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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문사 스님의 시를 차운(次韻)한 월사 이정구 & 정지국사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7. 19:14

     

    조선 중기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庭龜)는 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과 더불어 '한학(漢學) 4대가'로서 유명하다. 한문학의 내로라는 4명 중의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나니 천부적 천재성이 느껴지는데, 이를 테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해 시를 지었을 정도이다. 산문은 더욱 뛰어나니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하고 표일(飄逸, 세속의 때가 없는 느낌)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아니 한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며 극찬했다.  

     

    이정구는 양평 용문사에 자주 왕래하며 스님들과 시문을 논했던 듯 '용문사승약령축 차일송운'(龍門寺僧若靈軸 次一松韻: 용문사 승려 약령의 시 두루마리에 들어 있는 일송의 시에 차운하다)과 '용문산사 차승축운'(龍門山寺 次僧軸韻: 용문산 용문사 승려의 시 두루마리 속의 시에 차운하다)의 시 두 편을 남겼는데, 그중 '용문산사 차승축운'이 용문사 입구에 새겨져 있다. 번역된 시(詩)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물속 바위는 들쑥날쑥, 길은 오르락내리락
    골짜가마다 그늘지고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네.
    꽃이 희미한 작은 암자에
    봄은 고요하여
    선경(仙景)을 찾는 사람
    갈 곳 몰라 하네. 
     
     

    이정구의 시가 새겨진 돌

     

    아울러 다산(茶山) 정약용 역시 용문사를 좋아했던 듯 아래의 '망용문사'(望龍門寺, 용문사를 바라봄)라는 시를 남겼는데, 내용을 보면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남양주 조안면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과 용문강을 거쳐 용문사 어귀에까지 이른 듯하다. 그는 이곳 용문사를 무릉도원에 비하면서도 벼슬길을 놓지 못하는 이중적 플레이를 스스로 탓하였으니 말미를 '그 아름다운 숲과 물을 한스럽게 바라본다(限望好林泉)'는 문장으로 마감했다. 

     

    아득한 저 용문산 산색(山色)이

    아침 내내 나그네의 배를 비추고 있네.

    골 깊어 오직 나무만 보이고

    구름 그치자 이어서 안개가 일어난다.

    무릉도원이 있는 줄 진작에 알면서도

    서울거리와의 인연을 끊기 어려워라.

    절이 숨어 있는 곳

    아름다운 숲과 물을 한스럽게 바라본다.

     

     

    정약용의 시가 새겨진 돌

     

    이와 같은 승경(勝景)을 품은 용문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7세기 신라 진덕여왕 시절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약 300여 년 뒤인 신덕왕 2년(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유명한 은행나무의 수령과 비겨 추측해 보자면 대경대사 창건 설에 힘이 실린다. 대경대사의 승탑과 비(碑)는 그가 입적한 양평 보리사 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승탑은 이화여대박물관에, 비는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있다. 
     

     

    두 마리 용이 떠받치는 형상의 용문사 일주문
    용문사 사천왕문 / 뒤의 철 구조물은 은행나무의 낙뢰를 잡기위해 설치한 철탑이다.
    용문사 대웅전 오르는 계단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안내문

     

    한때 304칸의 당우에 300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다는 용문사이지만  앞서 말한 대로 구한말 의병전쟁과 한국전쟁 거치며 전소되어 목조건축물이 전하는 것은 없고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790호)와 정지국사승탑(보물 제531호)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전 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나 고려 후기인 14세기 유행했던 보관(寶冠) 양식을 계승한 우수한 불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목조보살입상과 좌상, 파주 보광사 목조보살입상,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목조보살입상, 동국대학교 박물관 목조보살상 등과 궤를 같이 한다.

     
     

    용문사 관음전
    관음전 내 금동관음보살좌상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후불탱
    금동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 목조보살입상
    국립중앙박물관 목조보살좌상

     

    선원(禪院) 뒤쪽 산길에 있는 정지국사탑비는 조선초 이성계의 근신(近臣)이던 권근이 지은 것이다. 정지국사(正智國師, 1324∼1395) 지천(智泉)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인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출가했다. 속성은 김(金)이며, 호는 축원(竺源)이다. 이후 당대에 유행하던 선(禪)을 닦다가 뭔가 왜곡됨을 느낀 듯 화엄사상의 경전인 능엄경을 터득해 깊은 뜻을 깨닫는다.
     
    이후 공민왕 2년(1353)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인도 승려 지공에게 사사한 나옹의 제자가 되어 불법의 본질을 배웠다. 1356년 귀국 후에는 우왕 4년(1378)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자신이 머물던 양평 용문사에 옮겨와 공부한 것이 유일한 행적일 정도로 은둔 수행하다 조선태조 4년 개성 천마산 적멸암에서 "이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다비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왔던 바, 제자 조안(祖眼)이 그중의 일부를 지천이 머물던 용문사로 가져와 승탑과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용문사는 세종 29년(1447)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보전을 다시 지었고, 이때 소헌왕후의 원찰로 지정되며 중창했다. 즉 용문사는 정지국사 지천과는 불가분의 사찰인 셈으로 권근이 지은 탑비는 지금은 마모가 심해 읽기 힘들지만 예전 한옥션 경매에 나온 탁본(73×140cm)에서는 거의 전체 내용의 판독이 가능하다. 비문에 특별한 내용이 실려 있지는 않으나 뒷면 건립후원금을 낸 사람 명단에 오른 삼사좌윤(고려시대 종3품의 벼슬) 위안 ·위길안· 위권 3인의 이름이 단일본인 장흥 위(魏)씨 도문회의 족보에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지국사비문에 대한 윗 글 중 장흥위씨 족보는 장흥위씨대종회에서 발간하는 것이 아니고 장흥위씨도문회에서 발간한다는 위현동 님의 지적이 있어 정정하였음을 밝혀드립니다.

     

     

    정지국사 탑비 / 1398년 건립됐으며 승탑과 함께 보물 제531호이다. 높이 1.10m이며 너비와 두께는 0.6m와 0.2m이다.
    정지국사 탁본

     

    승탑은 예전에는 탑비와 같이 있었다는데, 경내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탑이 위쪽 가파른 산비탈에 놓였다. 1971년 탑비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제531호) 승탑의 전체 높이는 2.15m로서,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4각, 윗받침돌과 탑몸은 8각인데 전체적으로는 8각의 형태를 보인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연꽃을 새긴 것 외에 특별한 장식은 없으며 화려하지 않고 비례미가 뛰어난 승탑이다. 

     
     

    정지국사 승탑
    용문산과 정지국사탑
    안내문
    정지국사탑에서 바라본 속세 / 앞에 보이는 돌은 양평군 기준점이다.
    용문사 관음전 앞 석조 지당 / 통도사 지당에서 보듯 사찰 내 연지(蓮池)나 지당은 사찰에 보편적이다. 하지만 용문사 지당은 예전의 막돌로 쌓았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때는 작은 연못임에도 막연히 용이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저 동전 가득한 예쁘장히 단정된 흔한 연못일 뿐이다. 전설이 하나 사라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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