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단성사와 나운규의 '아리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25. 00:14

      
    앞서 1920년에 세워진 인천 싸리재의 애관극장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극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제목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애관극장'이었다. 그런데 서울 종로에 그보다 13년이나 앞서 세워진 극장이 있다. 1907년 서울의 소상공인 지명근·주수영·박태일 등이 공동 출자하여 세운 단성사 극장이다. 그런데 왜 애관극장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소개했을까? 


     

    인천 애관극장
    옛 단성사가 있던 자리 / 왼쪽에 표석이 서 있다.
    단성사 터 표석

     
    이유는 위의 사진이 말해준다. 애관극장은 지금도 영화관으로 존속하고 있는 반면 단성사는 폐관된 까닭이다. 과거 90년대 '장군의 아들'(임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 '서편제'(임권택 감독, 오정혜 주연)를 보기 위해 종묘까지 늘어선 장사진에 끼어 순서를 기다리던 일이 어제 같은데 말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1926년 무성영화 '아리랑'(나운규 감독·주연)이 상영되었을 때는 종로 5가 기독회관까지 관람객이 줄을 섰는데, 영화가 무려 2년여간 상영되었다니 할 말을 잃는다.

     

    100만 관객을 기록한 '서편제'


    단성사는 1907년 서울의 소상공인 지명근·주수영·박태일 등이 공동 출자하여 세운 극장이다. 서울 종로에 세워진 이 목조 2층 건물의 무대 설치와 설비는 경성좌(京城座, 명동의 일본인 전용극장)의 무대 디자이너가 맡았는데, 처음에는 판소리나 창극이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왜 '단성사(團成社)'일까? 그 무렵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신문인 <만세보> 1907년 6월 7일 자에 그 이름이 만들어진 경위가 나온다. 

     

    지명근·박태일·주수영 등 서울 상인이 노래와 춤 유흥을 즐기려면 기생집에 가서 거액을 들여야 하니 "아예 기생을 불러다가 듣는 자리를 만드는 게 낫겠다"하여 단합해서 이룬다는 단성사란 이름을 짓고 좌포도청 자리에 있던 기와집 건물을 대관해 극장을 만들었다.

     

    극장이나 영화관도 분명 '놀자'고 만든 것이긴 하지만, 설립자들이 '문화 창달의 깊은 뜻'을 두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위의 설명처럼 처음에는 기생들을 불러 판소리나 창극 등의 유흥을 즐겼다. 활동사진, 즉 영화는 1909년 10월 27일에 상영된 '의리적 구토 (仇討)'라는 작품이 처음으로, 연극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다 중간에 영화 필름이 상영되는 이른바 '키노드라마'였다.   

     

    '의리적 구토'는 김도산이 극본을 쓰고 연출을 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연극과 영화의 중간 형태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로 인정받음으로써 첫 상영일인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서 기려진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기생들이 호출한 인력거가 매일 단성사 앞에 몰렸고, 반면 기방은 개점휴업 상태였다고 하는 바, 당시의 문화 소비층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의리적 구토'의 신문광고


    즈음하여 단성사는 일본인에게 넘어갔다가 1910년 박승필이 인수하였다. 그는 단성사를 영화 상영에 맞게 개축한 후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태동한 무성영화의 흥행을 예감한 과감한 선택이었다. 무성영화는 변사가 내레이터 겸 성우로, 그의 활약에 따라 영화가 죽고 살았다. 이에 박승일은 당대의 인기 변사 김덕경을 거금을 주고 고용했다. 그리고 변사의 임기응변으로 때로는 반일(反日) 감정이 섞인 해설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어 영화 상영시 고등계 형사가 배석하기도 했다.

     

     

    단성사의 초기 사진 / 처음 형태는 아니고 1934년 일본인 건축가 다마타 기쓰지(玉田橘治)가 신축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 무성영화의 정점은 1926년 10월 1일 상영된 '아리랑'으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철학공부를 하던 김영진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낙향하고, 그를 동생 영희가 돌본다. 어느 날 그 영진을 걱정하여 친구 윤현구가 찾아오나 영진은 알아보지 못한다. 현구를 중증의 영진을 보며 안타까워하는데, 한편으로는 그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이 싹튼다.
     
    영희는 오빠까지 돌봐야 하는 까닭에 살림은 차츰 궁색해지고, 이에 악덕지주인  천가(千哥)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데, 이를 기회로 천가의 머슴이자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오기호가 영희에게 껄떡거린다. 그러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풍년의 농악제가 열려 마을이 비게 된 날, 오기호가 영진의 집으로 들어와 영희를 범하려 든다. 그런데 이때 마침 현구가 찾아오고 두 사람은 격투를 벌이게 된다.
     
    그럼에도 정신이상자인 영진은 두 사람을 싸움을 재미있게 바라볼 뿐인데,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환상을 보게 된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상인은 원하는 물 대신 오히려 여인을 겁탈하려 달려든다. 바로 그 순간 영진이 낫을 들어 상대를 후려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신이 돌아오지만, 눈앞에는 낫에 찍혀 절명한  오기호가 쓰러져 있다.
     
    이후 곧 영진의 집으로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이 몰려들고 영진은 일본경찰에 끌려간다. 이때 영진은 오열하며 따라오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은 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난 죄로 미쳤고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며 울음을 그치기를 청하는데, 이때 마을사람이 울며 아리랑을 합창하고  자신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니 눈물을 거두어달라는 변사(성동호)의 대사와 함께 영화가 끝난다.
     
    이때 무대 한쪽에 자리한 합창단이 실제로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노랫말의 이른바 본조 아리랑이다. (감독 나운규가 작곡가 김영한에게 의뢰해 편곡했다 함) 말하자면 영화의 주제가와도 같은 이 아리랑 가락은 이후 겨레의 노래가 되었고, 영화 '아리랑'은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세련된 영상미를 담은 촬영기법과 민족정신의 주제의식이 표방된 영화로서 방화 고전 영화의 최고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춘사 나운규(春史 羅雲奎, 1902 ~1937)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의 포스터
    낫을 휘두르는 광기를 연기한 나운규/ 1936년 속편의 스틸 사진이다. 나운규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제 앞잡이를 죽이는 장면을 정신병자가 환상을 보고 저지른 일로 처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하지만, 판권을 샀던 임수호가 벼락부자가 됐으며, 일본의 영상수집가 아베 요시시게가 원본 필름을 가져갔다는 말만 전해질뿐 정작 영화 필름은 사라져 지금은 전하지 않고, 그저 몇 장의 스틸 사진만 남아 있다. (만일 당신이 '아리랑'을 보았다면 그것은 다른 감독, 다른 배우들에 의해 리바이벌된 영화이다) 그래서 '아리랑'의 필름을 찾는 일이 지금 영화인들의 숙제처럼 남아 있는데, 일본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외에는 이렇다 할 무엇이 없는 형편이다. 

     

    아리랑'은 나운규가 시나리오를 쓴 순수 창작물로서, 그간의 번안극이나,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류의 개화기신파물을 벗어나 국산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후로도 나운규는 '아리랑'랑 속편 격인 '철인도'(鐵人都, 1930년)와 '오몽녀'(五夢女,1936년) 등 총 27편의 영화를 제작하였으나 대부분 거액의 제작비를 건지지 못해 고생하였고, 1937년 8월 9일 극심한 생활고에 지병인 폐결핵이 겹쳐 요절했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였는데, '아리랑'에서 김영희 역할을 맡았던 신일선은 월간지 <삼천리>에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하여 살며 무엇을 위하여 죽으리까. 오로지 영화만을 위하여 살았고 영화만을 위하여 돌아가신 거룩한 당신의 영혼이 영원히 행복함을, 눈뜬 잠을 자고 있는 나는 속마음으로 축원하나이다. 

     

     

    '아리랑'의 스텝

     

    단성사는 일제 강점기 말에 대륙극장으로 개칭했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했다. 이후 1960~90년대의  전성기를 맞으며 한국영화 상영관의 메카로서 자리매김하였던 바, '역도산'(1965),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년)를 내걸어 연속 히트시켰다. 2000대의 멀티플렉스관의 시대를 맞아 단성사도 2005년 총 10 개관의 멀티플렉스로 새 출발하였으나 재건축했으나 경영난을 맞아 2008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단성사의 1953년 사진 / 일본 건축가 다마타 기쓰지가 건축한 이 형태는 큰 변화 없이 같은 틀로써 리모델링을 거듭하며 21세기까지 존속했으나 2013년 결국 폐관되었다.

     

    이후 경매물건으로 나온 단성사 건물은 3번의 유찰을 거쳐 2015년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경매에서 7명의 응찰자가 참여한 가운데 575억원에 낙찰됐다. 경매 시장에 나온 지 2년 7개월 만의 일로, 한 해 전 감정가인 962억6920만원에서 뚝 떨어진 금액이었다. 그래서 당시 영화계에서는 단성사의 부활을 조심스럽게 꿈꾸기도 했으나 차후로도 잔금 납부, 소유권 이전 등기 등이 매끄럽지 않더니 결국 단성골드주얼리센터라는 상업빌딩이 들어섰다.

     

    다만 지하 2층에 단성사역사관이라는 소소한 추억의 공간이 마련되어, ‘장군의 아들’, ‘서편제’,  겨울여자’ 등 단성사에서 상영됐던 토종 흥행작 외에 ‘대부’(1972), ‘록키’(1976),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 ‘다이하드’(1988) 등 외화 흥행작의 포스터와 관계 소품이 전시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올해 폐쇄되었고, 건물 입구 담벼락에 설치됐던 아래 게시물만 처량히 남아 있다. 

     

     

    지하철 종로3가역 9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만나 볼 수 있는 단성사 터의 역사 / 1894년 갑오개혁 무렵 단성사 자리에 있던 좌포도청과 광화문우체국 자리에 있던 우포도청이 합쳐져 경무국이 되면서 이곳에 있던 좌포청 기와집이 최초의 단성사 공연장으로 대관되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이곳에서 죽었다. / 그는 1898년 이곳 좌포도청에 끌려와 죽었는데, 연도상 좌포청에서 사령이 집형된 거의 마지막 사람이다.
    단성사의 탄생 / 꿈보다 해몽이 좋은 단성사 이름의 설명이다.
    2대 사장 박승필을 주목하자.
    박승필 / 1918년 단성사 경영권을 인수한 박승필은 조선 전통 오락인 창과 구극(舊劇) 등을 무대에 올리던 광무대극장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단성사를 무성영화 상영에 적합하게 개축하고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 일본 마츠다케 영화사와 협약을 맺어 외국영화를 배급받아 상영했으며. 영화전문지 '영화가'를 발행하기도 했다. 얼굴과 복장에서 비범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박승필은 영화를 단성사에서 개봉한다는 조건으로 거금 5천원을 들여 사들인 최신식 촬영기를 영화인들에게 빌려 주었고, '의리적 구토'의 촬영분은 바로 이 같은 박승필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 촬영은 변사 김덕경이 일본에서 데려온 일본인 기사가 했는데, 촬영비가 3천원이었다 하니 투자도 보통 투자가 아니었다.
    드디어 '아리랑' 등장
    서정(曙汀) 김영환(金永煥, 1898-1936) / 최초의 영화음억 제작자인 이 사람도 주목하자. '아리랑이 나올 당시 서울의 명창들 중 이 아리랑의 가락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 주제곡임에 틀림없는데, 전통민요의 아리랑을 편곡하여 지금의 아리랑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사람 김영환이다.
    단성사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넘어간 장소이기도 하다. / 1935년 10월 3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단성사의 화려했던 시절
    이후 단성사는 사라졌고, 맞은 편에 있던 피카디리극장도 어느 순간 증발했지만,
    주변의 재개봉관 파고다극장 건물은 그대로 남았고 아직 이름도 걸려 있다. (물론 영화관은 없어졌다) / 시인 기형도가 죽은 곳으로도 알게 모르게 유명하다.
    일대의 허리우드 극장 역시 사라졌지만 허리우드 극장이 있던 낙원상가에서는 엘리자스 테일러와 마릴린 먼로의 리즈 시절 사진을 볼 수 있고,
    명작 '사운드 오브 뮤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극장 간판 및
    '영웅본색'의 주윤발과 '로미오와 쥬리엣'의 올리비아 허시도 등장한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