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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5.16 혁명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0. 21. 21:43

     

    혜화동은 서울에 살던 청춘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쯤의 추억은 담겨졌을 공간이다. 기쁘면 기쁜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최유나는 '밀회'라는 노래에 과거의 슬픔을 담았다. 물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터, 아마도 그래서 제목이 '밀회'인지도 모르겠다. 그 노래의 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번만 우연처럼 다시 한번만

    혜화동 그 거리에서

    잠시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당신과 거닐고  싶어

    .......

     

     

    '밀회' 노래 듣기 

     

    혜회동 마로니에 공원

    구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조성된 마로니에 공원은 지금도 청춘의 메카다.

     

     

    하지만 오늘 쓰려고 하는 내용은 추억이나 낭만이 아니고 혜화동의 얽힌 어두운 현대사이다.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썼어도 벌써 썼을 것 같아 그간 펜을 잡지 않았는데, 최근 찾아보니 없었다. 5.16 당시 내각수반이던(당시는 의원내각제 시절이었으므로) 장면(張勉) 총리와 5.16 군사정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쓰게 되었으나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현석호 씨의 회고를 정리한 자료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라 이제 모든 것은 내 옅은 기억에 의존해야 할 터, 얼마나 끄집어 낼 수 있을지 또한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비화는 아니고, 또 여기서는 그저 혜화동에 얽힌 이야기만을 쓸 요량이나, 아무튼지간에 현석호의 회상은 멀리 강원도 인제에서 올라온 김대중 씨로부터 출발한다. 당시 민주당 청년당원이던 김대중은 전남 신안이 고향이었던지라 목포에서 입신하고 싶었지만 같은 당 정중섭의 오랜 텃밭이었던지라 뿌리를 박지 못하고 낯선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게 된다. 하지만 워낙에 연고가 없던 지역이었던 바, 연거푸 낙선하였다가 상대 후보였던 자유당 후보의 자격 시비가 일어 보궐선고를 치르게 되었고, 이에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된다.(하지만 당선 이틀 후 5.16이 일어나 김대중의 오랜 싸움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만다)

     

    국방장관 현석호는 김대중 축하 파티의 명목으로 열린 술자리에 참석해 그를 격려하고 집에 돌아왔는데,(의원내각제 시절이라 가능한 얘기다) 다음날 새벽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는다. 1961년 5월 16일로, 밖은 미명(未明)에도 이르지 않은 깊은 어둠 속이었다.

     

    "장관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쿠데타라니? 누가? 아니, 그보다 자네는 누군가?"

     

    현석호는 다급히 물었지만 전화는 곧 끊어졌다. 그러자 현석호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만나 상황을 파악할 것을 지시하고 그가 한강대교로 부하들을 보내는 것을 확인한 후 (의원내각제 하의) 명목상의 국가 원수인 윤보선 대통령에게 통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반도호텔에 있는 장면 총리를 만나러 갔다. 당시 총리 공관이 마련되지 않아 장면은 반도호텔을 공관 대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현석호가 8층 808호에 있는 장면 총리의 방에 들어서자 총리가 반색했다. 옆에는 경호실장 조인원과 검찰총장 이태희 등 몇 명이 모여 있었고, 그들도 이미 쿠데타 소식을 접한 상태였던지 사색이 되어 장면 총리의 피신을 권했다.

     

    "총리각하. 일단 저의 집으로라도 피하시지요. 군인들이 설마 저의 집까지야....."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피한단 말인가? 현(석호 국방)장관이 장(도영 육참)총장에게 상황파악을 지시했다 하니 장총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봄세."

     

    검찰총장 이태희가 거듭 권고했으나 장면은 계속 뻗댔다. 하지만 의지는 이미 무너진 듯,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현석호를 올려다보았고, 현석호도 일단은 피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하자 장면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밖에 나가자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혁명군이 쏘아대는 공포였다. 5월 16일 새벽, 가장 먼저 한강다리에 이르러 도강을 시도한 해병대와 공수단은 다리를 지키던 초병(헌병)들의 저지를 받았다. 이에 4시 15분 경 해병 1여단과 초병들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5.16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전이다) 화력에서 밀린 헌병들은 부상을 입은 채 곧 철수하였다. 육군본부를 목표로 진입한 혁명군은 이후 거침없이 서울 시내로 밀려들며 간헐적으로 공포를 쏘아댔는데 그 소리가 가히 공포스러웠다.

     

    총소리에 겁을 먹었는지 총리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검찰총장의 운전기사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일행들이 기사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동안 총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이 들렸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길 건너편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했지만 아직 직원이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신원을 확인할 사람이 없다는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결국 장면은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야 했는데, 바로 그때 누군가 달려오며 군인들이 온다고 소리쳤다. 다급해진 장면 총리는 아내와 함께 결국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의 차로 달려가 올라탔고 그 와중에 안경이 떨어져 밟혀 깨졌다. 마치 닥쳐올 혼란의 신호탄처럼....

     

     

    장면(1899-1966) 총리

    제2공화국의 내각수반으로 이승만의 제1공화국에 이어 2공화국을 이끌었으나 4.19혁명 이후의 혼란과 집권여당인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 속에 5.16을 맞이한다.

     

    총리가 있던 반도호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로 왼쪽에 조선호텔이 보인다.

     

     

    총리가 떠나고 약 10분 뒤 혁명군의 박종규 소령이 공수단원들을 이끌고 호텔을 들이쳤으나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박종규는 총리 체포가 불발된 것을 분해하며 일이 꼬이게 되는 게 아닌가를 염려했으나 그가 놓친 총리를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붙잡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도영. 방금 전까지 현석호 국방장관과 함께 쿠데타 군 진압을 위해 분주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편 현석호는 반도호텔을 빠져나오다 곧 혁명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신원을 묻는 병사의 질문에 현석호는 국방부장관이라 답했다. 병사는 조금 놀라더니 그를 데려가 혁명군에 접수된 시청의 뒤쪽 벽에 세웠다. 국방부장관이 일개 사병에게 피체된 것인데, 현석호가 아직은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자괴감에 젖는 동안 국방부 차관이 붙잡혀 왔다. 그도 정세를 살피러 나왔다 잡힌 모양이었다.(두 사람은 서로 할 말이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고.....)    

     

     

    5.16 군사정변의 상징과도 같은 사진

    왼쪽이 박종규 소령, 오른쪽이 차지철 대위다.

     

    장도영과 박정희

    동상이몽의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섰다. 장도영은 당시 5.16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정변 후 곧 박정희에게 포섭되었고, 혁명군의 최고사령관 격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혁명 공약'을 발표하게 된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틀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의장과 부의장에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소장이 앉는다. 이 사진은 그 직후의 것이다.

     

    혁명을 선포하는 장도영 혁명위원회 의장. 

    5월 16일 9시 시청 앞에서 사진이다. 박정희 소장은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 우두머리인 장도영을 부추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계엄사령관으로 추대하였지만, 단지 그의 이름값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단순한 장도영은 이를 모르고 우쭐해져 꼬임에 넘어갔고....

     

    체포된 장도영

    결국 예정된 수순에 의해 '팽'당하고 만다. 그는 1961년 7월9일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면제로 풀려났고, 이후 나머지 생을 미국에서 보내다 2012년 별세했다.(이것을 보면 5.16은 세간의 평과 달리 잘 준비된 구석이 있던 쿠데타였다)

     

     

    그 시각 장면 총리는 막 종로 청진동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막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수송동의 한 민가 앞에 차를 세우게 했다. 자신이 평소 잘 알고 지냈으며 미국 일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기도 하던 미 CIA 한국 지부장 피어드 드 실버의 사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쿠데타 소식을접한 실버 국장은 그 시각, 사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대사관으로 막 출발하였던 바, 장면은 이래저래 운이 닿지 않았다.

     

     

    장면의 외교관 여권

    장면 가옥에 전시된 대한민국 1호 외교관 여권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장면은 제1대 주미한국대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외교통이다. 만일 그가 CIA 한국 지부장 실버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면 역사는 달라졌겠지만 운은 박정희 쪽에 있었다.  

     

     

     

    갈 곳이 막연해진 장면은 혜화동 자택으로 갈까 했으나 그곳이 안전할 리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집 근방의 혜화동 성당을 지목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장면에게 있어 그가 다니던 혜화동 성당은 성서의 소알 성과 같은 피난처였는지 몰랐다. 그리하여 장면 부부는 부인 김옥윤 여사와 친분있던 가르멜 수도원 원장 마리 클레 수녀로부터 성당 뒷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방 하나를 얻어 숨었다. 일국의 최고책임자인 총리란 자가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꼭꼭 숨은 것이었으니 아마도 못찾겠다 꾀꼬리 소리가 나올 때까지 숨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는 1979년 신군부가 12. 12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가족과 함께 서울시내를 사흘간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다 결국 붙잡히고 만 노재현 국방장관과도 비슷한 경우였다.(그의 비겁하고 소극적인 대처는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쿠데타를 용이하게 만들었고 또 용인하는 꼴이 되었다. 그는 12. 12 후 퇴역하였으나 당시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5공화국에서 한국종합화학 사장,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 지난 2019년 94세로 영면했다)

     

    수도원에 숨은 장면은 미국 대사관에 수시로 전화를 해댔다. 쿠데타 군을 어떻게 좀 처리해보라는 것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있는 곳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이같은 국가최고책임자의 용렬함에 실망하게 되고 게다가 미대사관 분위기는 군이 분열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남침과 쿠데타 군이 '혁명 공약' 첫머리에 내세운 반공의 국시에 쿠데타 용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한 가운데 장면은 은신 4일만에 장도영의 정보망에 포착돼 붙잡히게 되는데, 이때 전화를 받은 장도영은 희색이 만면해 "쥐새끼를 잡으러 간다"며 권총을 차고 나갔다고 한다. 체포된 장면은 즉시 총리직을 사임하고 내각 총사퇴를 하겠다는 기자회견을 갖는다.

     

     

    혁명공약

     

    하야를 발표하는 장면 총리

    5월 18일 혁명군에게 붙잡힌 장면이 안경도 못 쓴 채 얼빠진 얼굴로서 기자들과 마주했다. 이로써 제2공회국은 불과 11개월만에 막을 내리고(1960년 6월 15일~1961년 5월 18일)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장면 총리가 피신한 혜화동 성당

    혜화동 성당은 명동성당, 약현성당에 이어 1927년에 세워진 서울의 세번째 천주교 본당이다. 위 건물은 옛 자리에 1960년 이희태의 설계로 건립되었으며 기존 한국 성당건축에 보편적으로 쓰인 적벽돌의 고딕양식에서 벗어난 근대적 형태로서 2006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가르멜 수도원이 있던 자리

    가르멜 수도원은 1940년 프랑스 '맨발의 가르멜 여자수도회'에서 설립해 국내 최초로 완전봉쇄형 수도원으로 운영되다 1963년 수유리 산 밑에 1만여 평의 터를 마련해 이사했고 일대에는 혜화동주교관이 세워졌다. 

     

    장면 가옥 안채

     

    장면 가옥 사랑채

     

     

     

    장면 가옥 외관과 안내문

      

     

    안내문 옆의 장면 상

    인간 장면은 청렴 결백하였으며 여성 편력도 없고 술 담배, 바둑과 같은 기호나 취미도 없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오로지 책을 읽었는데, 다만 현석호의 회고에 의하면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낮이고 밤이고, 밤이면 저녁 식사까지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독교 방담에 열중해 상대를 질리게 만들었다고 한다.(코로나 상황이라 누군가 마스크를 씌워놨다 ^^)

      

    5.16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쿠데타'의 제목 아래 '수도 서울을 완전 점령', '행정·입법·사법부 장악' 등의 내용과 장도영, 박정희, 김윤근의 얼굴이 보인다.

     

    2002년, 5.16은 군사정변으로 최종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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