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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V - 겨레를 깨운 김상옥의 총소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31. 04:29

     
    지난 1월 22일은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작년에 이어 김상옥 의사를 조명하고자 자료를 모았으나 전쟁기념관에서 개최 중인 '김상옥 의사 일 대 천(1 : 1000) 항일 서울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 특별전' 관람마저 차일피일하다 결국 망각하고 말았다. 그러다 지난 토요일 동촌(東村)  나드리를 왔다가 연동교회 벽에 걸린 김상옥 의사 기념 특별전의 대형 포스터를 보고 퍼뜩 정신이 들어 급히 효제동으로 발길을 틀었다. 
     
     

    연동교회에 걸린 대형 현수막 포스터
    ' 김상옥 의사 일 대 천 항일 서울 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 특별전 '김상옥 겨레를 깨우다' 포스터

     
    가장 먼저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라고 쓰여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다음의 글과 첫 대면을 하였다. 
     
    3.1운동 100주녀을 맞아 이 정류장 이름을 "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로 병기합니다. 
     
    의열단원 김상옥은 효제동에서 나고 자라서 세상을 떠난 서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온 김상옥은 이곳 효제동에서 삼중으로 포위한 일제 군경 1천여 명과 3시간 반에 걸친 단독대첩(單獨大捷)을 치르면서 16명을 거꾸러뜨린 뒤 마지막 한 발은 자기 몸에 발사하여 뜻을 꺾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상옥의 몸에는 11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 버스정류장

     
    그리고 나름대로의 고증을 거쳐 찾아낸 김상옥 생가를 다시 찾아갔는데  아래의 셧터 내려진 건물이다. 물론 이 집은 김상옥의 생가에 훗날 지어진 건물이긴 하나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주 오랜 기간 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조적조의 집은 그가 마지막에 피신했던 이혜수의 집이다. 이곳 역시 고가(古家)였을 터인데, 당시는 주택가가 아니라 6채의 집이 배추밭 가운데 있었다.
     
     

    효제동 김상옥이 태어난 장소 / 현주소는 대학로 36-8이다.
    어릴 적 친구이자 동지였던 이혜수의 집

     
    그리고 아래 골목은 일본경찰들과 그 유명한 1:1000의 총격전이 벌어진 순국 장소이나, 태어난 곳도 순국한 곳도 여전히 아무런 표식이 없고, 전에 없던 "쓰레기 무단 투기는 양심을 버리는 행동이다"라는 푯말만이 생겨났다. (촬영할 때 애써 피했으나 주변 쓰레기가 장난 아니다)  당시 골목 오른쪽 집들은 없었고 왼쪽 붉은 벽돌담과  회벽 사이에 좁은 골목이 있었는데, 김상옥은 그 골목에 있는 변소에 숨어 격전을 벌이다 숨졌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곳

     
    이튿날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을 찾았다. 획기적인 자료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세세하고 조밀하게 삶을 압축해 전시한 관계로 전에 모르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그가 동대문교회를 다니던 크리스찬이었다는 것과, 3.1만세운동 당시 조선여학생을 뒤쫓던 헌병을 제압한 후 의사께서 노획한 칼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의 국내 독립운동이 <매일신보>에 실렸다는 사실 등은 몰랐던 일이다.
     
    전시는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시작된다.   
     
     

     
    자각. 가난의 사슬을 끊고.
     
    188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이 맞딱뜨린 삶의 첫 모습은 가난이었다. 8살의 나이에 말총으로 곡식 따위를 걸러내는 '체'를 만들어 살아가야 하는, 저물어가는 나라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하지만 10대의 나이에 일터로 삼은 대장간에서 배운 한문은, 아니 무언가를 배워가는 기쁨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가까운 동대문교회에 나가 새로운 사상과 문물과 종교를 흡수한 그는 야학을 통해 배움을 더하고, YMCA 영어반을 수학하며 유학의 꿈을 꾸는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동대문교회 앞에 작은 서점을 차려 돈을 벌어보려던 계획이 수월치 않자 그는 전국으로 행상을 나섰다. 적지 않은 수입이 모이자 형제들과 상의해 영덕철물점을 개업했고 사업은 승승장구해 인근에서 유일한 2층짜리 사업장으로 성장했다. 
     
    풀무질을 하던 소년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50명의 종업원을 둔 어엿한 청년사업가로 성장했다. 곤란이 닥칠 때마다 다음을 생각하며 걸음을 내딛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에게 가난은, 그저 성장의 동력이 되었을 뿐이었다. 
     
     

     
    김상옥 의사 노획 일본도
     
    3월 1일 일찍부터 만세시위에 참여한 이후 일몰 무렵 자신이 경영하던 영덕철물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던 김상옥 의사는 일본 헌병 하나가 칼을 빼어 들고 한 여학생을 뒤쫓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에 분개한 의사는 헌병을 제압하고 발길질을 하니 타고난 의사의 완력에 헌병은 현장에서 급히 도망쳤다. 
     
    길바닥에 떨어진 칼을 들고 의사 역시 현장을 빠져나왔는데 동지 유인원에게 건네져 파주군 금촌리에 보관되었다가 1947년 김상옥 의사 24주기에 그의 아들 김태윤에게 전달되었다. 6.25전쟁에 학병으로 참전한 김태운씨는 출전 길에 창신동 집 뜰에 이를 묻어두었다가 전후 이를 다시 파내 보관하였고 독립기념관이 설립되자 1984년 기증하였다. 
     
     

    초기 동대문교회 모습

     
    부언하자면, 1890년 서울 종로의 한 가정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김상옥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며 가계를 도와야 했다. 그는 14세 때, 당시 나이로서는 힘들 법한 철공소에 들어갔으나 빠른 적응으로 스무 살 무렵에는 50여 명의 직원을 둔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해 3.1운동이 일어나며 인생이 바뀌게 되니, 만세현장에서 일제의 총칼에 희생된 동포들을 목격한 그는 나머지 생을 조선의 독립에 쓰기로 마음먹는다. 
     
     

    효제초등학교 앞의 '순국선열 김상옥 의사비' / 1906~1908 수학했다고 쓰여 있다.
    김상옥이 다닌 효제초등학교

     
    이에 청년 지성들(박로영,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정설교, 전우진, 이혜수 등)을 규합한 그는 '혁신단'이라는 독립결사단체를 만들었다. 이후 사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하니, 사업에서 번 돈으로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고, 동지들과 함께 등사판 지하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조선민족의 해외 독립운동 상황 등을 세상에 알렸다. 아울러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며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결국 체포돼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갖은 고문을 당한다. 그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지만 온몸이 곪아 터져 피고름이 흐를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김상옥이 발행한「혁신공보」
    제철공 김상옥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도된「매일신보」기사 / 전쟁기념관 전시물

     
    이후 그는 지금과 같은 미온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투쟁을 결심하니, 1920년 4월 북로군정서 독립군 출신의 김동순 및 윤익중, 한훈, 서대순 등과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의 살해와 주요 기관 파괴를 모의했으나 미국 국회의원의 방한 시기에 맞춘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이 거사 하루 전날, 김동순과 한훈이 일경(日警) 밀정의 신고로 체포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김상옥도 이때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그 와중에도 홀로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그해 10월 한국을 벗어나 중국 상해로 탈출했다. 그는 그곳에서 김구, 이동휘, 조소앙 등을 만났고, 자신의 성격에 맞는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다. 그리고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을 지원받아 서울에 잠입,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피신한다.
     
     

    당시의 종로거리 / 왼쪽에 있는 건물이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이고 그 옆 큰 건물이 YMCA다. 옛 종로경찰서 건물 앞에 아래의 표지판이 세워졌다.
    종로 김상옥 의거 터 표석

     
    일경은 범인 색출에 당연히 혈안이 되어 설쳐댔지만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낸 게 없었는데, 그러던 중 어떤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던 제 오빠에게 제보 하나를 했다. 자신의 세 살고 있는 주인집에 수상한 자가 숨어 있다는 것으로서, 매부 고봉근의 삼판통(三坂通, 후암동) 자택에 은신하며 사이토 총독 암살을 모도하던 김상옥의 존재는 그렇게 드러났다. 그는 사이토가 일본 국회 참석을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이토 암살을 위해 후암동에 머무르던 차였다.
     
    이에 1월 17일 새벽, 일경 20명이 후암동 고봉근의 집을 포위하고 김상옥 체포를 기도했으나 포위를 좁혀가던 순간, 집안에서 김상옥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에 곧 고봉근의 집 앞에서는 일대 총격적이 벌어졌다. 결과는 일경 유도사범이자 순사부장인 다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즉사,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는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종로경찰서 경찰들이 사살돤 사실을 보도한「독립신문」
    다무리 형사가 죽은 삼판통 집 / 「동아일보」1923년 3월 15일자 기사 속 시진
    총격전이 벌어졌던 후암동 304번지 집

     
    일본경찰들이 총상으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김상옥은 지붕으로 올라가 육혈포 발포와 함께 이리저리 건너뛰며 포위망을 뚫었다. 그 후 곧장 남산으로 올라가 장충단 솔숲을 경우해 왕십리 산비탈 쪽으로 넘어왔다. 그는 그 과정에서 눈밭에 미끄러지며 가지고 있던 권총 3정 중 1정을 분실한다. (이 총은 그 후 이만길이라는 자가 우연히 습득해  종로경찰서로 들어간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남산을 넘으며 수없이 미끄러지고 자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맨발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여하히 남산을 넘은 그는 왕십리 무학봉(無學峰) 아래에 있는 작은 절 안정사(安定寺)를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김상옥은 일본경찰 사살 후 바로 뒤 남산으로 도주한다.

     
    김상옥은 탈출 과정이 급박했던지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신발조차 신지 못했다. 다만 권총 3자루와 총알만은 챙겨 왔는데 그것을 우선 숲에 숨기고 주지스님에게는 노름을 하다 발각되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거짓말로써 하룻밤을 신세 졌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짚신 한 켤레와 털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그곳을 나왔다. 그는 그러면서도 지독한 조심성을 보였으니 혹시라도 추적이 있을까 싶어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밭에 찍히는 행선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김상옥이 사용한 총으로 짐작되는 S&amp;W M2 리볼버와 브라우닝 자동권총 / 전쟁기념관 전시물
    성동구 하왕십리동 KCC스위첸아파트 내의 안정사 터
    감상옥은 안정사 뒤 무학봉을 넘어 창신동으로 도망친다.

     
    그는 다음날인 19일 저녁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보내고, 이튿날 아침 모친이 살고 있는 창신동 마을로 가 어머니를 잠깐 뵈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하직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하루를 쉬었다는 말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효제동에 있는 이태성의 집으로 갔다. 그곳은 그가 태어난 효제동 72번지 바로 옆집으로 어린 시절부터의 동무이자 혁신단 동지인 이혜수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집에서 손발의 동상을 치료하며 이혜수 등과 함께 또 다른 거사를 계획했다. 
     
     

    김상옥의 친구이자 동지인 이혜수

     
    하지만 그곳도 안전한 도피처는 못되었다. 김상옥 체포 작전의 일환으로써 피체된 옛 동지 전우진은 심한 고문 끝에 그가 숨을 만한 데를 몇 곳 일러주었는데, 그 가운데 이태성의 집이 있었다. 이에 1월 22일 새벽 3시, 경성 전역에서 동원된 약 1000명의 군경이 효제동 일대를 완전 포위하고 김상옥 체포에 들어갔다. 잠결에 들이닥친 일경에 도망칠 새도 없었던 그는 다락 비슷한 조그만 벽장 속에 들어가 솜이불로 앞을 막고 숨었다. 일경 중의 첫 사망자는 벽장문을 열었던 구리다 경부였다. 그 첫 발을 시작으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두꺼운 솜이불을 보호막 삼아 보이는 적들을 향해 쌍권총을 갈겨댔는데, 과거 의열단 시절, 10발을 쏘면 8발 이상을 과녁에 명중시켰던 명사수였던 바, 그 사격 솜씨에 군경들이 하나 둘 쓰러져나갔다. 그러자 군경들이 잠시 주춤했고 그 사이 뒷담을 넘어 옆집으로 들어갔다.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다시 골목골목과 다섯 집(효제동 72,73,74,74,76-2번지)을 넘나들며 총을 쏘아댔는데, 압권은 골목에 숨어 사격하는 그를 저격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갔던 경찰 2명이 김상옥의 총을 맞고 굴러 떨어진 일이었다. 그와 같은 총격전이 무려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일경 16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렇게 수백 발의 총을 쏜 그는 마지막 총알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았다.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눈을 뜬 채 죽었다고 한다.(향년 34세) 그래서 일경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무서워 가까이 가지 못했으며 주검은 골목에 뉘어진 그대로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생가인 72번지와 옆집인 76-2번지 사이 골목길이었다. 그의 주검에서는 무려 11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시신은 1월 26일 아침 장례절차를 마치고 이문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지는 지금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상옥 의사 순국장소 / 정확히는 오토바이 끝 붉은 벽돌담과 회벽 사이 골목이다. 골목은 지금 사라졌다.
    순국장소 앞쪽의 김상옥로
    1922년 상하이를 떠나기 직전 찍은 마지막 사진
    1922년 상하이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동지와 나눈 대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효제초등학교 앞에 위의 유언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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