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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사냥하러 온 레옹 벵카르트와 벨기에 영사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31. 21:54


    앞서 '지상 최고의 악마 레오폴 2세와 벨기에 초코릿'이라는 글을 통해 콩고, 르완다, 브룬디라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살아 있는 지옥으로 만든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Leopold II, 1865~1909)를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유럽이 제국주의를 추구하던 시절, 그 제국주의 열차의 막차를 타고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콩고를 무력 점령한 후 거대한 카카오 · 고무농장을 경영하며 최소 수십만 명에서부터 최대 1,50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주민의 노동력을 배가시키기 위해 그 가족들의 손발을 자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벨기에 화폐 속의 레오폴드 2세/ 그는 벨기에의 중흥군주로 추앙받고 있다. 악마가 추앙받는 아주 드문 예이다.
    지옥을 알린 사진 / 손목이 잘린 소년의 표정이 이곳이 지옥임을 말해준다. 1900년 사진 속 영국 기자에 의해 지옥 콩고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악마 & 악마에게 당한 사람들

     

    1885년 레오폴 2세는 열강의 틈바구니를 뚫고 운좋게 콩고 분지를 차지하였다. 콩고는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땅이었으나 너무나 열악한 환경 탓에 땅따먹기 선수인 영국마저 흡수를 망설였는데, 그 참에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가 독일 비스마르크의 지원을 얻어 그 땅을 선점해버린 것이었다. 이로써 벨기에는 본국 영토보다 80배나 넓은 콩고를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벨기에 의회는 처음부터 콩고 점령에 반대하였던 바, 레오폴 2세는 그넓은 콩고를 자신의 개인 영토로 만들어 지배했다.

     

    벨기에 본토와 아프리카 식민지

     

    운좋게 콩고는 점령했지만 당시 벨기에는 서구 열강에는 끼지 못한 나라였다. 힘 있는 부자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벨기에 의회가 콩고 점령에 반대한 이유도 식민지 경영 비용을 걱정해서였다. 그런데 더욱 운 좋게도 때마침 세계적인 자동차 붐이 일어 타이어용 고무의 수요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레오폴 2세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조선의 속담을 알고 있었는지 1885년부터 20년 간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 잔혹하게 원주민들을 부려 벨기에를 부국의 반열에 올렸다. 그리고 이에 재미를 붙였던지 이번에는 멀리 시선을 극동으로 돌려 조선이라는 나라를 주목했다.

     

    1900년 모종의 밀명을 받은 벨기에인 레옹 벵카르트(Leon Vincart)가 1900년 조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1902년 3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다. 조백(朝白)은 조선과 벨기에의 한자 음차인 백이의(白耳義)를 지칭한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통상조약를 체결한 후, 1882년 서구열강과는 최초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를 체결했다. 이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1892), 청나라(1899),필리핀(1901), 벨기에(1901) 덴마크(1902) 등이 잇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교국들 / 벨기에는 비준된 해가 적혔다.

     

    앞서 여러 번 강조한 대로 조미수호조약은 영국이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와 미국을 끌어들여 맺게 만든 것이었다. 즉 당시 러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Great Game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사실 극동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반면 러시아는 조선의 용암포와 일본의 쓰시마를 무단 점유하고 군사를 주둔 시키는 등의 노골적인 남진(南進) 의지를 드러냈던 바, 우선은 강대국 미국을 끌여들여 극동에서의 힘의 견제, 즉 'Power of Balance'를 이루고자 하였다. 

     

    영국으로서는 조선이 발벗고 나서 미국과 수교를 하면 오죽이나 좋았으련만 깜깜이 나라 조선으로부터 그와 같은 지혜를 기대하기는 힘든 노릇인 터, 조선의 상국임을 자처하는 청나라로 하여금 1882년 미국과 조미수교조약의 다리를 놓게 만들었다. 본시 영국은 미국에 앞서 조선과 수교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었기에 이를 피하고 미국을 먼저 한반도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닦여진 길이 있으니 가는 척 1883년 자연스럽게 수교를 하였고, 이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회담장으로 이끌었다.

     

    영국은 조선이 앞서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내용에 준해 조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1882년 조미수교조약문의 내용을 영국이 사전 작성해 청나라와 미국에 건네주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확인된 바는 없지만) 내용이 크게 다를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1883년 5월 주청 영국공사 파크스(H. S. Parkes)와 조선 전권대신 민영목 사이에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내용보다 훨씬 불평등했다. 비교적 호혜평등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비해 영국이 월등히 유리했다는 얘기다. 

     

     

    수교 당시와 거의 달라 진게 없는 정동의 영국대사관저

     

    이는 영국이 무엇을 더 원했다기보다는 앞서 조선이 임오군란 후 청나라와 체결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 빌미가 됐다. 이미 여러번 말한 대로 조선이 청나라와 맺은 통상조약인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은 청나라가 임오군란을 진압해준 댓가가 고스란히 청구된 영수증에 다름아니었던 바, 중국측에 엄청나게 유리한,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체결된 통상조약문이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죽어라 당한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 / '중국과 조선 상인의 육지외 바다에서의 무역에 관한 법조문'이라는 뜻으로서 서두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 藩封, 제후국)이었다(朝鮮久列藩封)」고 명시돼 있다.

     

    즉 국제조약에 노련했던 영국은 청국의 예에 준한 수교조약문을 체결했던 것이니, 파크스는 본국에 보낸 서신에 "(뜻하지 않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며 만족감을 피력했다. 그런데  1902년 3월 레옹 벵카르트와 박제순 사이에 체결된 조백수호통상조약문은 조영수호통상조약문에 못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또한 상업 활동에 관한 세세한 규정들을 명시하였던 바, 무언가 노림수를 가지고 체결된 수교조약문임을 눈치챌 수 있다.  

     

     

    레옹 벵카르트(Leon Vincart, 1848~1914)
    1903년 미국공사관에 모인 구한말의 각국 외교관들 /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벵카르트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벵카르트는 첫 영사관을 정동 16-1번지 한옥에 마련했다. 이후 남창동 헐버트(관립중학교 교사)의 집을 사서 다시 이전했다가 마침내 회현동에 신축 부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그는 왜 정동 외교가의 이른바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에서 동떨어진 회현동으로 갔을까? 혹자는 벵카르트가 들어온 1901년은 이미 공사관 거리기 만석이라 외국 공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거나, 혹은 투자 이익을 노려 도심에서 멀지 않은 외각인 회현동을 택했다는 말을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벵카르트는 대한제국 입국 전에는 조선이 아프리카의 콩고쯤에 해당하는 미개국이리라 생각했고, 열강이 탐내기는 하지만 선뜻 취하려 들지는 않는 계륵(鷄肋) 같은 곳이라 여긴 듯했다. 그래서 외교력으로써 콩고처럼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한반도는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곳이어서, 곧 조선을 소유하기 위한 한바탕 전쟁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벵카르트가 부임해 살펴본 결과, 미국과 독일은 한반도 병합에 관심이 없었다. 프랑스와 청국은 한때 자국의 식민지로 두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각각 조선과 일본에 패해 야욕을 접은 상태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여기서 벵카르트는 다른 외교관들과 달리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바, 일본공사관이 있는 남산 왜성대와 인접한 회현동에 영사관 부지를 마련했다. 그래야 나중에 국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같았던지라. 

     

     

    벨기에 영사관 / 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사진
    일제강점기의 회현동 / 중앙우체국(왼쪽)과 미츠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사이로 벨기에 영사관이 보인다.
    한국전쟁 직후 촬영된 벨기에 영사관 모습

     

    조선에 상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만일 러시아와 일본이 붙게 된다면 러시아가 완승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외교관뿐 아니라 그것이 당시 세계 각국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그런데 벵카르트는 왜 일본 편에 섰을까? 그는 영국이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에서 매우 유리한 입지를 점유했으면서도 인천과 서울에 외교 공관만을 건립했을 뿐 더 이상의 액션을 하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아울러 영국이 조선에 2년간이나 군대를  주둔시켰다가 철수한 사건에 주목했다. 

     

    이것이 이른바 거문도 사건으로,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2년간 거문도를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견한 영국은 극동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대신 영국은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하는 일본이 막도록 하였던 바,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일본 전권대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영국 전권대사 랜즈다운(Lansdowne) 간의 국제동맹이 전격적으로 체결되었다.

     

    이른바 1차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이었다. 이어 1905년(8월 12일) 양국은 방수동맹을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바꾼다. 즉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한다'는 것으로 내용을 격상시키며 더욱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제2차 영일동맹) 이를 근거로 영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러일전쟁을 일본이 영국을 대신해 싸운 대리전쟁이라고 보는 시각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국제정세를 바로 읽은 벵카르트였지만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한편으로는 불안해졌다. '만일 모두의 예상대로 러시아가 승리한다면....?'하는 불안이었다. 이에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직전, 관립중학교의 미국인과 영국인 영어선생, 법어학교의 프랑스어 선생 등과 더불어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서리 이용익을 만나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국외 중립화 선언을 하라고 조언을 건넸다. 자국 벨기에가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립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도 중립국을 표방한 까닭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이것은 벵카르트가  대한제국을 돕고자 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최소한의 보험을 든 것이었다. 그래야 러시아가 이겨도 할 말이 있을 듯하기에. 사정을 모르는 고종은 옳다구나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공관에 통보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그는 이 중립선언이 개전국인 러·일 양국으로부터 불가침을 승인받은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기대감은 서울 주재 영국공사 조던(J. N. Jordan)의 말 한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 같은 중립선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제국은 서울을 먼저 점령하는 측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고, 대한제국 황제는 점령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을 통해 수도 서울로 진군한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한일의정서> 조약문의 싸인을 받아냈다. 조약문의 4조는 일본이 전쟁 중 조선의 영토를 마음대로 군사용지로 쓸 수 있는 권리조항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시에는 일본 정부는 임기(아무 때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데, 이때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제공해야 하며, 일본 정부는 전항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수용해 사용할 수 있다.

     

    사실상의 망국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1903년 착공된 회현동의 벨기에 영사관은 고종과 벵카르트의 동상이몽 속에, 그리고 조선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건립이 진행되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가 선호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도면이 벨기에로부터 공수됐고, 일본 호쿠리쿠 토목회사가 건축을 맡았다. 총감독은 일본인 기술자 고타마, 시공은 니시무라가 담당했다.

     

    1905년 드디어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500.83㎡의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영사관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1905년은 공교롭게도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바로 그 해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각국의 외교공관은 모두 철수하게 되었으니 벵카르트는 헛일을 한 셈이었다. 그 노력이 아까웠는지 벵카르트는 공사(公司)가 아닌 교민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라는 이유로써 출국을 미루었지만 1918년 결국 영사관은 철수되었고 건물과 부지는 일본 요코하마생명보험 회사에 매각됐다.

     

    이후 이 건물은 1944년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사용되었다가 1953년 대한민국 해군 헌병대, 1970년 상업은행 사료관 등으로 쓰였다. 이후  1982년 상업은행이 회현동에 은행본점 건물을 올리며 옛 건물이 현재의 관악구 남현동으로 해체 이전되었다. 이 건물은 1977년 이미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이전된 뒤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가 2002년 서울시가  우리은행부터 무상임대하여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쓰이게 되었다. 

     

     

    건물 정면
    입구의 안내문
    입구 현관
    입구 양쪽으로 테라스 형식의 회랑을 두었다. / 1층은 터스칸 오더, 2층은 이오니아 오더의 기둥을 채택했다.
    건물 좌측면
    건물 우측면
    은밀한 대화가 오갔을 듯 보이는 2층 발코니 공간
    우측면 1. 2층 발코니
    실내 기둥 / 기둥 안이 비어 있어 장식용임을 알 수 있다.
    거실의 기둥머리 / 로마시대부터 사용된 터스칸 오더를 채택했다.
    좌우 대칭이 특징인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나 내부는 대칭이 아니며 방마다 크기가 달리해 공간활용을 극대화시켰다.
    1층 벽난로
    거실의 이오니아 오더 기둥머리 & 착시방지용 기둥의 세로줄
    2층은 전시공간으로서의 활용도를 높이자는 건축가 김수근의 의견에 따라 작은 방을 털어 2개의 큰 방으로 통합시켰다.
    2층 벽난로
    실내의 안내문
    건물 바로뒤의 통일신라시대 요지(窯地)
    1973년 처음 발견된 이후 백제의 토기 가마터로 알려졌으나 2006년 재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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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