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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외교력을 보여주는 퀼 테긴(闕特勤) 비문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1. 3. 23. 23:38
터키 공화국의 전신은 한때 아시아· 유럽·아프리카 3대륙을 경영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다. 막강 오스만 제국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을 잡고 세상을 나눠가지려 했으나 그들 동맹군이 패망하며 영토가 확 줄어들었다. 그 오스만 제국의 전신은 셀주크 투르크 제국으로,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200년 십자군 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나라였다. 그 셀주크 제국의 전신이 우리나라 역사에도 등장하는 돌궐(突厥) 제국으로, 돌궐은 투르크(혹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다. 투르크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옮겨 적었다는 뜻이다.
역사적 고증에 있어 사소한 것과는 충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뿌리는 좌우지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다음의 질문이 따른다. "돌궐은 고구려와 국경을 접했던 나라로 서로 동맹 관계였다고 하던데, 그렇듯 아시아 동쪽 끝에 있던 나라가 지금은 어째서 서쪽 끝에 있느냐, 터키의 조상이 돌궐족인 게 맞긴 맞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을 '다음백과'에서 찾으면 아래와 같다.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투르크계 민족이다. 족장 토문 때 세력이 강대해져 551년에 투르키스탄을 경략한 후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정벌하고 키르키즈를 장악하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며 세력을 떨쳤다. 카간(황제)의 지위를 둘러싼 싸움으로 통일기반이 취약해져 583년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누어졌다.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657년 서돌궐을 멸망시킨 장수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정방이다. 이후 서돌궐족은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그중에 '오우즈(Oğuz)족'이 있었다. 이들이 서진(西進)해 수야브(Suyab, 碎葉) 근방에 세운 나라가 셀주크 제국으로 셀주크(혹은 셀축)란 이름은 서진을 이끌었던 오우즈족의 장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들은 그 후 강력한 정복사업을 펼쳐 11~14세기, 투르키스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동화되어 유럽 제국과의 십자군 전쟁을 치르게 된다.(☞ '아시아의 기독교 왕국 '요한'의 실체')
하지만 지금의 터키 사람들에게서 서돌궐 오우즈족의 혈통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터키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유럽계 그리스인과 아시아계 페르시아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혼혈이 터키 민족의 대종을 이루었을 것이라 보여지는 까닭이다. 물론 터키인 중에 돌궐족의 피가 아주 없다 하진 못하겠지만,(아무튼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투르크 사람이란 뜻의 '튀르키예'라고 부르고 국명도 튀르키, 즉 터키다) 돌궐족의 직계 후손은 아무래도 중앙아시아의 '~스탄' 돌림자를 쓰는 국가의 국민들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동쪽의 돌궐족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 역시 부활하니, 630년 당나라 이정이 이끄는 원정군에 멸망해 지리멸렬됐던 동돌궐은 이후 7세기 말에 접어들어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 부활한 돌궐족의 나라를 역사학계에서는 앞 시대의 그것과 분리해 제2 돌궐제국(682-745)이라 부르는데, 건국자인 일테리시 카간(재위 682-691)에 이어 2대 황제 카파간 카간(默啜可汗, 일테리시 카간의 동생) 때에 이르러서는 과거 동돌궐이 지배했던 땅을 거의 회복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퀼 테긴(闕特勤, 685-731)은 그 영토 확장에 선봉장이던 사람으로 카파간 카간의 조카였다.
"묵철이 사방에 군대를 파견하여 영토를 넓이니 좌우 만 리를 넘었고, 모든 오랑캐가 묵철의 지배하에 놓였다."- 신당서
아래 퀼 테긴의 비문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정복 기록처럼 혁혁한 전과가 기록돼 있는 바, 카파간 카간 치세의 영토 확장은 퀼 테긴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카파간이 자신의 아들 이넬(富俱可汗)을 카간에 세우자 이에 불복하여 이넬을 죽이고 제 형 아사나묵극련(阿史那黙棘連)을 옹립해 즉위시키니 이 자가 4대 황제 빌게 카간(毗伽可汗, 재위 716-734)이다. 그런데 731년 퀼 테긴이 불현듯 병사했다. 이에 빌게는 자신을 위해 애쓴 동생 퀼 테긴을 애도하고자 국장을 선포하였고, 당 현종도 이웃 나라에 대한 예우로 조문사절을 파견하며 그 편에 자신이 직접 지은 추도문을 보낸다.
돌궐 역시 당나라 황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을까,(당 황제가 추도문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자랑일 수도 있다) 빌게는 이 한문 추도문을 돌궐문자로 새긴 퀼 테긴 송덕비 뒷면에 첨부해 완성시키는데,(732년 8월21일) 이 비석이 약 1200년 후인 19세기 후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 떨어진 아르항가이 아이막 호쇼차이담이란 곳에서 러시아 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높이 3.75m의 이 비문에는 8세기 돌궐제국의 사정이 어느 문헌 기록보다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로부터 1.1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빌게 카간 비문, 그리고 이후 발견된 제2 돌궐제국의 명재상 톤유쿡(暾欲谷) 비문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역사 문화 연구의 1급 사료로 꼽힌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기록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6세기 돌궐 제1제국 황제의 장례식에 동쪽에 있는 배크리(Böküli)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다. 배크리는 매크리(혹은 무크리)와 함께 돌궐인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고구려인을 뜻하는 맥족(貊族)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18년(607) 조에 나오는 "일찍이 수나라 양제(煬帝)가 계민(啓民, 계민가한)의 장막에 행차했을 때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는 기록과도 상통한다.
즉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양제는 혹시나 뒤통수를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뒷문 단속차 친히 돌궐의 수도 오르드 바르크를 방문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계민가한의 장막에는 자신보다 먼저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양제가 고구려 사신에게 "돌아가 네 왕에게 빨리 수나라에 입조(入朝)하여 조현(朝見)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수서(隋書)> 양제 본기(本紀) 대업(大業) 3년(607) 조에 실려 있다.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이미 친교를 맺은 것에 놀랐고, 까닭에 이처럼 화를 냈던 것이다.
이때가 고구려 영양왕(재위 590-618) 시절이다. 영양왕은 598년 양제의 부친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전력이 있었는데, 그는 통일제국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에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하고 북방의 강국인 돌궐과 선제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수나라의 배후국인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에 먼저 사신을 파견했을 수도 있다) 영양왕은 이와 같은 외교술 속에서 수양제가 감행한 세 차례 대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바, 무리한 외정(外征)으로 국력이 소진된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 퀼 테긴의 비문에는 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중국인의 말은 시종 달콤하다. 한인(漢人)의 물건은 매우 아름답다. 달콤한 말과 아름다운 물건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민족들이 접근하게 만든다. 한 부락이 이렇게 하여 그들과 가까이 살게 되면 그들 한인은 곧 저의를 드러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을 발전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가 잘못을 범하면 한인들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니, 그들의 직계친족, 직계씨족, 나아가 부락까지 없앤다. 우리 돌궐인들은 일찌기 달콤한 말과 조건에 현혹되어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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