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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잃어버린 왕국 '왜' 2020. 3. 19. 23:52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의 극우단체들에 의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다시 들춰지고 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4세기 일본을 통일한 야마토 정권이, 구체적으로는 진구(神功)황후 정벌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가 군소 7국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가 562년 신라에게 멸망당했다는 설이다. 말하자면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를 근 200년 동안이나 지배한 식민통치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주된 근거는 <일본서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을 해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허구성이 짙어 특별히 방어하거나 공격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지만,(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방어도 느슨해 관련 논문이 의외로 적은 데 놀랐다) 그래도 저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으니,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때의 역사적 당위성이 바로 임나일본부였고, 경제 전쟁이 시작된 지금, 다시 임나일본부설이 튀어나오고 있다.

     

    앞서 말한대로 저들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는 <일본서기>가 메인이고 그밖에 광개토대왕비문, <송서(宋書)> 등이 서포트한다. 재차 말하거니와 <일본서기>는 아예 허구이거나 논거가 미약하다. 그래서 무시하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의 기록인 <삼국사기>가 '왜(倭)'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 <삼국사기>에는 5~6세기, 신라에 대한 왜의 침공이 무려 27차례나 등장하니(신라 공격 20회, 금성 포위 4회, 명활산성 포위 2회, 반월성 포위 1회) 이것은 왜가 한반도 내에 상주하지 않으면 성립되기 힘든 수치인 것이다.

     

    그 점에 있어 우리 사학계는 떳떳하지 못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한반도 내에는 임나일본부가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왜의 존재'가 있어야 되는데, 임나일본부설은 부정하면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은 받아들이는 선택적 취합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선택이다. 게다가 이럴 경우, 왜는 대규모의 군대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데 이는 당시의 항해술을 차지하고서러도 여간해서는 생겨나기 힘든, 아니 생겨날 수가 없는 일이다.

     

    일본 문부성 교과서를 보면 과거에는 임나일본부를 4세기 경 야마토 정권이 파견한 군대가 세운 식민지라고 설명했으나 지금은 최초의 통일정권인 야마토 정권의 수립 자체를 7세기에 두고 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자연히 소멸되었다.('다음백과', '천재교육', '이야기 일본사', '우리말샘' 등에서는 여전히 4세기에 야마토 정권이 수립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대다수 일본교과서 내용에 반하는 것일 뿐더러 오히려 우익 교과서의 주장에 편승하는 일이다)

     

     

    문부과학성 검정 불합격 중학교 역사교과서

    2018년, 지나친 우파 편향 기술로 검정 불합격된 역사교과서가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려 화제를 모았었다. 단 하룻만에 매진된 이 교과서는 증쇄에 돌입하였고 그럼에도 온라인에서 정가의 10배 이상 가격으로 거래됐다. 불합격 당일, 판매순위 184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기록도 세웠다.  

     

    위 불합격 교과서 저자의 '일본서기 입문'

    저자 다케다 쓰네야스는 대표적인 일본 우익 쓰레기 논객이다. 위 '일본서기 입문'은 보지는 않았지만(보고 싶지도 않지만) 내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인 양 기록돼 있다. 

     

     

    나라현 나라시의 진구황후 무덤

     

    진구황후 무덤의 부감(전방후원분 형태이다)

     

    오사카 스미요시 신사의 본전
    진구황후와 스미요시 삼신(三神)이 합사된 신사로서, 오사카로부터 세도내해(瀨戶內海, 진구황후의 신라침공로라고 하는)에 이르는 길에는 진구황후의 신사가 꽤 많이 산재한다. 그중 스미요시 신사 본전은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오이타현 우사신궁(宇佐神宮)

    전국 44,000개 하치만구(八幡宮) 신사의 총본산으로 하치만다이진, 오진(応神)천황, 진구황후가 합사됐다. 저들이 말하는 신라침공로의 마지막 지점에 건립됐으며 사진의 남중누문(樓門)은 일본의 지정 문화재이다.

     

    1943년에 그려진 '진구황후 삼한정벌도'

     

    진구황후의 신라 침공

    진구황후가 신라를 공격해 신라왕의 항복을 받는 허구의 상황을 내러티브했다. 

     


    ~ 이상 사진과 그림을 보면 뭔가 있어 뵈지만, 위에서 등장하는 진구황후, 오진천황, 다케우찌 스쿠네(武內宿禰) 등은 일본 사학계에서조차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들이다. 맨 위, 진구황후의 무덤이라는 것도 그저 전승하는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그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무려 27 차례나 신라를 공격한 왜의 정체는 무엇일까? 특히 399년, 왜의 공격에 무너진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서기 400년 친히 5만의 군사로써 그들을 몰아냈던 바, 이에 관한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영락(永樂, 광개토왕의 연호) 9년(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 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친하여 내통하였다. (광개토)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가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과 연못을 파괴하고 노객(奴客, 신라왕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그 백성으로 삼으니 왕에게 와 구원해주시길 청하옵니다'라고 하므로 태왕(太王)은 은혜롭고 자비롭게 그 충성을 칭찬하였다.

     

    영락 10년(400년) 경자(更子)에 하교하여 기병과 보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서 신라에 들어가니 왜(倭)가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군(官軍, 고구려군을 일컬음)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왜가 다시) 배반하므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잇달아 성을 함락시키니 왜인들이 곧 항복하여 귀순하였다.

     

     

     

     

     

    명활산성

    경주의 외성으로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실성 마립간 4년(405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보면 그 전에 축조되었음이 분명하다. 2012년 개축되기 전의 사진이다.

     

    명활산성작성비

    1988년, 신라 진흥왕 12년(551) 개축되었다는 명문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광개토대왕의 호우(壺杅)가 출토된 호우총

     

    호우총 안내문

    기타 금동관, 금 귀걸이, 금드리개, 토기, 목칠기, 금동환두대도, 칠기로 된 도깨비 얼굴 화살통 등 5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호우총 출토 호우

    바닥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400년 신라를 원조한 광개토대왕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을묘년(415년)에 제작한(또는 하사받은) 그릇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

    1877년 만주 집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를 2009년 구리시에서 완벽히 재현했다. 문제의 신묘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역시 그대로 새겼는데, 대신 아래와 같은 안내문을 세웠다.

     

    광개토대왕 비문 안내문

     

    안내문의 신묘년 기사 해석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왜인은 1년이 다 되도록 신라 땅을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바다 건너 과연 얼마나 많은 군대가 왔기에 국경과 신라 땅에 가득하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바다 너머 일본에서 찾으면 사실 답이 없다. 앞서 말한것처럼 당시 일본에서는 그만큼 많은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왜인들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그 답이 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또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 이상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면 아래와 같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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