밝혀졌다. 더불어 옷 주름 사이에서 절단 과정에서 발생한 돌가루들이 끼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이 조각품이 약탈꾼들에 의해 탈취된 뒤 절단되어 운반되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인데, 실제로 한 이탈리아 신문은 이 여신상의 몸통이 발견된 후 은밀히 고산지대로 옮겨져 세 조각으로 쪼개졌으며, 이후 홍당무 운반 트럭으로 위장된 채 나라 밖으로 밀반출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머리 부분은 1976년에 최종 발견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미술품은 이탈리아와 스위스 접경지대에 거주하는 스위스 미술품 수집가 렌조 카나베시에게 헐값에 팔렸고, 카나베시는 이를 다시 영국 딜러 로빈 심스에 40만 달러에 팔았다. 이것을 심스가 게티 미술관에 200만 달러에 팔아넘겼던 것이었다. 그전에 게티 미술관의 일부 관계자 '고아'인 이 여신상을 구입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으나 미술관 측은 무엇에 홀린 듯 여신상을 구매했다. 그만큼 욕심나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후 모건티나 여신상은 게티 미술관의 명당에 자리 잡으며 게티의 대표 미술품이 되었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이탈리아 당국의 과학적 증거와 합리적인 사유가 포함된 끈질긴 반환요구에 결국 시칠리아 섬 작은 촌락의 소박한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때는 2006년 년 11월이었고, 장소는 아이도네 고고학박물관이었으며, 게티 미술관이 요구한 이탈리아 정부와의 공동 소유안(案)이 무시된 불가역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그만큼 증거가 명확했다는 얘기일 터인데, 다만 게티 미술관의 사정을 고려해 게티가 이 여신상을 2010년 말까지 전시하도록 허용했다.
     
     

    게티 미술관 시절의 모건티나 여신상 (왼쪽 끝) / 오른쪽은 게티 미술관의 큐레이터 매리언 트루이며, 그는 본래 여신상 구매에 반대했던 사람이나 구입 이후로는 이탈리아로의 반환을 거부하고 나섰다.
    2011년 모건티나 여신상이 이탈리아 아이도네 고고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재조립되고 있다.
    어떤 놈이 또 훔쳐갈까, 경비 보안 철저
    시칠리아 엔나주(州)의 아이도네 고고학박물관
    아이도네 박물관 특수
    주변 상인들

     
    시칠리와 엔나주(州)의 주민들은 당연히 반환을 크게 반겼다. 그리고 그 덕분에 1년 방문객이 1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아이도네 박물관은 방문객 숫자가 10배 늘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은 약 400만명으로 세계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아울러  이 여신을 활용해 각종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마을 주민들도 활황을 맞았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 이제는 여신상 파는 것을 방해할 사람도 없을 터이다.
     

    마지막 얘기는 신약성서 사도 행전에 나오는 내용을 사족처럼 붙였다. 바울은 과거 튀르키예 에페수스에 머물 때(AD 52~54) 우상숭배를 반대하였다. 이에 에페수스 아르테미스 신전 앞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의 공분을 샀던 바, 그들 분노한 상인들 의해 원형극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화강암을 떡주무르 듯했던 우리 조상들의 솜씨에 더욱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아래 모습은 석굴암에 가더라도, 그리고 그곳에서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볼 수가 없다. 1971년 설치된 유리 가림막 때문이다. 
     
     

    석굴암의 제석천과 범천
    석굴암의 11면 관음보살상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