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대동강의 고구려 다리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2. 6. 20. 00:28

     

    과거 군복무 시절, 북한이 살포한 전단 제거작업에 나갔다가 그중 한 삐라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내용인즉 월북한 국군 출신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도식적인 체제 선전이었다. 물론 모두 사진이 함께 실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들이 단체로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광경도 있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월북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대동강의 풍경이 흡사 파리 세느강과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긴 이유는 단 한가지로 강변 가까이 고층건물이 밀집돼 있는 까닭이었다. 이것은 한강 등 남한의 강에서는 낯선 풍경이었으니, 이른바 냉대 하계고온기후(쾨펜의 세계기후구분에 따른 분류)에서 비롯된 여름철 집중호우기를 거쳐야 되는 서울의 한강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래서 한강에는 고수부지, 둔치, 유수지 등으로 불리는 공간이 필수이다) 반면 북한의 대동강, 청천강 지역의 강우량은 파리나 런던처럼 연중 고른 까닭에 강변에 연접한 건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평양시와 대동강 풍경 / 위키피아
    파리와 세느강
    서울과 한강
    서울 한강의 여름철 범람 사진
    그래서 이 같은 공간은 필수이다. 이곳은 평소 공원으로 이용된다.

     

    다시 말하지만 한강은 여름철 집중호우로 인해 반드시 유휴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교량 길이도 자연히 길 수밖에 없으니 대동강에 가설된 다리가 700km 내외인 반면 한강의 다리는 평균 그 배 이상 길다. 내가 이와 같은 사설을 다는 이유는 대동강에 건설된 고구려의 다리를 말하기 위함인데, 전제까지 달자면 만일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이 아닌 서울이었다면 결코 다리를 가설하지 못했을 것으로 사려된다. 하지만 그 시절에 고구려가 패수(대동강)에 교량을 설계하고 건설하였다는 사실인즉 실로 놀라우니 그 자체로서 고구려의 대단했던 국력이 증명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재위 402-417년) 조에는 고구려가 평양주에 큰 다리를 새로 건설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학자들은 이 다리를 지금도 유구가 남아 있는 청호동과 휴암동 사이의 옛 다리라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 이미 다리를 건설하고 완공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천도는 장수왕 재위 15년 때인 427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표방하여 도읍을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고 말하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아차산성에서 개로왕을 참수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나 장수왕의 남침은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침략을 사주하고 선조인 고국원왕을 거듭해 모욕한 때문이다.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 이에 격분한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동원해 남침을 단행하는데  이때의 나이가 무려 82세였다. 남정(南征)을 하려면 벌써 했어야지 50년을 기다렸다는 것이 설득력 없다는 뜻이다.

     

     

    개로왕이 참수된 서울 아차산성 (망루 부근)
    아차산성 부근의 고구려 무덤 (구리시 소재)

     

    따라서 대동강의 고구려 다리가 남침용이라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떨어지니 수도의 교통을 위해 건설되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유구로써 확인된  다리의 길이는 375m, 폭 9m로서, 당시에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인데, 이는 3백년 후 지어진 신라의 월정교가 약 60m였던 점과 비교하면 당대의 엄청난 기술력과 노동력을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북한은 이 다리 유적을 문화유물 16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부재는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하는데, 사진을 보면 꺽쇠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정교한 사개물림으로 조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는 두꺼운 교각 위에 가로와 세로를 견고히 맞물린 지지보를 놓은 다음, 두터운 깔판을 깔고 난간까지 설치한 규모로, 보수를 이어가며 200년을 존속하다 667년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리 북쪽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위치하며 남쪽에는 동명왕릉과 정릉사가 있다. 

     

     

    다리의 위치
    길이 3.8m, 폭 8~10m의 다리 부재
    휴암동에서 출토된 다리 부재
    최근의 기후변화로 요즘의 대동강은 과거와 달리 범람 위기를 겪고 있다. / 이 지도는 2020년 여름철 집중호우로 8월 6일 대동교와 옥류교(빨간 원)가 전면 통제된 것을 설명한다. 이때 통행은 능라다리(녹색 원)를 통해 이뤄졌다고 한다. (데일리NK 자료사진)
    대동강의 대동교, 옥류교, 능라다리 (투어노트 사진)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