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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에 관한 단상 - 조계생 · 극관 · 수량의 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 23. 23:32
돌아다니다 보면 소위 명당이라 하는 묏자리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과문해서 그런지 그 조건이 되는 배산임수 따위를 꿰맞추려 해도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다. 벼슬이 없음에도 벼슬 관(官) 자를 붙여 이른바 지관(地官) 소리를 들는 유명 풍수쟁이가 고른 땅이라고 해도 아귀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일례로 과거 유명세를 누렸던 육관도사 손석우의 경우, 그가 스스로 자리를 잡아 묻힌 충남 가야산 무덤은 다른 풍수쟁이로부터는 형편없는 자리로 간주됐다.
여담을 말하자면, 손석우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외 전직 대통령 일가의 묏자리를 잡아주었다 해서 유명해진 지관이다. 육관도사라는 별호를 쓰며 흰 수염 성성하던 그는 그 외모부터 뭔가 있을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줄곧 견지했는데, 첫째는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간행된 <터: 육관도사의 풍수 명당 이야기>라는 책의 허무맹랑한 내용과 MBC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으로부터 얻은 판단 때문이다.
속편까지 제작된 것으로 기억되는 MBC PD수첩에서 손석우는 본인이 주장하는 풍수설에 수많은 허위·위조가 포함돼 있는 점, 풍수를 구실로 13억의 토지를 3억5천만 원으로 사기 갈취한 혐의가 있는 점, 비슷한 식의 피해자가 많이 있다는 점 등을 지적받았다. 당시 손씨는 여러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많은 혐의를 안은 채 1998년 사망했다.
여담을 잇자면 그는 살아생전,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 측이 비밀리에 접촉해 1백만달러를 제시하며 묏자리를 부탁했다고 주장했고, 히로히토, 장개석, 등소평의 유택도 자신이 잡아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거짓이니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에 방부처리 미라의 형태로 영구 보존된 김일성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히로히토, 장개석, 등소평 등의 무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히로히토와 등소평은 전통 장법과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고, 장개석은 유언으로 본토 매장을 원했기에 아직 그 유해가 보존 중이다. 그가 레전드 사기꾼으로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다. 손석우 본인이 묻힌 가야산 유택의 경우는 아예 불법적이니, 예산군은 비록 사유지라 해도 도립공원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법령을 들어 후손에게 이장을 명령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이에 불응하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 내가 들은 마지막 소식이다.
천하 명당이라는 가야산 남연군 묘 / 이 때문인지 손석우도 이곳과 가까운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도립공원 내에 묘를 썼다. 내가 다녀 본 곳 중에서는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에 묘를 썼음에도 후손이 멸절당한 경우도 있었다. 후손이 발복(發福)한다는 명당의 조건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시흥시 조남면 장군재에 위치한 계곡(鷄谷) 장유(張維, 1588~1638)의 무덤이 그러하다. 더 나아가 명당이라는 소문에 기존의 묘택을 강제로 빼앗아 썼지만 오히려 패가망신을 당한 경우도 있으니 조선의 26대 임금이 묻힌 홍릉이 바로 그러하다.
시흥시 조남면 장군재의 장유 무덤 / 시흥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장유 묘를 제외하고 덕수 장씨 무덤은 모두 사라졌다. 직계가 이어지지 않은 탓이다. 장유 신도비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유릉 자리는 본시 국초(國初)의 문신 조말생(趙末生, 1730~1447)의 묘가 있던 곳이었다. 조말생의 묘는 거의 500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고종의 능인 홍릉이 조성되면서 지금의 남양주시 수석동 산2-2로 이장되었다. 금곡 조말생 묘가 명당이라 하여 빼앗긴 것인데, 그 묘역에는 고종과 명성왕후의 합장릉인 홍릉, 순종과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의 합장릉인 유릉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씨 집안은 흥왕하고 발복하기는커녕 오히려 2대 만에 후사가 끊겼고, 더불어 518년이라는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장수 왕조를 이어가던 이씨왕가도 멸절되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없어짐과 더불어 멸손(滅孫)으로 인해 왕조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태손 영친왕으로 순종의 대를 이었던 영친왕계마저 2대 만에 멸손되었다. 망해도 철저히 망한 것이었다.
홍릉 유릉 영친왕이 묻힌 영원 이씨왕조 마지막 황제의 능비 남양주 석실마을로 옮겨진 조말생 묘 / 정경부인 평산 신씨와의 합장묘이다. 조말생 묘에서 보이는 한강 / ㅎㅎ 여기가 진짜 명당 같다. 조말생 신도비 애꿎은 후손들의 묘까지 무질서하게 이장되었다. 명당의 효력이 이씨왕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희안한 일은 고종이 무덤을 쓴 조말생의 금곡 무덤 자리는 이미 명당이 아닌 땅으로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조말생의 아들 조정서와 조번, 손자 조계동, 조귀동은 김종서 일파로 몰려 죽고 후손들도 거의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바, 조말생의 유택은 적어도 명당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조말생의 형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조계생의 무덤도 명당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터, 그의 아들 조극관 역시 1453년(단종 1)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그 또한 계유정난 때 동생 조수량과 함께 척살됐다. 조극관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함길도관찰사,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안평대군의 사람으로 분류돼 한명회의 <생살부>에도 이름이 올랐다. 그는 1453년 음력 10월 10일 밤, 어명을 받고 입궐하였다가 경복궁 건춘문에서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참살당했다.
<생살부>에 조극관의 이름이 적히는 드라마 속 장면 /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왕명을 빙자해 권신들을 입궐시킨 후 <생살부> 속 인물은 살해했다. 의정부시 낙양동 산124의 조계생 묘 / 묘표, 상석, 동자석, 계체석, 장명 등이 모두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옛 석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무덤 봉분은 지름 10m에 이를 정도로 장대하다. 조극관의 묘 / 조계생 묘 바로 아래에 있다. 묘표, 상석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가 근래에 장명등과 함께 세워졌다. 동생 조수량은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살해되었는데, 한양에 있을 때는 형 조극관과 함께 안국방(安國坊) 홍현(紅峴) 아래에 살았다. 계유정난 당시 부근에 살던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허후, 이우직 등의 문무대신이 한명회가 보낸 자객에 살해되며 재동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앞서 한 바 있다.
당시 살해된 자들이 흘린 피와 피비린내를 덮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재(灰)를 가지고 나와 뿌렸다는 데서 유래된 동명(洞名)인 잿골, 즉 재동이 갑오개혁 이후 재동(齋洞)이라는 한자명으로 등록된 것이다. 재동에 있는 헌법재판소의 사진을 다시 싣지 않을 수 없겠다. 그 피비린내 나는 정치 싸움은 오늘날도 계속된다.
조극관 묘 아래의 조수량 묘 / 장명등의 지붕돌, 상석, 묘표 등은 근래에 새로 만들었지만, 봉분의 8각 호석은 당시의 것이다. 주변에 쓰러진 문인석을 조수량의 무덤 곁에 세웠는데, 슬림한 스타일로 보아 일단 조선초의 것임은 맞는 듯하다. 조극관 묘에서 본 조수량 묘 조극관 묘에서 본 도봉산 주변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도 있고, 반대로 묘표만 남았거나 문석인만 서 있는 곳도 있다. / 양주조씨 가문에 몰아닥친 풍운을 말해주는 듯. 묘원 아래의 양주조씨 사당 충모재 근방의 부용천 ▼ 2025년 1월 21일 윤 대통령 탄핵심판 첫 출석일 헌법재판소 풍경
차벽이 둘러처진 헌법재판소 앞 변론이 끝난 후의 어수선한 헌재 앞 분위기 / 생각보다 평온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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