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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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작가의 고향 2022. 4. 19. 06:59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그녀의 찢어진 입술 그녀의 찢어진 눈꼬리 그녀의 찢어진 미니스커트 그녀의 찢어진 청바지 아아아 찢어진 거미줄 찢어진 신문지 조각 찢어진 나방의 날개 찢어진 북어의 살점 오오오 너무 길게 길러 찢어진 그녀의 손톱 너무 꽉 조여매 찢어진 그녀의 코르셋 너무 무거운 귀걸이를 달아 찢어진 그녀의 귓불 너무 순정을 지키다 찢어진 그녀의 정조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앞서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에 관해 쓰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라는 조사 결과를 소개한 바 있다. 이에 반해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물론 이에 관해 조사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만일 조사를 한다면 고(故) 마광수 교수가 순위에서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증적으로 그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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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석문(石門)작가의 고향 2022. 4. 11. 23:59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려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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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작가의 고향 2022. 3. 29. 23:58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는 2020년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인 1위로 꼽혔다. 그래서 윤동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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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아침'과 '날개'작가의 고향 2022. 3. 28. 07:04
아침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肺壁)에 끄름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어오기도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한 결론 위에 아침 햇살이 자세히 적힌다. 영원히 그 코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이상(李箱)은 1910년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태어났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 고급주택가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날 때부터 모던보이였던 셈이다. 그러나 부자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살았는데 구한말 황실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던 아버지 김연창이 손가락이 절단되어 퇴직한 후로는 가난과 친근해졌다. 이에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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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작가의 고향 2022. 3. 27. 23:0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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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풀작가의 고향 2022. 3. 26. 01:40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작년에 탄생 100년을 맞는 김수영(1921~1968)의 사후에 발표된 그의 마지막 시이다. 그래서 그런지 '풀'은 자주 조명되며 시험문제로도 단골로 출제된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풀은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은 그 민중을 억압하고 굴복시키려는 부당한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감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일 시험문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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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삶작가의 고향 2021. 5. 23. 01:09
내가 춘원(春園)의 문학을 처음 접한 건 책이 아니라 영화로였다. 그 1976년 영화 을 지금도 기억한다. 특히 주인공 최석(남궁원 분)이 눈 덮인 시베리아 평원(사실은 일본 홋카이도였지만)을 헤매다 얼어 죽는 장면이 또렸한데, 고등학교 때 본 그 영화를 여태껏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정임(한유정 분) 역을 했던 배우가 나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그 첫사랑의 열병은 1978년 영화 의 여주인공 배우 이화시에게로 슬그머니 옮겨간다. 춘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은 김기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1978년도 영화인데, 얼마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 선생이 헌사를 아끼지 않았던 바로 그 감독이다. 연출력까지는 인지되지 않았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는 기억에 담겨 있으니 까치밥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