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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세력에 의해 멸망한 김포 분고국과 운양동 유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21. 21:31

     
    경기도 김포시 운양동은 옛 운양포(雲陽浦)가 있어 불려진 마을 운양리에서 유래되었다. 운양포는 조선시대 김포와 서울 마포를 잇는 포구로, '운양 나루의 가을 물결'(雲陽浦秋波)은 '김포 10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하지만 근대 들어 물동량이 줄며 포구는 사라졌고 지금은 그 자리에 김포한강 야생조류 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근방으로는 한강신도시 아파트단지와 한옥마을, 김포아트빌리지 등이 들어섰다. 
     
     

    '운양 나루의 가을 물결' / 김포시청 제공사진
    김포한강 야생조류 생태공원 안내문

     
    2012년 4월 그 운양동 택지 공사 중에 고조선 시대의 유물인 '한국식 동검'이 낙랑식 토기와 함께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한강 하류에 인접한 모담산(해발 73m) 구릉에서 출토되었는데, 일대에서는 이보다 앞선 2009년,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원삼국 시대 분묘 30여 기 발굴조사돼 일찍부터 사람들이 주거해 온 유서 깊은 땅임이 밝혀진 바 있다. 
     
                          

    발굴 직후의 세형동검
    복원된 낙랑식 토기와 세형동검


    운양동에서 나온 '한국식 동검'은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4세기경 세형동검(細形銅劍, 가늘고 뾰죽한 청동검)으로 진화한 것으로서, 이것을 '한국식 동검'이라 부르는 이유는 대부분이 한반도 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형동검은 한반도에 살던 고대인들의 주력무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2009년 김포 양촌에서는 철기시대 무기인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 철창 · 철촉(쇠 화살촉) 등의 무기와 도끼 · 낫 등의 철제농기류가 대량 출토되기도 했다.
     
     

    김포 양촌·운양동 유적 /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된 복합유적지이다.
    양촌 5호묘와 운양동 12호묘가 재현된 운양동 유적전시관
    김포 양촌·운양동 유적 안내문
    양촌·운양동 유적 도해
    많은 유물이 나온 양촌 5호 분구묘
    양촌 5호 분구묘 출토유물
    운양동 유적전시관 땅 속에 재현된 양촌 5호 분구묘 목곽 내의 환두대도와 토기
    운양동 12호 분구묘
    운양동 12호묘에서 나온 철제무기와 장신구
    운양동 유적전시관 땅 속에 재현된 운양동 12호묘의 철제무기와 장신구

     
    뿐만 아니라 운양동 유적에서는 투명한 수정 · 붉은색 마노 · 푸른색 유리로 이루어진 구슬 장신구가 1000점 이상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1호 주구묘(周溝墓, 주변에 도랑을 두른 묘) 구슬 무더기 속에서 발견된 정체 모를 금제품이었다. 쌍으로 이루어진  길이 2.8㎝의 이 금붙이의 용도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마한 사람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좋아한다'는 역사적 기록과 상충하는 유물이었다.
     

     

    운양동 주구묘와 발견된 금붙이
    국립중앙박물관 선사실의 세형동검과 투창
    국립중앙박물관 부여실의 금귀걸이 / 운양동 출토 유물을 전시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진 귀한 몸이 되었지만 처음 이 금붙이는 수수께끼 애물단지였다. 손톱처럼 생긴 까닭에 손톱을 감싸는 장신구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달 후, 또 다른 무덤에서 같은 모양의 금 귀걸이 1짝이 추가로 발굴되며 고민을 가중시켰는데, 다행히도 그 무렵 이 금제품이 중국 길림성 송화강 유역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싱크로율 100%의 유물이 길림성 박물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물의 용도는 귀걸이로 결론났으며, 더불어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금 장신구가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중부지역 여러 곳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사실과 맞물려 이곳 운양동 무덤군이 '3세기경 만들어진 마한 유력자들의 무덤이고 금 귀걸이는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섣부른 결론이다. 3세기 한반도 중부지역 사람이 송화강이 위치한 만주 내륙과 교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상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교통이 발달한 21세기 현재에도 쉽지 않다. 게다가 교류, 혹은 교역을 하면서 마한에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금은 왜 가지고 왔을까? 위에서 말한 역사적 기록은 3세기 진수가 지은 <삼국지/위지/한전(韓傳)>으로, 마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인(韓人)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게다가 당시의 금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매우 비싼 물건이었으니, 중국 고대 전국시대의 상황을 그린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진나라가 뇌물로 뿌린 황금으로 인해 나머지 6국의 합종책이 와해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비싼 황금을 쓸데없이 왜 가져왔냐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김포평야에는 백제 이전, 부여에서 철기와 금(金) 문화를 가지고 이주해 온 무리가 세운 한민족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본래 이곳 김포에 살던 청동기 문명의 원주민들을 융합하거나 복속시키거나 하며 고대국가를 이루었다. 그 나라가 바로 <삼국지/위지/한전>에 등장하는 분고국(濆沽國)으로서,  운양동은 그 분고국의 치소(治所), 즉 수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적전시관 안내문 / 김포지역의 평평한 산지와 평야, 해안 지역은 식량 획득 및 거주 환경에 적합해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이 남긴 분묘 유적 중 보존 가치가 높은 원삼국시대의 분구묘 2기를 실물 크기로 복제 전시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운양동 유적전시관과 주변 풍경

     
    그 나라는 서기 246년 에 일어났던 기리영 전투(崎離營 戰鬪)의 주체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기리영 전투는 <삼국지/위지/한전>에 기록돼 있는 고대의 큰 전투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종사 오림(吳林)이 본래 한국(韓國) 땅의 일부를 낙랑이  통치했다는 이유를 들어 진한(辰韓) 8개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귀속시키려 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잘못 설명하는 부분이 생겼고, 이에 신지(臣智)가 격노하고 한(韓)나라가 분개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대방·낙랑 연합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삼국지>에 막연히 '한'이라 지칭된 나라는 신분고국(臣濆沽國), 혹은 신분활국(臣濆活國)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남송의 역사서 <통지(通志)> 소흥본(紹興本)에서는 <삼국지>보다 오래된 사서를 인용해 국명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기리영 전투에 참전했던 낙랑태수 유무(劉茂)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도 나오니,
     
    가을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秋八月, 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大守劉茂·朔 方大守王遵, 伐髙句麗, 王乗虛, 遣左將真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 244~245년이고, 당시의 백제왕은 고이왕이다. 즉 고이왕 13년(246년), 백제는 위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이용해 낙랑의 변방을 공격, 그곳 백성들을 잡아왔다가 이 사실을 안 유무가 격노했다는 말을 듣고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잡아온 사람들을 되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김포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3세기 중엽까지 신분고국(臣濆沽國), 혹은 신분활국(臣濆活國)이 존재했음을 알수 있는데, 이것이 앞에서 전제한 분고국이다. (沽와 活은 글자가 비슷하니 필시 같은 나라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臣)은 신하국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붙인 것일 터, 임의로 탈락시켰다.  
     
    ※ 앞서 '소가야' 언급 때도 지적했지만 국명 앞에 '소'나 '신' 같은 단어를 붙일 나라는 없다. 따라서 위의 나라는 분고국(濆沽國), 혹은 분활국(濆活國)이었을 텐데, 어감이 나쁜 분활국은 버리고 분고국을 택함이 좋을 듯하다. 또 <삼국지/위지/한전>에서는 한(韓)의 북방에 있던 여러 소국(小國)을 업신여겨,
     
    그 나라 북방(北方) 대방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는 그런대로 약간의 예절과 풍속이 있기는 하지만, 대방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취락과 같다(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고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바, 
     
    <통지(通志)>에 나오는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은 '한나라 왕이 격노하고 한의 백성이 분개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에 놀란 태방태수 궁준은 강국인 낙랑태수 유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두 나라가 연합하여 역공을 가한 것인데, 분고국과 대방·낙랑 연합군의 전쟁은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할 정도로 매우 격렬했으나 힘이 딸렸던 분고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 분고국의 흔적이 수도가 있던 김포 운양동에 유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유물로서 남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선사실 낙랑실 원삼국실이 모두 폐쇄돼 있어 사진을 찍어올 수 없었다. 2월 15일 재개관을 한다고 하니 그때 사진을 보충해 올리도록 하겠다.  


     

    일찍이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언급된 기리영 전투와 분고국
    운양동 유적지 발굴 장면
    유적지 부근의 김포 아트빌리지 / 근방에서는 고인돌도 다수 발견됐다.
    근방의 계양천과 감암교 / 계양천을 통해 한강과 바로 연결된다.
    한강과 일산대교
    철조망이 가로 막은 한강
    한반도는 아직 전쟁 중

     
    그에 앞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244년 1차 칩입, 245년 2차 침입) 고구려는 서안평에서의 승리에 취해 방심하였다가 위나라 2만 대군에 수도를 함락당한다. 이에 동천왕은 동쪽 옥저국(沃沮國)으로 도망쳐 겨우 살아 남았지만 위나라 군사는 동옥저 주민 3천명을 죽이는 대살육을 벌였다.

     

    그러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 또한 고구려의 속국이던 예(濊, 동예)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들 연합군의 공격에 본래 중국을 추종하던 불내예후(不耐濊侯, 예국 불내현 제후) 등은 싸울 의지를 1도 보임 없이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의해 회복된 옥저와 동예는 다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서기 245년의 일이다. 

     

    중국과 한민족과의 불편한 역사는 이렇듯 장구하다. 그리고 중국이 패권국가를 추구하는 지금 다시 과거의 불편한 역사가 재현되려 하는데, 대한민국의 어떤 정치가는 제 영향력을 늘일 생각에 싸울 의지는 1도 없이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하려 하고 있는 바, 미구에 닥쳐올 환란이 그저 끔찍하게 여겨질 뿐이다. 너는 좋겠지만 국민들은 뭐가 되느냐 이 말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빈번히 벌어졌으니, 이미 서기 30년 왕준이 낙랑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을 세웠을 때 왕굉과 양읍이 배신하여 왕준을 죽이고 원상복귀하여 다시 한군현에 복속된 일,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예식진이 배신한 일, 667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연남생이 배신한 일,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에 조위와 탁청이 만주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골에 들어 바치며 항복한 일 등, 있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다음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낙랑국 왕굉과 양읍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의자왕을 붙잡아 항복한 예식진의 묘비명
    당나라군을 안내하고 평양성 문을 열어준 연남생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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