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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타니 탐험대와 돈황유물에 얽힌 비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21. 22:28

     

    오타니의 탐험대 조직에 가장 동기부여가 된 사람은 아무래도 오럴 스타인이었다. 영국의 인도총독부 고고학 조사부에서 근무하던 스타인은 1900~1901년 중국의 신강지역을 탐험한 데 이어 1902년 돈황에서 엄청난 양의 고대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들을 쓸어 영국으로 가져왔다. 일본 서(西)본원사 승려이자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의 신분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었던 오타니는 그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감춰졌던 고대  유물에 대한 경이를 너머 동양의 불교 미술품이 서양으로 마구 유출된다는 사실에 분개까지 하면서.

     

     

    마크 오렐 스타인(M. Aurel Stein, 1862~1943)
    스타인이 주로 털어간 돈황 천불동
    스타인이 털어간 것들

     

    사실 스타인은 그때 그의 최대 치적(?)이라 일컬어지는 돈황 천불동 장경동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페르시아학과 인도학을 전공하기는 했으되 한문을 알지 못했다. 까닭에 옥석의 가림 없이 눈에 띄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싣고 온 편인데, 그러함에도 워낙에 보고(寶庫)였던 지역들이라 그 양과 질이 대단했다. 게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스웨덴의 헤딘이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돌아와 약탈품들을 자랑했다. 런던에 온 헤딘을 직접 만난 오타니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헤딘은 1908년 조선에 와 종로 YMCA에서 강연도 했다)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
    헤딘의 탐험 루트

     

    오타니 탐험대는 '불교를 믿는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의 동점(東漸)루트를 밝히겠다'는 그럴듯한 슬로건 아래 조직됐지만, 그들 역시 서구 열강의 약탈자들과 다름없이 마구잡이 유물 수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오타니 탐험대는 오타니를 비롯한 대원들 전원이 영국유학파 학승(學僧)으로 이루어져 안목이 밝았고, 더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탐험이 이루어져 꽤 수준 있는 유물품들을 수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단 출처에 대한 기록이 미흡하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오타니는 1902년 8월 혼다 에류(本多惠隆), 이노우에 고엔(井上弘圓), 와타나베 뎃신(渡邊哲信), 호리 마스오(堀賢雄) 등 네 명의 대원들과 함께 (대원이라기보다는 가신·家臣과도 같았던) 영국을 출발해 서투르키스탄 철도의 종점인 러시아의 안디잔(현 우즈베키스탄의 동부)에 이르렀고 다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슈가르에 들어갔다. 일행은 중국 신강의 초입인 타슈쿠르칸 지역을 함께 탐험한 뒤 팀을 나눠 오타니는 혼다, 이노우에와 함께 파미르, 길기트, 페샤와르로 통하는 남쪽 루트를 조사한 후 인도를 경유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와타나베와 호리 두 사람은 타림분지, 호탄, 타클라마칸 사막, 쿠차, 투루판을 거쳐 중국 대련을 경유해 일본으로 갔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와 별장 사진 / 니라쿠소(二樂莊)를 비롯한 별장이 귀족가문의 재력을 말해준다.
    1차 탐험 루트 : 오타니, 혼다, 이노우에 팀
    1차 탐험 루트 : 와타나베, 호리 오타니 팀
    제1차 오타니탐험대

     

    오타니는 1906~1908년에는 홀로, 혹은 노무라 에이자브로(野村榮三郞),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등과 함께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섰다. 그리고 1910~1914년에는 다치바나 및 요시카와 고이치로(吉川小一郞)에 의한 제3차 탐험이 감행되었는데, 이 3차 탐험 때는 돈황 막고굴에서 중국 승려 왕원록이 숨겨두었던 잔서(殘書, 서구 탐험가들이 하도 유물들을 가져가자 중국정부가 서역 유물과 서적들을 중요박물관으로 이전시켰는데 이때 왕원록이 꼬불친 책) 중의 500여 권을 획득해 가져오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오타니 탐험대는 1차와 2차 때  키질 석굴과 천불동 석굴, 투르판 베제클리크 석굴 등을 훑었고, 3차 때는 돈황의 잔존 유물을 쓸어 담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영국, 프랑스, 중국에 이어  4번째로 많은 돈황문서 보유국이 되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혜초의 <왕(往)오천축국전>은 영국의 스타인과 프랑스의 펠리오가 가져온 돈황문서 속에 끼어 있는 보물이었다. 

     

    <대승기신론소>는 런던 브리티시 도서관이 스타인이 가져온 돈황문서(스타인 문서)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신라승 원효의 저작임이 처음 밝혀졌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펠리오가 왕원록으로부터 구입한 문서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당나라 승려의 인도 기행문으로 여겨지다가 훗날 오타니 고즈이가 돈황문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727년 신라승 혜초가 천축(북인도)의 다섯 나라를 여행하며 기록한 인도·파키스탄·중앙아시아 기행문이라는 것을 고증해 밝히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런던 브리티시 도서관의 돈황문서(스타인 문서)에서 추가 발견한 <대승기신론소> 필사본 조각 / 원효의 사상이 중국에서도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왕오천축국전> 사본 /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으며 5893자 358cm가 남아 있다.
    프랑스 탐험가 폴 펠리오가 돈황 장경동에서 서적을 뒤져보고 있다. / '프랑스극동학원' 출신의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와 뛰어난 한학(漢學)으로 알짜배기 문서들만 추려왔다.

     

    오타니의 3차에 걸친 10년간의 탐험 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당시 교토(京都)시의 1년 예산에 버금갈 정도였다. 오타니는 이 경비의 대부분을 자신의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정토진종 서본원사의 자산으로 충당했는데, 공교롭게도 3차 탐험이 끝난 1914년 2월 서본원사의 횡령·위조 사건이 터졌다. 서본원사 혼간지 승려 5명이 서류를 위조해 교단의 자금을 유용한 사실이 탄로난 것이었다.

     

    이에 교단은 자금난에 빠졌고 오타니는 문주(門主)직을 사퇴했다. 앞서 I편에서 말한 대로 당시 오타니는 서본원사의 제22대 문주였던 까닭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인데, 그러면서 지원이 끊기게 오타니는 더 이상의 탐험을 할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오타니 탐험대가 3차에 걸쳐 가져온 서역의 보물들마저 위태롭게 되고 말았다. 오타니는 일본으로 가져온 서역 유물들을 고베(神戶)의 별장인 니라쿠소(二樂莊)에 보관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오타니는 자신이 물려받은 대저택들을 하나 둘 처분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니라쿠소도 서역유물들과 함께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니라쿠소(二樂莊)

     

    오타니는 그해 1915년 12월 중국 중국 뤼순(旅順)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 1,714건에 이르는 유물과 다량의 돈황문서을 거저 갔다. (현재  국립뤼순박물관, 중국국가도서관 소장 )그리고 이때 이전을 시도했다 채 옮겨지지 못한 유물 15,000점은 도쿄국립박물관, 교토국립박물관에 나눠 보관되었고, 니라쿠소에 남은 15,000점은 새로운 집주인인 前 상공대신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의 소유가 되었다. 

     

    니라쿠소에 남겨진 서역유물은 벽화 등과 같이 부피가 큰 것으로 구하라는 이 유물들을 모두 경성의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다. 이유라면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동향(同鄕)이라는 것뿐이었으니 아마도 당시 광산업을 하고 있던 그가 조선광산채굴권이라는 반대급부를 노려 한 행동이라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기증한 유물은 1916년 4월 30일 고베 항에서 일괄 선적되었다. 그런데 구하라의 소유가 된 별장 니라쿠소는 1932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바,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유물이 서울에 남아 있게 된 셈이다. 

     

    총독부는 기증받은 이 유물을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전시하였다. 아울러 데라우치는 유물들이 더 이상 옮겨갈 수 없도록 유출 엄금의 조처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의 불상과 석탑 같은 유물이 일본으로 가는 것 또한 막았으니 조선총독으로서 제가 다스리는 땅의 보물이 공공연히 일본으로 유출되던 일이 기분 나빴던 듯했다. 이후 유물은 총독부박물관과 경복궁 국립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오타니 탐험대가 거쳐간 키질 석굴 사원
    돈황 천불동 계곡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가장 유명한 돈황 막고굴
    나귀에 유물들 싣고 돌이오는 오타니 3차 탐험대 모습
    오타니의 서역유물이 전시 보관되었던 경복궁 수정전
    수정전 전시 당시의 유리건판 사진
    조선총독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서는 항시 그 서역유물들을 볼 수 있는데, 아래 사진은 I편에 이어 그중의 중요유물들을 간추려 본 것이다. 전시물은 크게 불교 유물, 매장 유물, 일상생활 유물의 세 분야로 나눈다. 불교 유물은 오타니 탐험대가 위의 석굴사원에서 절취해온 벽화 단편이 대표적이지만,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지방에서 숭배된  세라피스상 등에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헬레니즘 문화도 읽힌다.  

     

    매장 유물은 투르판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 묘표(墓表), 진묘수(鎭墓獸), 복희여와도 및 죽은 자의 머리맡에 놓이는 다양한 형태의 그릇과 인형이 대표적이다. 로프노르 샤오허 묘지에서 출토된 사람 형상의 나무막대 조형물, 바구니와 모자 등의 생활용품은 무려 기원전 17~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타나 무덤에서 나온 6~7세기의 그릇 표면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길상(吉祥紋)인 구슬무늬가 묘사돼 있어 서아시아와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흔적 또한 엿볼 수 있다.  

     

     

    호탄 출토 부처의 머리 / 4~5세기
    연꽃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묘사한 호탄의 소조품 / 6~7세기
    카라사르에서 출토된 무사의 머리 / 6~7세기
    카라사르 출토 소조품 / 6~7세기
    쿠차 출토 세라피스와 코끼리 상 / 8세기
    투루판 무르투크 출토 여인상 / 6~7세기
    돈황에서 나온 명상하는 승려 상 /10세기
    고창국 출토 묘표
    투루판 지역에서 출토된 진묘수의 머리 / 7~8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복희와 여와 그림 / 2m가 넘는 큰 그림으로 당대의 우주관이 반영됐다.
    돈황에서 수집된 '여행하는 승려' 그림 / 9~10세기
    3~4세기 선선국의 영토
    누란에서 수집된 가면
    누란에서 수집된 난간 유물 / 3세기
    영국박물관의 누란 난간유물
    로프노르 샤오허 묘지의 사람모양 막대 / 기원전 17~15세기
    샤오허 묘지 출토 바구니와 모자 / 기원전 17~15세기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토용/ 7~8세기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토용/ 7~8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무늬 토기 / 6~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토기 / 6~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무늬 토기 / 6~7세기
    로프노르와 차르클리크 증에서 출토된 생활용기 / 1~4세기
    대접, 벼루, 시루,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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