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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신정변 그날의 서광범 (고뇌하던 젊은 그들 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4. 23:54

     

    서울 안국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안국방(安國坊)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안국동은 태조 5년(1396) 정도전이 한양을 5부 52방으로 구획할 때 요지인 한성부 안국방에 속했으며, 이후로도 내내 한양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안국방은 영조 때 안국동의 안국방계와 가회방의 가회방계로 나뉘었으나, 이후 일제 강점기 소안동·홍현·재동 일부 지역이 안국방으로 합쳐져 안국정(町)이 되며 우연찮게 국초의 위치와 비슷하게 되었는데, 해방과 함께 안국동으로 굳어졌다. 

     

     

    안국역 부근의 홍현(붉은 재) 한옥길 안내문

     

    안국동은 요지였던 만큼 중요 관공서와 유력 인사의 저택이 많았겠으니 우선 갑신정변의 현장 우정총국 건물과, 안국 전철역 부근에서 충훈부 터 표석을 볼 수 있다. 충훈부는 오늘날의 국가보훈처 같은 곳으로 국초부터 설치되었는데, 구한말 국운이 쇠할 때 오히려 업무가 바빴던 아이러니를 지닌 기관이다. 대표적으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 고종은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 및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이하 전(全) 일본 공사관 직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참으로 정신 나간 왕이다)

     

    뿐만 아니라 순종은 경술국치 조약문이 체결된 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등에게 이화대수장을 수여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명으로 훗날 예외 없이 매국노로 불린 자들이다. 그 사흘 뒤인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며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순종이 이 매국노들에게 훈장을 내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라 멸망시키느라 고생했다는 뜻일까?  

     

     

    안국동 충훈부 터 표석
    표석의 내용

     

    이상의 일을 보면 당시 조선에 얼마나 인재가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은 고사하고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된장을 찍어먹는지 똥을 찍어먹는지조차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나라가 망한 것도 무리가 아닐 듯했다. 하지만 당시에 아주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한말의 김옥균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과거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가장 빼어났으나 지금은 모두 폐절(廢絶)되어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습니다. 우리 조선이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지속된다면 가장 뒤떨어진 나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소는 언뜻 그가 이조협판으로 있을 때 올렸던 상소처럼 보이지만 실은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의 일이다. 조선이 자주국이며 부강한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다음으로는 과학 입국(入國)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김옥균의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습득해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1881년 11월 신사유람단을 조직해 일본에 갔던 김옥균과, 1882년 임오군란 때 사상(死傷)한 일본인과 불 탄 공사관에 대한 피해보상 문제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로부터 비롯됐다. 나가사키 조선소, 고베와 오사카 공업단지 등을 를 견학한 두 사람은 크게 각성했다. 일본의 선진 공업기술은 상상 이상이었으니, 당시 이미 영국의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에 맞먹는 무라타 소총이라는 자체기술의 총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영국의 스나이더-엔필드 소총과 일본식 머스캣 소총(위)
    22식 무라타 소총(아래) / 전쟁기념관
    대표적인 김옥균의 얼굴인 이 사진은 1882년 일본 나가사키 우에노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서구의 선진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산업 입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서광범이 더 간절했다. 1882년 조미수교 후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문 제2조에 의거, 1883년 5월 특명전권공사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으나 조선은 청국의 간섭에 외교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대신 그해 7월 보빙사라는 이름의 답례 외교사절단을 보냈다. 정사(正使)는 민영익이 맡았고 부사(副使)는 홍영식, 서광범은 종사관이었다.

     

     

    보빙사 시절의 서광범 / 왼쪽부터 미국 해군정보국의 메이슨 대위, 민영익, 안내를 맡은 퍼시벌 로웰, 서광범, 홍영식, 조지 포크 소위.

     

    서광범은 미국 방문에 앞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김옥균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882년 9월에는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재차 견학했다. 그리고 1883년 7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을 알현했다. 이후 그는 아서 대통령이 보빙사에 대한 배려로 내준 트렌튼호를 타고 정사 민영익, 통역관 변수와 함께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거쳐 조선의 부산항에 도착해 한국 최초로 세계 여행을 한 인물이 된다.

     

     

    1883년 21살 서광범이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 그들을 수행해 동행했던 조지 포크 소위는 훗날 조선국의 미국 공사대리가 되는데, 그가 여행기간 동안 느낀 민영익과 서광범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상반됐다. 포크는 허구한 날 중국의 고전만을 읽던 민영익에 크게 실망한 반면,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갖고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려는 모습을 보인 서광범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서광범을 비롯한 일행은 미국에서 뉴욕 병원,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 소방서, 우체국, 티파니 상점, 크램프 독스(Docks), 하버마이어 제당공장, 이브닝 포스트와 뉴욕헤럴드 신문사, 브루클린 해군기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등을 두루 방문했다. 

     

     

    1883년의 뉴욕 브로드웨이
    당시 뉴욕의 전신주와 전기줄

     

    그리고 밤이 대낮처럼 밝은 것에 놀라, 급기야는 대놓고 물었다. "그 전기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수행원들은 5분 이상 전기에 대해 설명했지만 보빙사 일행 중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당시 뉴욕 신문은 보도했는데, 아마도 질문을 한 사람은 서광범이었을 듯하다. (보빙사들은 귀국한 뒤 이때의 경이를 고종에게 들려주었고 그 후 곧 경복궁에 전기가 가설된다. ☞ '에디슨의 전기회사가 조선 한양에 불을 밝힌 날'

     

    조지 포크는 훗날 미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의 실세인 민영익을 대신하여 서광범이 집권을 하면 조선은 흥할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 서광범에 대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되던지, 아니면 조국을 위해 죽을 것(He will either become a very great man here, or will die for his country)"이라고 예견을 했는데, 불행히도 후자가 적중했다.  

     

    1883년 12월 먼저 귀국한 홍영식은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 없는 데 있다가 돌아왔다"는 소감을 전했고, 세계일주 후 돌아온 서광범은 "암흑에서 광명으로, 광명에서 암흑으로 돌아왔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이 깜깜이 나라 조선을 밝은 광명의 세상으로 이끌기로 마음먹었던 바, 1884년 12월 4일 드디어 칼을 빼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갑신정변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에서 돌아온 홍영식은 1884년 4월 서구의 우정 시스템을 벤치마킹한 우정총국을 만들어 우정국총판을 겸임했는데, 1884년 12월 4일은 그 우정총국의 낙성식이 있는 날이었다. 개화파들은 국내외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초빙되는 그날의 낙성식을 기화로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 꼴통들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개국(開局) 축하연은 오후 7시경, 우정총국 마당에서 치러졌다.

     

    이 자리에는 주인격인 홍영식 및 손님격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의 조선측 인사들과, 외국인으로는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과 통역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참석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런데 일본에서 발행된 <갑신일록>(김옥균의 혁명의 전말을 담은 회고를 일본인이 정리했다는 책)과, 김옥균 암살 23주기를 맞아 1916년 일본인 구즈후 겐타쿠(葛生玄晫)가 간행했다는 <김옥균>에서는 이날 서광범의 행적이 묘연하다.  

     

     

    <갑신일록> / 전쟁기념관
    갑신정변의 현장 안국동 우정총국 건물
    우정총국의 과거 사진 /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모습이다.
    우정총국의 과거 사진
    우정총국의 초기 사진 / 이 세 건물 중의 하나가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는데, 어느 건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김옥균>에는 김옥균 스스로가 그렸다는 우정국 연회 좌석도까지 실려 있는데, 조선인 참석자들은 물론이요, 청나라 총판조선상무 진수상(陳樹裳)과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 미국공사 푸트 및 공사관 직원 스카터, 영국총영사 에스턴 등도 각각 '福德', '司各德', '阿須頓'으로 표기돼 있다. 그리고 당일 연회에 불참한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대신해 참석한 시마무라 히사시가 기재돼 있는 것을 보면 꽤 정확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서광범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당일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추측건대 그는 당일 자신의 집 바로 밑에 있는 안동별궁에 방화하러 갔음이 틀림없다. 앞서 1편에서 말한 대로 안동별궁은 조선왕실의 별궁으로 정식 명칭은 '안국동 별궁 (安國洞別宮)'이나, '동 별궁' 혹은 '안동별궁'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곳은 세종대왕이 늦으막에 얻어 끔찍히도 위했던 막내 영응대군의 대저택이 지어진 이래 왕자와 공주의 저택으로 이용되다 고종 때 별궁으로써 대대적인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고종의 허례와 사치로 건립된 안동별궁 / 고종 19년(1882년)과 44년에는 순종의 혼례 장소로도 사용됐다. (순종은 초·재혼의 호화혼례를 모두 이곳에서 치렀다)

     

    갑신정변에 관한 모든 기록에는 이날 저녁의 정변은 안동별궁의 방화와 폭발로 혼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파들을 죽이는 것이 계획이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다만 안동별궁에 지른 불은 마침 그곳을 돌던 순라꾼에 일찍 발견돼 화약의 인화에는 실패하였고, 대신 옆 초가에 지른 불이 타오르며 "불이야!" 하는 고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서광범은 자칫 화약 폭발로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었음에도, 또한 큰 화재로 인해 바로 옆 자신의 집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를 감수하고 몸소 뛰어들어 거사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확실히 처리하고자 함이었으니 그 하나만을 보아도 갑신정변은 일체의 사심이 실리지 않았던 혁명임을 알 수 있다.

     

    * 3편으로 이어짐

     

    일제강점기 학교 건물로 쓰일 당시의 안동별궁 현광루 / 1937년 안동별궁은 친일파 민영휘의 손자 민덕기에게 매각됐고 경성휘문소학교가 세워졌다. 경성휘문소학교는 해방 후 풍문여중고로 개편됐다.
    풍문여고는 2017년 강남으로 이전되었고 2021년 풍문여고 교사를 리모델링한 서울공예박물관이 세워졌다.
    서울공예박물관 마당의 안동별궁 건물지 안내문 / 사진 속의 건물이 안동별궁 현광루다.
    지금의 현광루 / 안동별궁은 경연당(慶衍堂), 정화당(正和堂), 현광루(顯光樓), 정상루(定祥樓) 등의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 정화당 건물은 1965년 해체 후 우이동으로 이축돼 현재 메리츠화재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현광루는민영휘의 자손이 운영하는 경기도 고양시 한양컨트리클럽 골프장 내로 옮겨졌다가 2009년 다시 문화재청에 의해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로 이축됐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옛 풍문여고 5개 건물이 리모델링되었다.
    그 과정에서 60m 정도의 안동별궁 담장 기초가 확인되었다.
    서광범의 집은 덕성여자중학교 교정 안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100년간 금단의 땅이었던 송현동 부지가 있다. / 이곳은 친일파 윤덕영·택영 형제의 집, 총독부 조선식산은행 사택, 주한 미군 숙소,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이다 올해 2023년 일반 개방됐다. 이후 '이승만 기념관'을 세울 것인가,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이건희 기증관'을 세울 것인가 설왕설래 중인데,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것도 방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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