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의 말과 글은 귀와 눈을 청징하게 해 준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지는 무척 오래됐다. 그래서 일찍이 그가 언급한 선비들의 삶을 흉내 내고자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라는 책을 구입해 읽었다. 하지만 태생이 천격(賤格)이어서 인지 흉내 내지 못할 거리가 느껴졌고 혹간 공감을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무튼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아주 흉내낼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니 공통분모도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유람' 같은 부분으로, 그에 관한 글귀들은 속속 들어와 박힌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하는 것과 같다.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실은 충분히 익히고 또 익히는 데 핵심이 있다. 굽이굽이 환하게 파악하고, 그 자태를 또렷하게 간직하고, 그 정신과 통해야만 비로소 터득하는 것이 있다. 서둘러 대충 섭렵하고서야 무슨 수로 오묘한 경지를 얻을 수 있으랴? (어유봉의 <동유기·東遊記>)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 깊이는 각자의 국량에 따라 정해지는데, 그 아취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얻는 것은 고작 산의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산수를 보는 것은 미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경험이 많은 자라 해도 이름만 듣고 얼굴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약한 마음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이하곤의 글)
일화로서 소개한 김진상(사계 김장생의 현손), 박종, 서명웅 등의 일화는 실로 놀랍다. 김진상의 백두산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닌 부침을 거듭하던 벼슬길에 환멸을 느끼고 떠난 길이었는데, 백두산 등정이 무려 네 번씩이나 되었으니 인생의 부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산행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끊고자 하는 마음이자 세상과 단속(斷俗)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겠는데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함경도 선비 박종은 1764년 18일 간 동북의 명산인 백두산과 칠보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 <백두산 유록>을 남겼으며, 서명웅은 1766년 갑산으로 유배가게 되자 이를 기화로 백두산에 올랐다. 그 역시 <유(遊)백두기>라는 기행문을 넘겼는데, 거기에 그는 가족인 듯 여겨지는 검은 곰 세 마리가 천지의 물을 마시러 가파른 절벽을 내려가는 진풍경을 그렸고, 평소의 취미인 천문관측 지식을 동원해 관측기구인 상한의(象限儀)를 제작, 백두산 임어수, 연지봉, 천수 세 지역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후 마침내 인생 버킷리스트를 완성시켰노라 만족해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옛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할 때 늘 여러 가지 일을 겸해서 했다오. 우리들이 만약 한갓 산이나 보고 물이나 즐긴다면 천박한 일이오. 국경의 지세를 측량하는 것도 좋고,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는 것도 좋겠소.
칠보산전도 / 1664년 한시각(韓時覺)이 그린 그림이다.
병조정랑을 지낸 신광하는 1784년 조카의 경성(鏡城)판관 부임을 기화로 백두산행의 절호의 찬스를 만들었다. 그는 백두산 천지를 목도한 후 자신의 호를 대택(大澤, 백두산 천지의 옛말)으로 바꿀 만큼 감명을 받았던 바, <백두록>이란 한시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천하만사가 까마득히 저절로 잊혔다. 세상의 이른바, 부귀, 빈천, 사생(死生)과 애환이 하나도 내 가슴에 들어오지 않았고, 제왕과 영웅호걸의 업적이란 것도 그저 미미하게 여겨졌다.
안대회 저 <선비답게 산다는 것>차제에 소개하는 당대의 또 다른 천문관측기구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 / 실학박물관실학자 유금(柳琴, 1741~1788)이 서구에서 사용되던 평면구형 아스트롤라베(astrolabe)를 응용해 만든 서양식 천문 관측기구다.실학박물관 설명문 일부
안대회 교수가 또 다른 책에서 소개한 심대윤(沈大, 1806~1872)이란 학자의 일화는 더욱 울림이 있다. 심대윤은 조선 순조 때의 사람으로 백여 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큰 학자로서 고조부가 영의정을 지내고 증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가 쓴 글 중에서 안대회는 특별히 '소반을 만들며(治木槃記)'라는 글을 소개했다. 취미 수준의 것이 아니라 돈을 벌고자 형제 셋이 소반을 만들어 판 이야기를 쓴 것이다.
경기도 안성의 가곡(佳谷)이란 곳에 살 때 흉년이 들어 생활이 곤란해졌다. 마침 마을에 경상도 통영의 장인이 찾아들어 소반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고 곁눈질로 기술을 배워 아우 둘과 함께 소반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독서만 하며 굶는 것보다는 힘이 드는 일을 하여 생계를 꾸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중에는 형제 셋이 읍내로 나가 아예 공방을 차려서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첫째 아우가 솜씨가 가장 좋았고, 막내 아우가 그다음이며, 자신은 솜씨가 좋지 않아 잔일을 했다.
소반 하나에 육십, 칠십 전을 받아 하루에 백 전(錢)의 이문을 남겼다. "근력이 들어 힘들기는 하지만 마음은 한가로워 아무 일이 없었기에"소반을 만들어 파는 여가에 형제들과 그동안 추구하던 학문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어찌하여 마음이 편하였던가? 당시 소반을 만드는 일은 비천한 장인이나 하는 일로 간주되었기에 그처럼 명문가 후손이 가난하다 하여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심대윤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하고도 현명한 일이라서 더럽고 욕되다 할 수 없다"라며 이렇게 썼다.
"나는 평생 신경을 쓰고 힘을 들여서 조금이라도 물건을 만들어 낸 노력이 없는 데도 40년 동안 뱃속에 곡식을 넣었고 몸뚱어리에 옷가지를 걸쳐 왔다. 늘 언짢고 부끄러워하며 천지 사이의 한 도둑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두 아우를 따라 이 일을 하니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고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일은 크고 작기를 가릴 것 없이 스스로 갖은 힘을 다해 그 노력으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을 쓰게 된 그의 내면이 참으로 크게 성숙한 결과라는 것을 느꼈다. 세인이 천히 여기는 일을 양반이 하는 데 대한 핑계의 글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 40에 비로소 하는 일 없이 밥 먹고 옷을 입는 도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기쁨을 표시한 글임을 알게 되었다. 현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이 글은 노동의 즐거움을 알게 된 어느 사대부의 고백을 피력하고 있었다. 심대윤의 선배 서유구는 이렇게 비꼰 적이 있다.
"우리 동방의 사대부는 10대조 이상에서 벼슬한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도 손에 쟁기와 따비를 잡지 않는다. 한갓 문벌만을 빙자하여 공업과 상업에 대해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메뚜기처럼 곡식을 축내는 생활을 하며 꾀가 참 좋다고 우쭐댄다." 심대윤의 행동과 사고가 얼마나 파격적인가를 서유구의 생각을 읽으면 짐작된다.
전통 소반
반면 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정약용의 문제들>이란 책에서는 주문이 보다 까다롭다. 정약용이 제 아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는 닭을 키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책 읽는 사람의 양계'(讀書者之養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닭을 기른다고 들었다. 양계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양계 중에서도 고상함과 속됨, 맑음과 흐림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농서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택해 시험해 보아라. 때로 색의 종류별로 나누어 길러보기도 하고 때로 그 홰(닭이 올라 앉도록 한 나무막대)를 다르게 해보기도 해 닭이 살찌고 알 낳는 빈도가 다른 집보다 낫도록 해라. 또 때로는 시를 짓고 닭의 정경을 그려봄으로써 '사물로써 사물을 풀도록'(以物遣物) 해라. 이것이 책 읽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상은 1818년(순조 18) 5월, 18년간의 긴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들 학연에게 쓴 편지 글의 내용이다. 그는 남양주 마재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36년 별세할 때까지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알려진 그대로 정약용이 유배를 간 것은 정치적 이유가 아닌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1800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소나기는 피해 가자는 심정으로 고향 마재로 귀향해 자택인 여유당(與猶堂)에 칩거했으나, 마지막 보호막이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의 집 '여유당'은 흔히 연상되는 '여유스러움'과 달리 '지독한 경계(警戒)'를 의미한다. 당호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겨울철에 시냇물을 건너듯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한다(猶兮若畏四隣)"는 문장에서 빌려왔다. "겨울에 개울을 건너는 것처럼 조심하고 이웃 사람들의 시선을 경계하자"는 계고의 의미를 스스로 다짐한 것이었다. 정조임금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진 지금, 그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음이었다.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하라.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사람은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치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아니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자는 엿보고 관찰하는 시선이 몸에 따갑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에도 하지 않는다. <여유당기> 中
마재 입구의 꽁꽁 언 강물마재에 있는 정약용의 집 여유당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집>
정약용은 실제로 생계를 영위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또한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양반의 노동을 몸소 실천했는데,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실용성을 강조했다.
농사짓는 것은 선비가 하기 힘든 일이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은 지극히 졸렬한 일이며, 고리대금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다. 따라서 선비가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로는 원포(園圃, 과수원과 채소밭)나 목축이 마땅할 것이다. 농사가 힘든 것은 전역(田役, 토지세)이 날로 무거워져 벼슬이 없는 선비가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든 까닭이니 반드시 약초, 과일, 채소를 택해 경작하도록 하라.
또 다른 편지에서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 식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당시는 돼지를 다량으로 키우는 양돈은 개념조차 없었고,(양돈은 의외로 역사로 짧아1954년 제주도 한림읍에 부임해 온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로부터 시작됐다) 소는 농사용으로써, 잡아먹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마음대로 도살하면 사형!) 이에 정약용은 구하기 쉬운 개고기를 권장한 것으로서, 개 잡는 법, 삶아 요리하는 법까지 자세히 썼다. 지금은 금지되었지만, 우리나라 개 식용의 전통에는 이렇듯 눈물 나는 구석이 존재했다.
정약용의 편지 글정학연(정약용의아들)의 시문집 <열수시첩>정약용의 <경세유표> / 실학박물관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 J. Mcglinchey) 신부 / 맥그린치 신부는 전쟁 후의 참혹한 제주도민의 삶을 보고 고국의 가족과 친지, 교회, 독일 천주교 주교단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그들이 보내준 돈으로 우선 땅과 돼지를 사서 길렀다. 출처: 팜인사이트정약용 동네 입구의 너와지붕 카페 다인(茶人) / 내부까지 너와집 형태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들어가보고 싶었다.하지만 설 연휴로 인한 휴업인지 혹은 폐업했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에 다시 들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