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원경'의 방영에 즈음해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13에 있는 태종의 후궁 신빈(信嬪) 신씨(辛氏)와 그의 묘소를 소개한 적이 있다. 말한 대로 조성에 정성이 느껴지는 무덤인지라 사랑을 많이 받았던 후궁의 냄새가 물씬 난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태종과의 사이에서 함녕군 이인(李裀)을 비롯해 모두 3남7녀를 보았는데, 오늘 말하려는 사람은 둘째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과 온녕군의 손자 무풍군(茂豊君) 이총이다.
신빈 신씨의 묘묘소 입구의 묘비
1407년 태종의 7남으로 태어나 이정(李䄇, 1407~1454)은 호방하고 무예에 뛰어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활솜씨가 출중하였던 바, 세종 8년(1426) 서교(西郊, 도성의 서쪽 지역)에서 임금(세종)과 함께 매사냥을 하던 중 날아가는 꿩을 쏘아 맞혀 세종으로부터 말을 하사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호방함이 지나쳐 이복형제들 간의 싸움이 잦았고, 왕자들 중 종학(宗學, 왕족 학교) 결석일이 가장 많은 말썽꾸러기이기도 했다.
종학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은 세종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이에 세종 16년 온녕군에게 하사되었던 구사(丘史, 종친·공신·당상관 등에게 배당되어 이들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무리)를 모두 거두어들이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부인은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아랫 동생 근녕군(謹寧君)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1453년(단종 1)에 별세했을 때 단종이 특별히 석곽(石廓)을 내렸던 바, 개인적 친밀감을 엿볼 수 있다.
온녕군 석곽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
그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다가 1914년 이후 서울 권역으로 들어와 성북구 미아동 3거리 서쪽 언덕 공동묘지를 지켰으나, 도시 확장으로 1962년 경기도 고양시로 이장했다. 이장 당시 석관이 개봉되며 조선시대 왕자 묘의 부장품에 대한 세속적 이목이 쏠렸는데, 의외로 부장품이 조촐해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구리 수저 한 벌, 분청사기 항아리 둘, 접시 두 개가 출토됐다) 이때 목관을 둘러쌓던 보호용 석곽은 경복궁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미아리에 있을 때의 온녕군 묘온녕군 석곽
온녕군은 후사가 없었으나 계자로 들어간 우산군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 사이에서 6남을 둠으로써 가지가 튼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산군과 그의 여섯 아들은 정쟁(政爭)의 희생자가 되어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특히 차남 무풍군(茂豊君) 총(摠)은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루는 문필가요 예술가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사림파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써 귀양을 갔다.
부형 역시 무사하지 못했으니 아버지 우산군과 형 용성군도 귀양을 갔다. 아우인 한산군 · 화원군 · 금천군 · 청양군 역시 차례로 유배형에 처해지고 일가와 더불어 종친부 종적(宗籍)에서 삭제되었다. 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6년 후인 1504년 갑자사화 때 함경도에 유배 중이던 무풍군은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당한 뒤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곧 교수형을 당했는데, 시신은 재차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우산군과 부인 문화류씨 묘 / 고양시 대자동용성군과 부인 평산신씨 합장묘 / 고양시 대자동용성군 묘의 의외로 큰 문인석 (약 250cm)
능지(陵遲)는 천천히 오르는 낮은 언덕을 뜻하는데, 능지처참형은 그렇게 천천히 죽이는 형벌이다. 이왕 죽일 사람이라면 빨리 고통 없이 보내는 게 그나마의 관용일 터였다. 그런데 능지처참은 그 반대로 죄인의 살을 조금씩 도려내 최대한의 고통을 주며 죽이는 최고 형벌이었다.
능지처참형은 중국에서는 청나라 말까지 시행된 악법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방법을 달리했으니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능치처사라 했다. (대표적으로 허균이 그렇게 죽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을 말함이며, 죄명은 역모였다)
무풍군 이총의 시신은 그렇게 사지가 찢겼고 목은 종로 네거리에 효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연산군은 나머지 시신의 뼈를 부순 후 가루를 강 건너로 멀리 날려버리라고 명령했다. 뿐만 아니라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아버지 우산군과 나머지 형제들에게마저 사형을 내렸던 바, 각지에 흩어져 귀양살이를 하던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들의 죄는 연산군의 폭정에 뇌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을 절의(節義)의 7공자(公子)라 불렀는데, 다행히 그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모두 신원되고 묘지가 하사되었다. 한산군을 제외한 6명의 묘는 근래에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산10-1로 천장(遷葬)되었고, 부근에 7공자를 모신 혜덕사(惠德祠)가 세워졌다. 무풍군의 묘는 2006년 고양시청 정동일 문화재 전문위원에 의해 나머지 5부자의 묘역과 함께 확인됐다. 석물들은 대부분 근자에 만들어진 것이다.
무풍군 묘 / 이총의 머리가 묻혔을까?무풍군 묘의 혼유석에 모란꽃 문양을 새겼다. 누구의 정성인지 갸륵하다.무풍군 묘의 풍화된 문인석. 그럼에도 처량함이 읽혀진다.혜덕사
묘역 근방에는 얄궂게도 연산군 금표(禁票)가 서 있다. 이곳에 있던 연산군의 사냥터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오랜 기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96년 금천군 이변의 묘역을 보수할 때 출토되었다. 비석에는 '금표 안으로 침범하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에 의거하여 참하겠노라'고 새겨져 있다. '기훼제서율'은 왕의 포악상을 열거한 한글대자보에 빡친 연산군이 1504년 공표한 법률로서, 요지는 한글 사용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 금표 역시 정동일 위원에 의해 확인됐다.
연산군 금표 /경기도문화재 88호
서울에서 온녕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 외에도 절두산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양화진도>를 보면 배들이 몇 척 떠 있는 서강(西江) 양화진과 물가에 우뚝한 잠두봉이 보이고 그 옆으로 대궐 같은 기와집이 자리한다. 간송박물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곳이 온녕군의 소유였고, 손자 무풍군 이총이 별서를 꾸민 후 스스로를 서호주인(西湖主人), 혹은 구로주인(歐鷺主人)이라 부르며 유유자적한 곳이라 추정하였다. 현재 절두산순교자기념탑과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양화진도 / 잠두봉 아래로 온녕군과 손자 무풍군이 살았을 집이 보인다.병인박해 형장에 건립된 절두산기념성당 / 병인박해 당시 잠두봉 꼭대기 형장에서 참수된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이후 잠두봉은 절두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성당 아래 절두산순교자기념탑과 주차장 일대가 온녕군 집터로 짐작된다.양화진에서 본 한강서강나루에서 본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