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 마지막 손(孫)이 묻힌 회인원(懷仁園)과 바이레셜리즘(혼혈주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27. 05:04
2003년 영국 왕실의 해리 왕자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세상이 잠시 요동쳤다. (해리는 찰스와 다이아나 왕비의 아들로서 영국 왕위 서열 5위다) 상대는 메건 마클(Meghan Markle)이라는 미국인 여배우(actress)로 당시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었고 나이는 해리 왕자보다 3살이 많았으며 이혼경력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 대(代)로 올라가자 관심이 증폭되었다. 메건은 백인 아버지(토마스 마클)와 흑인 어머니(도리아 래글란드) 사이에서 태어난 이중인종적(biracial) 혈통이기 때문이었다. 영국 왕실로서는 이 유색인 예비 며느리가 당연히 탐탁지 않았겠으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지라 결국 결혼이 성사됐는데, 결혼식장에서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엘리자베스 여왕(올해 9월 8일 96세로 작고)의 사진을 앞서도 게재한 바 있다.
이후 메건 마클은 태어날 아기의 피부색에 대해 왕실 내에서 이야기가 오간 사실을 2021년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에서 공개해 다시 화제가 되었다. 마클은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이란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2019년 5월 태어난 아들 아치의 피부색을 이유로 왕실은 그를 왕자로 만들길 원치 않았다"며 “극단적 선택의 충동까지 느꼈다”고 심정을 밝힌 바 있다. 또 마클은 당시 "아들이 태어났을 때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지에 대한 우려의 대화가 오고 갔으며, 아기에게 왕자 칭호가 주어지지 않고 안전 조치 역시 보장되지 않을 것"이란 내용도 있다고 했다.
이어 영국 BBC는 이 사실을 집중 조명한 책 <엔드게임>의 네덜란드어판의 내용을 빌어 해리 왕자 부부의 첫 아기가 태어나기 전, 피부색에 관해 논의한 왕실 인사가 찰스 3세(현재 국왕이 됐다)와 왕세자빈 케이트 미들턴이라고 말해 또 한 번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는데, 왕실의 걱정이 딴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인종차별을 배격하는 세계적 분위기에는 역행하는 일이다. 지금은 혼혈을 뜻하는 mixed-blood나 half-blood라는 단어마저 퇴출되는 분위기로 biracial이라는 단어가 대세이다. 영어나 한국어(혹은 일본어)의 '혼혈'이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순혈'보다는 부정적이기에 대체 단어를 찾은 듯싶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와 같은 바이레셜리즘(biracialism)이 조선 왕실에서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대한제국이 망한 뒤라 왕조(王朝)는 사라졌지만 왕실은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존속됐다. 그중 영친왕의 아들 이왕세자(李王世子) 이구(李玖)는 영친왕계의 마지막 왕손인데(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배우자는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이었다.
MIT 건축과를 졸업한 이구는 1950년대 후반 뉴욕의 같은 직장인 아이엠 페이(I.M. Pei) 건축사무소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하던 줄리아를 만나 1958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이구는 27세, 줄리아는 35세로 8세 연상이었는데, 결혼식은 신부의 희망대로 우크라이나식으로 올렸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이구의 가계(家系)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는 고종의 손자로서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과 이방자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앞서 '윤동주의 참회록과 영휘원'에서 이왕가의 가계를 다룬 바 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영친왕 이은의 어머니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상궁 엄씨(1854~1911)로 천미한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인 엄진삼으로 종로 육의전에서 장사를 했으나 빈한했고, 집안의 가난에 쫓긴 엄씨는 궁녀로 입궐해 경복궁의 나인이 되었다. 이후 민왕후(명성황후)의 몸종 격인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1884년 서른한살 늦은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승은을 입은 궁녀는 치마를 둘러쓰고 방을 나오게 되는데, 그가 얼굴을 공개하는 순간 모든 나인들이 까무라쳤다. 주인공이 미인도 아닌 데다(까놓고 말하면 못 생긴 축이다) 뚱뚱하고 과년했던 상궁 엄씨인 까닭이었다. 엄상궁이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은 궐내를 경악시켰는데, 명성황후의 경우는 아예 믿으려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실임이 밝혀지자 민왕후는 자존심 스크래치+배신감 폭발로 분노의 매를 들어 다스린 후 궐 밖으로 내쳤다.
민왕후가 일본 무뢰배들에 의해 살해된 1896년의 을미사변은 엄상궁에게는 복이었다. 고종은 민왕후에 내쳐졌던 엄상궁을 민왕후가 죽은지 5일만에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고종은 이 같은 가벼움은 세간의 큰 빈축을 샀지만 두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던 말던 그간의 밀렸던 사랑을 불태웠으니 1년 후 영친왕 이은이 탄생했다. (엄상궁이 회임한 것이 아관파천 중의 아관, 즉 러시아공사관에서의 일이라는 데 더욱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이러니 일본이 고종을 얼마나 우습게 봤겠는가)
이은은 10살 때인 1907년(융희 1년) 왕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후궁 장씨와의 소생인 장남)을 제치고 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서 궁내 서열 3위가 된 엄상궁(이미 이 호칭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이 바싹 밀어붙였음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인데, 순헌황귀비는 1911년 유명을 달리해 청량리 영휘원에 묻히고, 아들인 이은은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의 딸 마사코(이방자)와 강제 혼인당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내내 금슬이 좋았다. 그래서 곧 아기(이진)가 태어났으나 영아사망하였고 두번 째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이구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구는 MIT 졸업 후 뉴욕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다 줄리아를 만난 결혼하게 되는데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 결혼까지 이어지는 로맨스가 마치 영화처럼 극적이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헝클어졌으니, 일제에 의해 일본 육군 중장으로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아버지 이은은 광복과 해방과 더불어 국적이 없는 무국적의 재일 한국인이 되었고, 아들인 이구 역시 신원이 애매해졌다.
※ 일본의 귀족제도는 1947년 GHQ(일본 점령 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해체되었고 일본황족에 속했던 이씨왕족의 신분 역시 사라지며 정부 지원도 끊어졌다. 아울러 이씨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도 해체되어 왕족들은 양쪽 모두 지원이 끊긴 무일푼 평민으로 전락했다. (그전까지 영친왕 이은은 일본 정부와 이왕직 양쪽으로부터 지원받아 일본 귀족들의 부러움을 샀고, 아들 이구의 미국 유학 역시 그와 같은 풍요 속에 이루어졌다. 지원이 끊기기 전까지 그들은 정말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광복 후 이들은 모두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지만 혹시라도 왕정복구의 움직임이 일어날까 염려한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입국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왕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박정희 정부는 이들의 국적을 회복시키고 한국에 데려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게 하였으니, 이은과 부인 이방자 여사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고, 이구와 줄리아 리도 부모의 희망에 좇아 한국으로 들어와 낙선재에서 살게 되었다. 이은은 1970년 5월 9일 72세로, 이방자는 1989년 4월 30일 87세의 나이로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아들 이구는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한 객실에서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여행 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활하다 죽은 것이었으니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이구 부부는 19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귀국해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함께 생활했다. 남편 이구는 건축가로 활동했고, 손재주가 좋았던 줄리아 리는 낙선재에 바느질 방을 만들고 시어머니와 함께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에서 의 장애인들의 기술교육을 시켰다.
다만 이구 부부는 불행히도 아이를 얻지 못했고 이방자 여사와도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아울러 이구는 낙선재 생활이 싫다며 밖으로 나가 홀로 호텔 생활을 했는데, 이 틈을 이용해 이씨 종친회에서 줄리아에게 이혼을 종용해댔다.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구실이었으나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였을 터였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용렬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도 바이레셜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풍토 속에서 살고 있는 마당에 당시 종친회의 행동을 탓하기는 힘들 듯하다.
줄리아는 결국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이래저래 한국이 싫어진 이구도 일본으로 가 생활하다 죽었다. 이구의 유해는 2005년 7월 20일 국내로 들어와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전주이씨 종친회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장례를 주관했으며 같은 전주이씨인 이해찬 총리가 영결식 조사(弔辭)를 했다. 당시 하와이에 있던 줄리아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초대받지 못해 먼발치에서 종묘의 노제와 장례행렬을 지켜봐야 했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이구의 장지는 이버지 이은의 무덤인 남양주 영원(英園) 옆 원소(園所, 원보다 격이 낮은 곳)에 마련됐고, 줄리아는 하와이 양로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조용히 살다가 지난 2017년 11월 26일 하와이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줄리아의 죽음은 열흘이 지난 12월 5일에 알려졌는데, 그녀의 임종을 낙선재 시절 입양한 딸 이은숙(미국명 지나 리)씨가 지켰다 함에도 국내에 소식이 더디 알려진 것을 보면 그녀와 한국과의 연(緣)은 1995년 출국과 함께 끝났던 듯싶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삿포로 신(新)치토세 공항에서 충돌한 고려와 거란 (3) 2024.01.17 용문사 스님의 시를 차운(次韻)한 월사 이정구 & 정지국사탑 (1) 2024.01.07 우리나라 최초 의사 박서양과 김필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4) 2023.12.23 오타니 탐험대와 돈황유물에 얽힌 비화 (1) 2023.12.21 서역의 약탈자 오타니 탐험대 (1) 202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