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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역의 약탈자 오타니 탐험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19. 23:59

     
    젊었을 때나 나이 든 지금이나 '탐험'이란 단어는 문득 피를 끓게 한다. 그것은 내가 허약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도 계속 인생의 로망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탐독했던 로버트 피어리, 로알드 아문센, 로버트 스콧,  링컨 엘즈워스, 움베르토 노빌레가 감행한 남·북극 탐험의 모험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유독 추위에 약한 몸이기에 그들의 모험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들의 백미는 아무래도 아문센과 스콧이 벌였던 남극점 선점 경쟁이다. 영국의 로버트 폴컨 스콧 대위가 이끄는 남극탐험대는 1912년 1월 18일, 81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1개월 전 경쟁자인 노르웨이 탐험대가  남극점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좌절감 속에 기지로 귀환하게 되지만 그나마 귀로마저 여의치 않았으니 기지를 18km 앞둔 지점에서 눈보라 속에 최후를 맞는다. 스콧의 마지막 일기 내용은 이러하다. 
     
    "내일 우리는 18㎞ 떨어진 기지로 출발할 예정이다. 텐트 문 밖에는 아직도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견뎌낼 것이다."
     
     

    영국 스콧 탐험대
    탐험대원 E. A. 윌슨, 스콧, H. R. 보어, L. E. G. 오츠, 에드거 에번스
    대장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스콧에 앞서 남극점을 점령한 아문센의 이야기도 극적이다. 1909년 북극 탐험을 계획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은 그해 4월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선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남극으로 방향을 튼 아문센은 1911년 12월 14일, 4명의 동료와 함께 극점에 최초 도달하였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1926년, 아문센은 자신이 최초가 되지 못한 북극점에 비행선으로 도달하기로 마음 먹고 미국의 링컨 엘즈워스, 이탈리아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타고 북극을 횡단했으나 그들이 과연 북극점을 지났는가 하는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28년 아문센은 북극해 스피츠베르겐 군도에서 비행선 사고를 당한 노빌레를 구하기 위해 날아가던 중 목숨을 잃었다.
     
     

    스피츠베르겐 풍경
    스피츠베르겐의 암봉들
    스피츠베르겐 군도의 위치
    아문센 탐험대와 대장 아문센(1872~1928)

     
    그런데 이들과 성격이 다른 또 다른 탐험가들이 있었다. 영국의 마크 오렐 스타인(M. Aurel Stein, 1862~1943), 스웨덴의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독일의 폰 르콕, 미국의 랭던 위너 등이 그들이다. (랭던 워너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별명은 '중앙아시아의 약탈자', 혹은 '실크로드의 악마들'로서 별로 고상하지 못하다. 그들의 정체는 대체 무얼까?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랭던 워너와 영화 인디아나 존스 속의 헤리슨 포드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써 일찍이 제국주의에 들어선 유럽의 국가들은 세계 곳곳을 침략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들 국가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각국의 탐험가들은 19세기 후반 그동안 미지의 내륙으로 알려졌던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까지 발을 뻗쳤다. 그동안 이곳이 미지의 땅으로 존속되었던 것은 교통의 불편함과 환경의 열악함 때문이었으니, 위구르어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타클라마칸'이라는 지명이 이를 대변해 준다.
     
    하지만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영향으로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처음으로 이  미지의 땅에 발을 딛었다. 이어 스웨덴의 헤딩, 프랑스의 펠리오 등이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서 일대를 헤집으며 곳곳의 불교유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일대는 중국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던 바, 각국의 탐험대들은 불교사원이나 석굴 안의 불상, 불화, 서적, 벽화 등의 예술품을 제멋대로 수거하거나 뜯어 제 나라로 가져갔다.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장경동이라 불리는 돈황 17굴 입구
    돈황 17굴
    1907년 스타인 촬영한 돈황 16굴과 17굴 전경 / 앞쪽의 작은 문이 장경동석굴인 17굴의 입구이며, 앞에 늘어 놓은 두루마리들이 스타인이 조사하기 위해서 꺼내 놓은 고사본들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영국의 스타인 탐험대 (출처: 제주불교신문)
    타클라마칸 사막과 약탈자들이 거쳐 간 장소들
    프랑스 중국학자 폴 펠리오가 둔황 장경동에서 유물들을 분류하는 모습 (출처: 제주불교신문)

     
    그 무법자들 가운데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도 있었다. 오타니는 교토의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파(本願寺派) 니시 혼간지(西本願寺)의 제22대 문주(門主)로서,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탐험가 마크 스타인이 가져온 막대한 불교 미술품 '스타인 컬렉션'에 자극받아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꾸렸다.
     
     

    승려 복장의 오타니 고즈이

     
    위에서 말한 서구 열강들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대부분 국가의 지원이나 유명 박물관 등의 후원을 받아 팀을 꾸린 예였다. 하지만 오타니는 오직 개인적 역량으로 탐험대를 조직하였고, 이후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각지를 탐사해 엄청난 양의 유물을 수집했다.
     
     

    제1차 오타니탐험대(1902~1904년) 사진

     
    그런데 그 유물의 반수 이상인 1500여 점의 미술품이 현재 우리나라에 보존돼 있다.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다. 그것들로 채워진 국립중앙박물관 3층 중앙아시아관의 유물들을 볼 때마다 그 양과 질에 감탄하게 되는데, 다음 회에는 유물들의 다양한 사진과 함께  오타니 탐험대의 경로와 활동 및 그가 수집한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놓이게 된 경위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오타니 컬렉션
    서원화(誓願畵) / 투루판 지역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에서 절취한 대형 벽화로, 수행자가 부처인 연등불(燃燈佛)에게 푸른 꽃을 바치는 모습이다.
    악귀 상/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중당(中堂)에서 절취한 벽화로, 중당 사천왕 상 앞에 무릎 꿇은 악귀의 모습이다.
    마혜수라천 상 / 흰두교의 신 사바가 불교에 포함되어 등장한 신으로 여러 얼굴과 팔, 3개의 눈이 그려졌다.
    서원화(誓願畵) /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오른쪽의 벽화로,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과거불을 만나는 모습을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을 모델로 하여 그렸다.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 / 미란 사원 제5사원지 회랑 벽에 그려진 본생도의 일부분으로, 비슈반타라 왕자는 석가모니의 여러 전생 중의 한 사람이다.
    천불도 / 투루판 석굴사원의 벽화편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모두 1500여 점으로 양과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컬렉션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대형벽화가 많이 존재한다.
    서원화 장막 / 베제클리크 제15굴 회랑 서원화 위쪽에 그려진 화려한 커튼 그림이다.
    보살을 그린 돈황의 번 / 번(幡)은 불교건축물을 꾸미거나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하던 걸개그림으로 우리나라의 괘불(掛佛)과 유사하다.
    독일 탐험대가 촬영한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베제클리크 사원 뒤로 보이는 산이 여름에 80도까지 육박한다는 화염산이다. /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철선녀의 파초선을 빌려 화염산의 불을 끈다.
    지금의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섭씨 77도를 기록한 화염산 앞의 여의봉 온도계
    주위를 살피는 손오공과 더워 죽는 삼장법사 일행
    정말로 불타는 듯 보이는 화염산과 베제클리크 사원 / 오타니 탐험대도 어지간히 고생했을 듯. 베제클리크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집'이라는 뜻으로 총 83기의 석굴이 확인되었고 그중 40기가 보존되어 있다. 고창국이 6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조성했으며 10세기 위구르족 지배기에 왕실의 성지가 되었다. 오타니 탐험대의 3차 탐험 때 타깃이 되어 많은 유물이 절취당했다.
    베제클리크 사원의 위치 / 베제클리크 사원는 투루판 시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무르툭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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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