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종황제의 맏손주 모모야마 켄이치 & 관훈동 사동궁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 15. 00:51

     

    앞서 '조선왕조 마지막 손(孫)이 묻힌 회인원(懷仁園)과 바이레셜리즘(혼혈주의)'를 말하며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의 사망과 함께 영친왕의 후손은 완전히 멸절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 글에서 밝혔듯, 당시 순종은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순종은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 고종의 후처 격인 엄귀비에게서 난 영친왕이 황태자로서 대를 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대(代)인 이구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황통(皇統) 및 영친왕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남양주 이구의 묘

     

    그렇다면 이것으로써 조선왕조의 후손은 끊기게 된 것일까? ㅎㅎ 절대 그럴 리 없다. 고종의 맏아들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려 13남 9녀를 두었으니 대가 끊길 리는 만무했는데, 그중의 맏이가 오늘 말하려는 모모야마 켄이치(桃山虔一)이다. 그에게는 분명 건()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으나 일본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그가 훗날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첫째 부인도 둘째 부인도 모두 일본인이다. 한마디로 민족정신이라고는 1도 없는 놈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안타까운 사연이 숨어 있다.

     

     

    고종의 후손들
    이진의 무덤인 청량리 숭인원

     

    한 신문에서 빌려온 위 황실 가계도에 나오는 영친왕의 자식인 이진과 이구는 모두 후사 없이 죽었다.(이진은 영아 사망) 그리고 의친왕은 이석 씨 등 13남 9녀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의친왕의 맏이를 이석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그는 10남으로 한참 밑이다. 그럼에도 위 가계도에서 이석을 내세운 이유는 필시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려니, 연세가 조금 드신 분들은 <비둘기 집>이라는 가요를 부른 가수로 기억할 것이고, 전주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를 역임한 까닭에 교수로 기억하는 젊은 층도 있을 것이다. 

     

     

    이석(李錫, 1941~생존)

     

    의친왕의 맏이는 위에서 말한 이건으로, 1919년 의친왕의 측실인 수관당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건, 즉 모야마 켄이치를 말하기 앞서 그의 아버지 이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싶으니, 이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 순종에 앞서 태어났다. (맏아들 완화군은 1880년 11살 때 죽었다. 그리고 2남과 4남 역시 유아 사망해 셋째 아들로 칭해지기도 한다) 고종의 맏아들 완화군은 1868년, 고종이 16살 때 그보다 9살 연상이었던 궁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때 이미 고종은 민왕후와 가례를 올렸을 때이므로, 고종은 이때부터 찍혀 평생을 끌려다니게 된다. 

     

     

    그 무렵에 찍은 사진 / 1867년경에 찍은 현재까지 유일한 명성황후 건판 사진이다.(한미사진 미술관 소장. 16.3 x 10.7cm)

     

    이강은 1877년, 궁녀 장씨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장씨 역시 민왕후에게 찍혀 궁밖으로 내쳐졌다. 장씨는 동호 두모포(성동구 옥수동) 근방에서 살다 사망했으며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됐다. 이강은 1891년 의화군으로 봉해졌고 1892년 궁궐로 들어와 이듬해 김사준의 딸 김수덕과 가례를 올렸다. 이강은 대한제국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뜻을 둔 사람으로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양주 홍유릉 후궁 묘역의 귀인 장씨 묘

     

    그는 계획을 실천하여 상하이로 가던 중 11월 만주 안동(현재의 단둥시)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었다. 여기까지는 진실이나 독립운동에 얼마나 진정이었는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그는 처첩에게서 13남 9녀를 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그렇고 그밖에 혼외 자식이 6~7명 더 있었다. 첩만 18명이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난봉꾼이었으며 얼마나 무절제한 인간이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의친왕의 부인과 자식들

     

    의친왕은 어릴 때부터 난봉꾼으로 미국 유학시절(버지니어 로노크 칼리지에서 경제학 전공)에도 낭비벽이 심했으며 미국 여성 3명과도 염문을 뿌린 적이 있다. 게다가 왕족임을 담보로 하여 여기저기서 빚을 내 엄청난 금액의 돈을 유흥비로 탕진했는데, 결국은 상하이 망명 사건을 구실로 공족(公族, 일본이 만든 조선의 귀족계급)의 특권과 직위를 빼앗긴 후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 일대의 사동궁(寺洞宮)에 유폐되었다.

     

    사동궁은 양관(洋館)과 한옥이 어우러진 수천 평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해방 이후 각각의 건물은 건물대로, 필지는 필지대로 조각조각 나뉘어 공중분해되었다.(1947년) 그리하여 양관 건물은 종로예식장으로 쓰이다 이후 재수명문 종로학원이 들어섰고, 의친왕비가 거처하던 안채인 지밀(至密)은 1955년 요정 ‘도원’(桃園)으로 변해 일본 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되었다가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의 성매매 단속에 걸려 영업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10개월 후 포클레인에 털려 철거되었다. (아무리 망한 나라의 잔재라지만 요정에다 철거라니 참으로 얄궂다)

     

    지밀이 있던 건물은 2005년 종로구청이 매입하여 철거 후 현재의 공영주차장을 만들었다. 지금 사동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종로학원 자리에 지어진 SK건설사옥 마당 흡연장소 부근의 큰 회화나무와 현재 인사동 홍보관으로 쓰이는 한 채의 한옥뿐이다.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
    사동궁 양관과 한옥
    관훈동 회화나무
    사동궁 양관은 해방 이후 종로예식장으로 쓰였고,
    사동궁 안채는 2005년 포클레인에 헐렸다.
    그 잠저(潛邸) 중의 한 채가 겨우 살아 남아
    현재 인사동 홍보관으로 쓰이고 있다.
    도정궁 경원당 / 사동궁, 죽동궁 등 왕이 살았거나 왕의 부모, 혹은 출가한 왕족이 살았던 '잠저'는 지금 남아 있는 게 없고
    건국대학교 내에 도정궁의 경원당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 사직동에 있던 덕흥대원군 사당채 건물을 옮겨왔다.
    안내문

     

    이건은 1909년 위에서 말한 종로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황족들이 모두 그러했듯 장교로 종군하였던 바, 1930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건은 이후 일본국적으로 생활하였으나 아버지 이강과 마찬가지로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중좌(중령) 계급으로 종전을 맞았으나 무국적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고, 이때 앞서 말한 1947년 GHQ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일본황족에 속했던 신분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때 모모야마 켄이치(桃山虔一)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일본에 눌러 살았으나 귀화는 하지 않았다.  

     

    GHQ의 조치와 함께 이건은 조선이나 일본황실에서의 지원이 모두 끊긴 무일푼의 평민이 되었다. 그는 22살 때인 1931년 황족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와 결혼했으나 세월이 하수상해지며 1951년 이혼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이혼은 하수상한 시절이 아니더라도 예견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결혼 후 곧 태어난 장남 이충(일본명 타다히사·忠久)은 자신의 친자가 아닌 요시코가 혼전에 사귀던 일본 귀족의 자식이었다. (이건은 이 사실을 전쟁 중 혈액검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혼 후 장남 타다히사와 막내 아키코(한국명 옥자)는 아내가 데려가고, 이건은 둘째 긴야(欣也/한국명 이기· 李沂)를 데리고 1952년에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와 재혼했다. 그러나 이때는 전후(戰後)의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절인지라 이건은 육군대학 시절 익혔던 독일어 실력으로 번역일로써 근근이 호구를 이었고, 아내 요시코 역시 생계지책으로 긴자의 클럽에 출입하게 되었다. 우리 식으로 보면 룸살롱 도우미가 된 것으로 이로 인해 부부 사이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결국 요시코는 클럽 일을 그만두고 부부는 시부야에 '모모야'(桃屋)이라는 단팥죽 가게를 열었다. 이후 그들 가족은 단팥죽과 산양젖을 팔며 겨우 생활을 영위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영친왕 이은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찾아갔다가 현실을 목격한 후 큰 충격을 받았으며, 더불어 자신들의 앞날 또한 걱정했다고 한다. 

     

    이건은 요시코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고 1955년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1990년에 시부야의 시영 임대아파트에서 사망했다. 그래도 자식들은 잘 키웠으니 두 딸은 무난히 출가했고, 아들인 모모야마 고야(孝哉)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하다 교감이 되었다는데, 예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괜시리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이건의 적모인 의친왕비 덕인당 김씨 / 원 안은 이건
    일본 군인 시절의 이건(李鍵)
    이건의 첫 부인 마츠다히라 요시코(松平佳子)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
    1960년대 찍은 사진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