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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풍납토성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6. 05:11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도성(都城)인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일제시대부터 말이 있어 왔다. 앞서도 언급했듯 백제 수도 위례성은 <일본서기>에도 고구려에게 함락되던 그 최후의 날의 그려져 있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었던 바,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일본서기> 웅략천황(雄略天皇) 20년조
까닭에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위례성을 찾아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는데, 1925년 하남위례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그해 여름에 일어난 이른바 '을축 대홍수'였다. 전국적으로 7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가옥 6000여 채를 유실시킨 '을축 대홍수'는 특히 한강 중류지역에 극심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바, 지금의 석촌호수가 있는 송파나루 일대를 비롯한 인근 지역(잠실, 신천, 풍납동, 뚝섬, 이촌 등)을 초토화시켰다.
개로왕 사후 웅진으로 천도하며 폐허가 됐던, 그리하여 이후 1500년 동안 사라졌던 한성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은 이때 한강 둔치에 쌓였던 토사들이 대홍수에 쓸려가며 세상에 나왔다. 풍납토성의 성벽에 기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였던 흙들이 제거되며 과거의 토축 성벽 흔적이 드러나게 된 것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것이 백제의 도성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니, 오직 총독부에 파견됐던 일본인 인류학자 아오노 겐지(淸野謙次)만이 그곳 풍납동을 답사했다.
~ 그는 1925년 9월 25일 총독부 의과대학장 시가(志賀), 교육자 오다 쇼고(小田省吾)와 함께 풍납동을 답사하고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의 백제유적'(朝鮮京畿道九川面風納里の百濟遺跡)이라는 기행문 형식의 글을 발표한다.
겐지가 초토화된 풍납동을 찾은 이유는 홍수 직후 한 조선인이 총독부박물관에 팔러 온 옛 동기(銅器)인 초두(鐎斗, 술을 데우는 쓰이는 청동 그릇) 두 점에 주목한 까닭이었다. 그는 저 유명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를 통해 그 초두에 관해 들었고, 직접 확인해보니 과연 명품이었다. 이에 학자적 호기심이 발동된 그는 그것이 발견되었다는 곳을 직접 찾아가 보았고, 그곳에서 큰 물에 씻겨나간 토벽에 노출된 무수히 많은 토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500년 동안 잠들었던 한성 백제는 한 무명의 일본인에 의해 그렇게 깨어났다.
이어 총독부 학예사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 현장을 답사해 과대금구(銙帶金句, 금제 혁대 장신구) 금귀걸이, 유리구슬, 다량의 경질토기 등을 수습했는데, 그는 이 유물들과 아오노 겐지가 석학 세키노 다다시에게 들은 백제왕성 운운의 말을 총독부에 전하며 이곳을 백제의 왕도로 지목했다. 이에 풍납·석촌동 일대에 대한 총독부 차원의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바, 1916년 조사 때 단순히 옛 성터로 기록됐던 이곳은 1936년 중요 유적지로 인정받아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해방과 더불어 다시 잊혀졌고 일부 학자들만 노트 속에서만 살아남았는데, 그것도 이곳이 백제의 수도라는 것이 아니라 후보지 중의 하나로만 거론됐다. 당시 거론되던 곳은 ①하남시 춘궁동, ②몽촌토성, ③풍납토성, ④<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말한 충남 직산 등으로서, 그중에서도 다산 정약용이 주장한 하남 위례성이 백제의 수도로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 놀랍게도 사학계의 태두라 불리는 두계 이병도도 그렇게 여겼고, 그래서인지 한때 풍납토성을 주목했던 삼불 김원룡도 '반민반군적 읍성'(半民半軍的 邑城: 도성이 아니라 도성의 외곽을 지키던 군인과 백성들이 함께 거주하던 읍성)이라고 후퇴했다. 이는 단 하룻밤만에 유물을 수습해버린 무령왕릉 졸속 발굴과 함께 학자 김원룡이 남긴 백제사에 대한 씻지 못할 오류로서, 만일 그때 소신을 밀었더라면 (그는 1964년 풍남토성을 최초 발굴했다) 지금과 같은 유적지 훼손도 없었을 것이며 복원에 따른 천문학적 세금 손실도 막을 수 있었음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지는 문화재 당국과 주민들과의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엉터리 실증사학자 이병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가운데 개발과 성장의 시대를 거치며 왕성은 계속 파괴되어갔고, 결국 백제의 왕궁 터는 소실되고 지금의 비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1997년 아파트 건설 공사 중 백제의 유구과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음에도 그 터들이 계속 뭉개지며 공사가 진행되었으니 쉽게 말하자면 개발의 이익(₩)이 문화와 역사를 쌈 싸 먹은 셈이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역사적인 서울 올림픽이 유치되며 주변의 토성으로 겨우 연명하던 백제의 수도는 '노골적 파괴'라는 최후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울 도심과 올림픽 스타디움을 연결하는 새로운 한강다리인 올림픽 대교 & 올림픽 대로가 풍납토성을 관통하여 설계된 까닭이었다.
이때 다시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나섰다. 앞서 '살아있는 전설 석촌동 고분군'에서도 말한 바 있는, 동서관통도로의 건설로 사라질 뻔한 석촌동 고분군을 구해낸 바로 그 스파이더맨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외로운 투쟁을 벌였으니 자비(自費)의 세미나를 열고 문화재당국과 청와대와 방송국을 비롯한 각계각층에 전화를 걸고 건의서를 보내는 등, 풍납토성 구출을 위한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 인해 건축이 지연된 성난 사업자들에게 욕설은 기본이요, 감금, 폭행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의 집념 어린 노력은 마침내 문화재위원회와 서울시를 움직여 올림픽 대교와 올림픽 대로가 토성을 우회하도록 설계를 변경시켰다. 아울러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세인의 관심을 풍납토성으로 끌어들였던 바, 그 일부가 지금처럼 보존·정비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형구 교수의 가장 큰 공로는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될 때 단지 성벽만이 지정되었던 것을 (그리하여 그 안팎이 개발의 미명으로 파괴될 때 속수무책이었던 것을) 37년 만에 성 내부까지 추가시켰다는 점이었다. 이에 더 이상의 파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인데, 그러면서 그동안의 발굴(개발로 의한 자연 발굴이라 함이 옳을 것 같다)과 출토유물에 기반한 학술적 연구가 진행되어 풍납토성의 성격을 완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 1964년 서울대의 조사를 필두로 선문대, 한신대, 한성백제박물관 등에서 발굴이 이어졌는데, 2008년 왕궁지로 추정되는 경당연립주택 지구에서는 제사 건물지 및 어정(御井)으로 여겨지는 우물 등이 발굴됐고, 중국제 도자기, 대부(大夫)라고 쓰인 도자기 편(片)을 비롯한 500여 상자 분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현재 풍납백제 문화공원이 된 미래마을주택 지구에서도 내성 터, 창고 터, 살림집 터를 비롯한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다.
즉 풍납토성은 1세기 무렵부터 연인원 140만 명 이상이 동원돼 만들어진 총 둘레 약 4킬로미터,(현재 2.7km) 최대 너비 60미터, 최대 높이 13.3미터, 내부 면적 약 26만 평의 공간이며, 성 밖으로는 한강의 물을 끌어들인 해자(垓子)가 설치된(현재 2.1km) 아시아 최대의 판축 토성이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한강에 정박한 배와 같은 모양으로, 고구려 국내성이 약 2.6km, 경주 월성이 2.4km인 것에 비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 성인지를 알 수 있다)
지금 풍납토성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5호선 전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개발의 와중에 뚫어진 성 옆구리를 통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백제로의 시간 여행은 풍차가 보이는 풍납근린공원과 그곳의 바람드리 언덕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성벽 도로였을 그 언덕 위를 시간을 초월해 걸을 수도 있다. 혹자는 풍납토성이 토성이기에 쉬 무너져 망가져버렸다고 안타까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판축의 토성이기에 훼손이 쉬운 석성보다 내구성이 강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파괴되지 않고 지금껏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백제 678년 역사(BC 18~ AD 660) 중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를 수도를 삼은 기간은 185년에 불과하다.(웅진 시기: 476-538, 사비 시기: 538-660) 나머지 493년은 하남위례성, 즉 풍납토성을 도성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18년에 정도(定都)한 삼국의 도읍 중에서 가장 오래된 500년 간의 백제 수도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한국의 폼페이'라 불리기도 하고, '백제의 타임캡슐'로 불리기도 한다. 잠시나마 그 고대로 돌아가 보자. 그 시간여행길은 생각보다 훨씬 아스라하며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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