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전설과 진실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4. 1. 6. 21:40
2024년 용의 해라고 해서 양평 용문사에 걸음해 봤다. 용문사는 앞서 말한 수종사와 더불어 양평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두 사찰 모두 거의 10년 만의 방문이다. 그리고 두 절에서 모두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옛 모습과 크게 변함없는 데서 오는 느낌이니, 예전의 고졸함을 견지하고 있음이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여겨진다. 요즘은 하도 많은 절들이 뽀샵질을 해대고 있고, 그중 어떤 절은 마치 성형중독에 걸린 인간처럼 고치고 또 고쳐 아예 옛 모습을 상실한 예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양평은 과거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충절의 땅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아래의 구한말 의병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의 프레더릭 매켄지(F. A. Mckenzie)가 1907년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조우한 의병들을 촬영한 것이다. 그는 이 사진을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자신의 저술에 실음으로써 유일한 의병 사진으로 남게 됐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용문사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용문사는 이후 의병의 근거지로 쓰일 것을 염려한 일제에 의해서 방화됐고, 향후 복원된 당우마저 한국전쟁 중 소실돼 현재의 목조건축물은 모두 신축된 것이다. 1953년 5월에 일어난 용문산 지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국군이 중공군에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로써 청사에 빛난다. 용문산 지구 전투를 수행했던 국군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중공군은 3개 사단 2만 명의 병력이 궤멸당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는 이와 같은 전란 중에서도 끄떡없이 살아 남아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높이 41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는 동서 28m, 남북 29m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1100년으로 알려졌는데, 10년 전에 왔을 때도 1100년이었으니 1110년이 정확한 나이이련가?
수령이 유구한 만큼 전설도 여러 버전이 전한다. 대표적인 것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 태자는 마의, 곧 삼베옷 하나만을 걸치고 길을 떠났다)가 금강산 가는 길에 나무를 심은 것이 (혹은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설이다. 935년 10월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할 것을 결정하자 장자인 마의태자(이름은 전하지 않는다)는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들어주는 자가 없었다. 이에 인생무상을 느낀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아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사(王師)였던 대경대사를 찾아왔다 심은 것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버전도 전하지만, 의상대사의 이야기는 수령과 맞지 않으니 탈락시켜도 무방할 듯싶다. (의상이 입적한 연도 700 + 수령 1100 = 1900년이므로 차이가 심하다)
이상의 이야기 중에서는, 망국의 설움이 담긴 마의태자 버전이 가장 그럴싸하지만, 금강산이 목적지였다면 동해안을 따라가면 되지 왜 힘들게 양평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쪽을 찾자면 경순왕이 자신의 스승인 대경대사를 찾아왔다가 심었다는, 그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설이 급부상하게 되는데, 그 대경대사의 탑비가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존재한다.
용문산 은행나무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은 나라의 큰일이 일어났을 때, 이 나무가 기이한 소리를 내 알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큰일이라는 것이 뭔가 알아보았더니 1919년 고종이 승하했을 때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흔들어 울다 큰 가지가 하나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발발시에도 나무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 전설들은 가치가 전혀 없다.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은 이후 덕수궁에서 일본의 지원금으로 편히 살다 죽었는데, 덕수궁 이태왕 시절 수많은 나인들을 건드려 덕혜옹주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늙어 생산한 아이라 그런지 덕혜옹주 외는 대부분 영아사망함) 부패와 무능으로 망국의 길을 제공한 고종은 퇴위 후에도 일말의 반성이나 회한 없이 나인들 품 속에서 희희낙락하며 천수를 누리다 편히 죽었다. (향년 66세)
항간에는 일제의 독살설도 있으나 이런 왕을 죽일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종이 독살되었거나 혹은 용문산 은행나무가 울다 가지가 부러졌다 하는 것은 사정을 잘 모르는 세간에서 지어낸 헛소문일 뿐이다. 6·25전쟁 발발시에 나무가 울었을 수는 있겠으나 8·15광복에 나무가 울 이유는 또한 없다.
용문산의병을 축출한 일본군이 나무에 톱을 댔더니 피가 흘러 놀라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의외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더 오래된 이야기를 하자면 중국 삼국시대, 위왕(魏王) 조조는 낙양에 새 궁궐을 짓기 위해 약룡담(躍龍潭) 곁에 있는 거대한 신목(神木)을 벤다. 뒤탈을 꺼려 아무도 베려 하는 사람이 없기에 자신이 손수 칼을 들어 나무를 먼저 찍은 것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신목이라 불릴 만한 나무다. 그러나 최초의 칼을 내가 먼저 들겠다. 만일 이 나무에 정령이 있다면 내가 다칠 것이니라."
조조는 늘 이렇듯 솔선수범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조조가 칼로 나무를 찍었을 때 나무에서 피 같은 수액이 솟았다. 사람들이 크게 놀랐지만 동티는 조조에게 닥치리라는 생각에 나무를 베어 넘어 뜨렸다. 그리고 정말로 조조에게 횡액이 닥쳤으니 그는 곧 병을 얻어 눕게 된다.
명의 화타의 말에 의하면 조조는 당시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이에 화타는 마폐탕을 먹고 전신마취 상태에 이르렀을 때 두개골을 절개하여 종양을 제거시키는 뇌수술을 권하지만 조조가 이를 받아들일 리 없을 터, 이로 인해 화타는 오히려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 얼마 후 조조는 숨을 거두었으니 뇌종양+신목을 벤 심인성(心因性) 질병까지 겹쳐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용문산 은행나무를 자르려던 일본군은 짙은 나무 수액에 놀라 바로 톱질을 멈추었던 바, 필시 그는 살았으리라 본다.'전설 따라 삼백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주 동이마을과 광주 펭귄마을 (28) 2024.03.04 서울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ㅡ 조말생 묘가 있는 석실마을 (19) 2024.02.03 전설이 된 이소룡과 법주사 팔상전 (1) 2023.09.01 종의 기원 (V) ㅡ 금강산 유점사 종과 강원도아리랑 (0) 2023.06.23 이한치열(以寒治熱)-추운 나라에 사는 귀신 이야기 (3) 2023.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