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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의사 박서양과 김필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23. 00:10
지난 주말 광화문 세종대로에 갔다가 3종류의 시위를 목격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지지를 호소하는 아랍+한국인 시위대였다. 두 번째로 본 것은 현재 성폭행 등의 혐의로 재판 중인 JMS 정명석의 무죄를 주장하는 신도들의 시위였는데, 정명석은 오늘 1심에서 징역 2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금 그의 나이가 78살이니 101살이 되어야 풀려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상의 종신형이다.
세 번째는 의대생 증원 모집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시위였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지난 주말은 영하권 추위에 칼바람이 몰아쳐 정말 추웠다. 대학병원에서 급히 내몰렸는지 인턴 정도로 여겨지는 아주 어려 뵈는 여자 의사 선생님은 후드도 없는 얇은 옷을 입은 탓에 연신 양손으로 몸을 감싸거나 귀를 비비거나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모자라도 있으면 벗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간의 다수 의견은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쪽이지만, 의사들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들어 증원에 반대하고 있다. 지나가는 어떤 이가 뱉은 혹평, 즉 (의사) 수입이 보통사람 평균의 7배에 이르면서도 철밥통 지키려고 저 지랄들이라는 비난이 세간의 일반적인 시각일 수도 있겠지만, 의사 쪽 이야기는 오히려 보통사람을 걱정해 마지않는다. 즉 의사들이 늘면 어떻게든 처방이나 의료행위를 더하는 과잉진료가 늘 것이고, 결국 의료보험비가 늘어 국민들의 세금 부담만 커질 뿐 실질적인 의료혜택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울러 의료진의 질이 낮아져 국민들만 손해 볼 것이라는 얘기다.
양쪽의 의견에 다 일리가 있고, 내가 뾰쪽한 대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따로 평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최초의 의사 두 사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다. 최초의 의사들이 과연 사회적으로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궁금하기 그지없지만 지금의 닥터들이 갖는 사회적 지위나 대접은 아니었을 것이고, 접근했을 리조차 없을 것이다. 특히 백정 집안 출신 의사 박서양의 경우는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사가 되었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서재필의 경우 때문이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간 서재필은 우여곡절 끝에 1894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주경야독으로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의대를 졸업한 후 대학병원 인턴을 거쳐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였으나, 매일 파리만 날리는 개점휴업 상태가 지속되었다. 동양인 의사를 멸시한 까닭이었다. (참고로, 우리가 서재필 박사라고 칭하지만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의사의 호칭인 닥터가 박사학위자로 착각되었던 것이다)
미국인이 동양인에 갖는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은 우리나라가 훨씬 더했을 터, 백정 집안 출신 의사를 세간에서 쉬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다. 앞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비슨 가(家)의 3대에 걸친 봉사'에서 말한 대로 제중원 4대 원장 올리버 어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조선민중의 치료에 있어서 몇 명의 사람을 더 치료하는 것보다 몇 명의 조선 의사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까닭에 그는 제중원의학교를 건립해 1908년 6월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인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박서양은 그중의 한 명이었다.
박서양과 제중원과의 인연은 제중원 의사 어비슨이 장티푸스에 걸린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을 살리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박성춘은 백정이었는데,(그가 어떻게 박씨 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서양의 용한 의술을 접한 그는 자신의 아들 박봉출(후에 박서양으로 개명)을 의사로 만들고자 어비슨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어비슨은 특별히 백정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일자무식의 박봉출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듯, 일정기간 허드레 일을 시키며 소양을 살폈다.
마침내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한 그는 1908년 그 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업성적도 우수했던 듯, 1907년 10월 23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서울 굴레방다리에 사는 김씨부인이 난산(難産)의 고통을 겪다 제중원 의사 허스트와 의학생 박서양 씨의 도움으로 소생되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까닭에 그는 의사인 동시에 제중원의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니 졸업 후 모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아울러 중앙학교 오성학교 휘문학교에 출강하며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는데, 당시 학생들이 그의 출신을 우습게 보고 천시했을 때,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의사이며 교수라 할지라도 당시는 여전히 신분의 굴레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 박양빈은 성균관 박사 출신의 신필호와 결혼했다. (신필호는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의 문중이다) 위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박양빈의 결혼에 대해 따로 전해오는 내막은 없지만 아마도 박서양의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을 듯싶다.
박서양은 1913년, 어비슨이 세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고, 외과 교수를 역임하며 병원 외과 환자를 진료하였다. 그런데 이쯤 되면 천출(賤出)의 딱지는 충분히 떼었을 법한데, 1917년 만주 길림성 연길 용정(龍井)으로 이주해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했다. 노래 '선구자'의 일송정 푸른 솔이 있는 그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숭신소학교(崇信小學校)를 세워 민족정신의 학생들을 길러냈다
그의 구세의원은 독립군 전문 의료기관이었다고 하는데, '세상을 구한다'는 병원 이름은 곧 우리나라의 독립을 의미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박서양은 대한국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었으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군의관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20년 5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만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등 애국애족에 헌신하다 1940년 고향인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로 돌아와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박서양과 함께 졸업한 7명 중의 한 명인 김필순의 일생도 주목할 만하다. 1878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와 1904년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했는데, 박서양과 더불어 우수한 학생이었던 듯 스승인 어비슨을 도와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해부학>을 비롯한 30여 종의 한글 교재를 펴냈다. (덕분에 이후의 학생들은 보다 쉽게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었다)
김필순은 졸업과 동시에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취득하였으나 병원 개업을 않고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제중원의학교의 후신)와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길러냈다. 아울러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도와 신민회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를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1911년 12월 31일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미 이회영 6형제가 와 있던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에 터전을 잡았다.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한 김필순은 병원 운영으로 얻은 수익금을 신흥무관학교에 희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안창호의 권유를 받고 치치하얼로 옮겨 안창호가 계획한 만주지역의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발벗고 나섰던 바, 우선 치치하얼 영안대가(永安大街)에 '북제진료소(北濟診療所)'를 개원했다.
북제진료소는 '북쪽에 있는 제중원'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북제진료소에서 현지인과 한인 및 독립군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한편으로는 치치하얼 일대에 한국인+중국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일명 '김필순 농원')을 마련해 그 수익금으로써 독립군을 돕다 1919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김필순은 치치하얼 일본영사관에서 관찰보고서가 작성되었을 만큼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일본인 의사가 건네준 우유를 먹고 앓다가 1919년 음력 7월 7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필순 본인뿐 아니라 그의 형인 김윤방과 김윤오, 여동생인 김구례와 김순애, 조카딸 김마리아도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중 김구례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의원 서병호의 아내이며, 김순애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김규식의 아내이자 상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서 활동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김필순의 아들은 중국인들이 '영화 황제'라고 부르는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 1910~1983)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중국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황제'라 불리는 사람은 김염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영화배우이자 상하이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모택동과 주은래를 접견하였으며, 그의 아내 친이(秦怡)는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에 인민예술가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외할아버지 김염의 삶을 조명한 박규원의 <상하이 올드 데이스>에 포함된 글에 따르면, 일본인에게 독살당한 김필순은 치치하얼에 묻혔으나 일본군이 무덤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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