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서울 남영동(南營洞)은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남영(南營)이 있는 곳에서 유래되었다는 항간의 속설을 믿어왔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굳어졌다. 최근 스텝 바이 스텝으로 후암·갈월·청파·동자·남영동을 둘러보며 훈련도감 남영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전혀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훈련도감의 남영은 사실 문헌상으로도 근거가 박약하다.
훈련도감의 본영은 새문[新門]안, 현 구세군회관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정작 군사들의 훈련은 그곳에서 행해진 적이 없었다. 국초(國初)부터 새문안 부근에는 태종의 최측근인 이숙번 등의 권세가가 살고 있었고 이후로도 권신과 왕족들의 거처가 운집해 있는 곳이라 함부로 총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이에 훈련은 서대문 밖 모화관(현 서대문독립공원) 앞에서 이루어졌던 바, 남쪽 군영과의 연관성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남영동의 유래에는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일제는 1904년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러일전쟁의 개전에 앞서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는 겉으로는 양국 간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전쟁 중 조선의 영토를 마음대로 군사용지로 전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인받은 조약으로서, 그 핵심적 권리가 명시된 조약문 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시에는 일본 정부는 임기(아무 때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데, 이때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제공해야 하며, 일본 정부는 전항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수용해 사용할 수 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러일전쟁 직전 용산역과 용산조차장을 건설해 경의선을 통한 만주(滿州)로의 군대와 물자 보급을 꾀했다. 그리고 용산역 근방에 일본군을 주군시켰는데, 이것이 한성의 남쪽에 있는 진영이라 하여 통칭 남영(南營)으로 불려졌다. 이후 일제는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후 1908년 용산 둔지산(屯之山) 일대에 조선군사령부를 설립했다. 용산의 조선군사령부는 한반도 지배보다는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기지로서 둔지산은 왜둔산(倭屯山)이 되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불렸다. 더불어 이곳에 살던 한국인은 내쫓겼으며 일대는 2개 사단급의 일본군대가 주둔했다. 면적은 약 255만㎡로 축구장 340개의 크기이다. 주변에는 각종 보급 시설이 들어섰는데, 일제강점기의 건물이 지금껏 사용되고 있는 용산구 문배동의 오리온 제과 공장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서울 용산구 백범로 90다길에 본사를 둔 오리온 제과의 모태는 풍국제과로서 만주의 일본군에게 공급할 과자를 생산할 목적으로 설립했다. 풍국제과의 생산품은 내수도 있었지만 대부분 용산역에서 집하돼 조선군사령부의 병력과 함께 경의선을 타고 만주로 이송됐다. 기타 영강제과, 경성제과, 장곡제과, 궁본제과, 대서제과, 기린제과, 조선제과의 제과회사가 남영동, 갈월동, 후암동 등의 용산 지역에 설립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모두 일제강점기에 군납을 목적으로 탄생한 업체인 것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남영동 영강제과는 해방 후 해태제과의 모태가 되었다. 해태는 해태 타이거스라는 명문 프로야구팀을 둘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을 꾀하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분해되었고, 해태그룹의 알짜배기였던 해태제과는 외국 기업사냥꾼에게 팔렸다가 2005년 크라운제과에 인수되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3대 제과업체인, 오리온, 롯데, 크라운이 모두 남영역 부근에 위치한다.
롯데와 크라운 제과 건물이 남영역 부근에 지척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오리온 제과 본사는 남쪽의 욱천 고가차도 부근에 위치한다. 옛 풍국제과의 본사가 있던 곳이다. 욱천 고가차도는 용산전자상가에서 원효대교로 넘어가는 고가차도인데, 청계 고가차도 · 삼일 고가차도 · 아현 고가차도도 모두 철거된 마당에 욱천 고가차도가 존속하는 것도 놀랍지만, 욱천이란 이름은 더더욱 놀랍다. 욱천(旭川)은 지금의 복개된 만초천을 이르던 일본말로 '아사히 가와'라고 읽힌다. 그리고 그 욱천 위에 놓였던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의 교명주(橋名柱, 다리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도 지금껏 남아 있다. 조선주둔군 20사단 보병 17연대 병영 입구에 놓였던 그 다리의 이름 '코바야카와'는 임진왜란때의 선봉장 가운데 한 명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서 비롯됐다. 그는 벽제관전투에서 명나라 이여송의 부대를 박살 내 명나라 군대를 다시 북쪽을 내몰았으나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에게 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