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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을 폭파시킨 3인의 의병과 연트럴파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0. 17. 10:27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쇠망사>에도 실렸고, 일제가 발간한 사진엽서에도 실렸으며, 프랑스와 독일 등의 외신에서도 대서특필된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3인은 술김에 철도시설물을 파손시키거나 운송물자를 훔친 도둑들이 아닌 의병들이란 사실을 앞서 1편에서 설명했다.(☞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조선인 스페셜리스트')
즉 1904년 8월 27일 거사 후 체포되어 9월 20일 재판을 받고 그다음 날인 21일 오전 10시 마포 공덕리 산기슭에서 총살된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의 3인은 러일전쟁의 병참으로 건설 중인 경의선 시설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선로에 폭약을 매설, 군용열차를 폭파시키는 전무후무한 거사를 치른 후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폭파시킨 도로변 철도건널목 부근에서 강제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86년 3월 26자 조선일보는 이들 3의사(義士)가 처형된 '마포가도의 철도건널목 산기슭'이 현재의 마포구 도화1동 360~390번지 일대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석하 씨(공덕동 노인회장)의 증언으로 확인했다. 이 씨는 형 이석린 씨(사망)가 1904년의 처형 장면을 목격한 후 자신에게 "용산과 당인리 간 철도에 폭약을 묻어 터뜨린 의병 3명이 붙잡혀 공동묘지 근처에서 끔찍하게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들려주었다고 말했다.
현재의 도화1동 일대는 지형도 변하고 아파트가 밀집돼 있어 당시의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하지만 위 3인의 애국적 행위는 확인되었으므로 1991년 뒤늦게나마 '건국훈장 애국장'이 일괄 추서되었다. 아울러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우다 학살당한 세 의병의 처형장소에 기념물을 세워, 후손들이 선조들의 의거를 기리고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당시 서울 시장의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념물은 지금껏 세워지지 않고 있다.
철로에 폭약을 설치하고 근방에 숨어 있다 기폭장치를 누르는, 그리하여 굉음과 함께 스펙터클하게 폭파되는 철도와 열차는 옛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들 3인은 그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하고 산화한 것이다. 일제가 위 의병의 총살형을 공인사진사까지 초청해 촬영하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것은 혹시라도 그와 같은 참사가 재현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일제의 바램과는 달리 항일의병운동은 이후 들불처럼 타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써 전국 각지에서 수행된 의병운동은 일제에게는 무엇보다 지대한 실질적 위협이었다.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항일의병과 일본군과 전투는 2,852회를 넘었고 의병의 숫자는 141,815명에 달했다. 까닭에 일본군은 의병에 대해서는 발악적으로 대응했으니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를 따르자면 강원도 고성에서는 의병을 학살한 후 목을 시장에 효수하였으며, 학살한 시체를 공개리에 가마솥에 끓여 조선인들에게 그 골육을 보라고 강요했다.
또 원주에서는 의병을 나무에 묶어 배를 가르고 피부를 벗긴 후 보는 이로 하여금 손뼉 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의병 대신 주민들을 잡아 반신(半身)만 땅에 묻고 마치 풀베듯 목을 치게도 했다. 또 황해도 평산에서는 한겨울에 남녀 수십 명을 잡아다가 얼음을 깨고 물속에 세워 얼어 죽게도 만들었다. 일제에 그렇듯 잔인했던 것은 그만큼 의병이 공포스러웠고 위협적이었으며, 또한 결사적이었다는 뜻이니 그들 의병의 빛나는 활약상이 역(逆)으로 일제의 의병 탄압 기록물인 <조선폭도토벌지>에 남아 전한다.(☞ '의병전쟁'')
위의 순절한 마포 의병은 1905년부터 1913년까지 거의 10년간이나 이어진 의병전쟁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껏 이렇다 할 조명(照明)이 없었으니 표석이나 기념물을 조형해 장거(壯擧)를 기리겠다는 약속마저 그나마 잊혔다.(그 약속이 천명된 신문기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장거가 있었던 경의선 선로는 지금도 마포의 도심 한가운데 남아 있다. 구(舊) 경의선 선로의 일정구간을 공원으로 꾸민 덕분이다.
도심 한가운데 조성된 그것이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다 하여 '연트럴파크'로 불리기도 하는 그 공원녹지는 도시 공원 중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센트럴파크에는 못 미치지만 세계에서 가장 긴 도심 공원이라고 불릴 수는 있다. 말한 대로 구 경의선 선로가 지나던 일정 구간이 공원으로 탈바꿈된 까닭인데 도심 재개발의 성공적 사례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다. 그 연트럴파크는 위 3의사의 장거가 있었던 마포구 공덕동에서부터 시작해(지하철 공덕역 1번 출구 70m 지점에서부터) 서강대 앞과 홍대 앞을 지나 가좌역 신(新) 경의·중앙선 부근까지 수 킬로미터가 이어진다.
연트럴파크의 공식 명칭은 '경의선 숲길'로, 길이는 6.3km, 면적은 8만여㎡에 이른다고 하는데, 잘 꾸며진 공원길 중간중간에는 옛 경의선이 선로들이 남아 있어 조성자의 센스를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수 킬로미터의 공원길 어디에도 3의사를 위한 3.3㎡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상황에 아랑곳없이 오늘도 그 길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방역의 문제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3.3㎡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 혹은 무의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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