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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대보단 / 1907년까지 명나라 황제를 모신 정신 나간 조선왕조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9. 14. 22:11

     

    창덕궁의 후원이 개방된 지 오래지만 관람은 제한적이다. 개방 장소도 그때그때 다른 지 올봄에는 옥류천 일대까지 볼 수 있었으나 지난 8월에 갔을 때는 옥류천 일대는 갈 수가 없어 취한정·소요정·어정·청의정·태극정 등은 보지 못하고 와야 했다. 사실 그곳이 후원의 백미인데 말이다. 하지만 전에 보지 못했던 연경당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민가 형식으로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궐도와는 모양이 너무 다르다. (따라서 맞지 않는 소리 같다)  

     

     

    애련지와 애련정
    기오헌
    운경거
    관람정
    관람정 파초잎 현판
    관람정과 승재정
    승재정
    존덕정과 지당
    존덕정 천장 장식과 정조가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현판
    존덕정과 폄우사
    폄우사
    연경당 사랑채
    연경당 안채

     

    그런데 창덕궁 후원의 개방 이래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지역이 있다. 대보단(大報壇) 지역이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준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은덕을 기려 세운 제단으로 1705년(숙종 30) 12월 숙종이 뜬금없이 만들었다. <숙종실록>에 묘사된 모양새는 다음과 같다. 

     

    (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세웠다. 단의 제도는 좌의정 이여(李畬)의 말에 따라 우리나라 사직의 제도를 모방하여 유(壝, 제단 둘레에 낮게 쌓은 담) 있고 장(墻)이 있는데, 담장 높이는 4척으로서 사직단에 비하여 1척이 높고 사방 넓이가 25척이며 네 면에 모두 9급의 층계가 있었다. 유(壝)와 장(墻)의 네 면은 모두 37척이요, 단소(壇所)로부터 외장(外牆)을 쌓아 행인(行人)이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대보단이 모방하였다는 서울 사직단
    동궐도 속 인정전과 대보단
    동궐도 대보단

     

    이후 숙종은 신종의 제사를 빠짐없이 모셨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와 건국 초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힌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를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정조는 명나라 3명의 황제의 신하들까지 추가해 배향하게 하였으니, 신종의 신하로는 이여송, 의종의 신하로는 범경문, 홍무제의 신하로는 서달이 채택됐다.

     

    영조는 제례 때 신하들도 전원 참석하게 했고, 정조는 더 나아나 무인 및 성균관 유생들에게까지 제사 참석을 의무화했다. 불참한 관료들은 처벌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은 한시적으로 과거 응시자격이 제한됐다. 명나라는 이미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지 한참되었음에도 조선의 썩은 대가리들은 여전히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이어갔던  것인데, 이 어처구니 제례는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즉위 초인 1871년, 고종은 창덕궁 대보단에 나아가 "혁혁한 황제의 은혜가 수백 년 내려오니  우리 가문 대의(大義)는 해처럼 빛나네"(‘於赫皇恩幾百年 我家大義昭如日)라고 읊었다. 정조가 1792년 대보단 망배례 때 읊은 '우리 가문의 법'(我家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표현이었다.  고종의 대보단 제사는 갑오개혁(1894~1895) 무렵 일본이 제지하며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아주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내고 돌아온 고종은 황제의 나라를 세울 궁리를 실천에 옮기는데,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대한제국이 명나라를 계승한 황제의 나라라는 것을 천명한 일이었다. 즉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급조된 환구단(혹은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의 황제 위에 오르면서도 그 대한제국이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250년 전에 망한 명나라를 잇는 나라임을 대내외에 알린 것인데, 그러면서 또 대보단에 나아가 명나라 귀신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그간 조선의 왕들은 위에서 말한 사직단에 나아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 지냈을 뿐, 하늘에 대한 천제(天祭)는 올릴 수 없었다. 고종이 환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냄은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명나라에 대한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전에는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이었으므로 감히 명나라를 이을 수 없었으나 이제 대등한 황제국이 되었으므로 중국의 적통인 명나라를 계승하는 명실상부한 황제국이 되었음을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97년 급조된 환구단
    지금은 위패가 안치된 황궁우만 남아 있다.

     

    이것은 그간의 존명의리(尊明義理)보다는 그저 그간 면면히 이어져왔던 소(小)중화주의를 만천하에 피력한 것으로서, 그간 조선이 그만큼 주자 성리학과 소(小)중화주의에 절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고종은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라 매우 자랑스러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조에 대해 그간의 왕들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명나라 망국 후에 세워진 이 땅 대부분의 사대부 묘표는 '유명조선(有明朝鮮)'의 문구로서 시작되었다. '명나라 속국 조선'의 어떠 어떠한 벼슬을 지낸 아무개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는 왕족 은언군의 묘표

     

    고종에 이어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된 순종은 대보단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일본의 간섭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보단의 제사는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함께 끝이 났고 대보단은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에 의해 훼철되었다. 다만 그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다래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다. 아열대지방이 원산인 다래나무의 열매 다래는 서양의 키위와 비슷하게 생겼다. 

     

    창덕궁 대보단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니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한 나무이다. 높이 19m, 가슴높이의 둘레 1.04㎝이며,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나갔는데, 특별히 의지할 데가 없어 받침대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아래 사진) 대보단 다래나무는 국내에 있는 것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써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다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창덕궁 대보단 다래나무

     

    고종이 대명국(大明國)의 계승을 선언한 환구단도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집어삼킨 후 성공적 합병과 통치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시정 5년 기념공진회'의 경복궁 개최를 계획했는데, 이에 필요한 숙박시설의 마련을 위해 1913년 3월 15일 환구단을 헐고 호텔 건립에 들어갔다. 이것이 조선철도호텔로 지금은 그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서 있다. 다만, 위폐의 보존 용도로 지었던 황궁우와 황제즉위 기념물인 석고(石鼓)는 살아 남았다.

     

    석고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환구단에 설치한 돌 북으로, 매우 빼어난 조각품이다. 석고는 제천의식(祭天儀式) 의식을 포괄하는 상징물로써, 몸체에는 화려한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광화문 옆 해치를 조각한 석공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석고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던 석고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장충동 박문각으로 옮겨졌다가 해방을 맞았다.

     

    석고각은 조선의 마지막 대목장이라 불렸던 목수 심선석(沈宣碩)의 솜씨이다. 이 석고각은 일제강점기 <대한매일신보>가 국보적인 조선의 대표 건물축이라 칭송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특히 곡선 두공(枓栱, 공포)의 미려함으로 유명했던 이 건물은 적어도 1960년 2월까지 존재했으나, 이후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선철도호텔
    조선철도호텔 후원의 황궁우
    환구단 석고
    석고와 석고각 계단
    장충동에 있던 석고각 / 1960년 2월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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