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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로 '고종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전' 앞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16. 23:51

     

    세종대로는 명실상부한 서울 최고(最古)의 거리이자 최대의 거리로 그 폭은 무려 100m나 된다. 이 거리를 오랫동안 이순신 장군이 원 톱으로 지켜왔으나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지적에 2009년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져 지금은 투 톱 체계가 되었다. 그렇게 뒤늦게 합류한 세종대왕은 오히려 센터의 위치를 점했는데 그 바람에 차로가 줄어들며 극심한 교통 체증을 유발했다. 물론 그것이 세종대왕 본인의 잘못은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
    세종대왕 상

     

    그 도로의 오른쪽 라이트포워드 자리에는 존재감 없는 비각 하나가 서 있다. 흔히 광화문 비각이라 부르는 것으로, 비각의 현판에는 한문으로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고 쓰여 있다. 그 안에는 '대한제국 이황제 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고 쓴 두전(頭篆)이 4면에 둘러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서 있는데, 정식 명칭은 '서울 고종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서울 高宗 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라고 한다.  
     
     

    기념비전
    비전 안의 비

     

    그런데 이 비각에 대한 설명은 대개 모호하여 이제껏 명쾌한 무엇이 없었다. 비(碑)의 제목(두전)을 보자면 분명 고종황제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그런데 또 어떤 설명에는 고종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라고 하는데, 내용을 보자면 그것이 훨씬 설립 취지에 맞는 듯하다. 그런데 기로소라는 생소한 장소는 또 무얼까? 그리고 그 기로소라는 곳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기로소는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관료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특별 경로당으로 국초인 1394년부터 중부 징청방(澄淸坊, 지금의 청진동)에 있던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로당처럼 들어가 노는 곳은 아니고 명예의 전당 같은 식으로서 기로소에 이름이 등재되면 토지와 노비 등이 추가로 지급되었다. 그런데 말한 대로 기로소는 70세가 넘는 고위 관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따지자면 고종은 기로소에 들 자격이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영조가 51세에 '곧 60을 바라본다'(望六旬)는 명분으로 기로소에 든 전례가 있었다. 70은 아니더라도 60은 노인에 속하니 기로소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나름대로의 명분으로서였으나 실제로는 51세에 그 짓을 한 셈이니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어찌 됐든 비(碑)가 세워진 1903년은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御極四十年)이니 이래저래 기념될 만한 무엇을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던 듯한데, 원래 허세 부리기와 돈을 무지 밝히는, 요즘말로 '쩌는' 임금이었던 고종에게는 매우 어울리는 노력일 듯싶다. 
     
     

    기념비전 전면
    기념비전 좌측면
    만세문의 서수(瑞獸) / 일제강점기 만세문은 어느 일본인이 떼어가 충무로 자신의 집 대문으로 삼았다가 1954년 되돌아왔는데, 이때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서수 한 마리가 사라졌다.
    기념비전 전각의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으로는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형식으로서 서수 39마리가 배치되었다.
    기념비전 앞 안내문

     
    아울러 고종은 매관매직과 수뢰를 즐긴 왕이었고, 황제에 올라서는 일본 관료들에게까지 뇌물을 받았다. 삥 뜯기도 즐겼으니, 자진해서 황금 송아지가 끄는 작은 수레를 제작해 헌상한 평안도관찰사 민영휘는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고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함경도·경기도·황해도·충청도관찰사를 두루 지내며 끈임없이 뇌물을 상납한 탐관오리 조병식은 내부대신이 되었는데, 그는 고종이나 민영휘보다도 한수 위였던 자신의 삥 뜯기 수법을 기념비전 건립 때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니 황현의 <매천야록>이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축소(頌祝所) 보조금을 다시 징수하였다. 지난해 조병식 등이 고종의 송덕기념비를 건립할 때 그 비용을 경관(京官) 및 지방관들에게 징수하니, 관찰사는 100원, 군수는 4등급으로 나누어 80원에서 40원까지 받고 또 각 군별로 벼슬아치와 선비들도 장부에 기록하였으나 아무도 응한 사람이 없으므로, 군수가 부호(富戶)를 택하여 강제로 수십, 수백 냥을 부과하였다. 이토록 한 번만으로 부족해서 이때 또 징수한 것인데, 군수가 종종 착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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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관해 적은 윤치호는 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9월 7일(음력 8월 6일), 일요일, 비 / 대황제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기념비가 서울에 세워질 예정이다. 이 일을 위해서 정부의 모든 관료들이 1개월분 녹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돈만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야 했고, 13개 도의 유지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함경남도는 2만 5,000냥, 즉 5천 달러를 내야 한다. 우리 구역인 덕원은 1,100냥을 내기로 되어 있다....."
     
    각 도(道)와 군(郡)에 부과된 돈은 보나마나 팔도 백성들에게 나눠 부과되었을 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세종대로 기념비전은 결국은 백성들의 고혈로 구축된 황제의 송덕기념비에 다름아니다. 위에서 말한 두전은 황태자 순종이 썼고, 비문은 농상공부대신 민병석이 써 구색을 맞췄는데,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민병석을 다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민병석(閔丙奭, 1859~1940)은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인물이나 기억해야 할 중요 민족반역자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장은규를 파견한 전력이 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육군대신에 올라 대한제국 군대를 무력화시켰고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 통감 부임에 적극 협조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였을 때는 궁내부대신으로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이완용과 함께 금척훈장을 받았으며 일제에게는 훈1등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합방 후에는 중추원 고문을 5차례 중임하고 애국금채회의 발기인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금전적 후원에 앞장섰으며 조선사편수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 고문 등을 지내며 민족정신 말살에도 앞장섰다. 친일파 중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친일한 놈은 드물다.  
     
    또한 이때 이 건축공사를 총 감독한 사람이 1894년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사살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홍종우인데, 공교롭게도 비가 건립된 그 해, 홍종우는 만민공동회를 주관해 붙잡혀온 독립협회 회원 이승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 목숨을 연명해 주었다. 청년 이승만(당시 28세)은 당시 국사범으로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홍종우가 신문한 결과 애국충정 외의 다른 죄를 발견할 수 없었던 바,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반면 같은 죄의 최정식은 사형을 당했고, 이승만은 이듬해 일어난 러일전쟁 중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근·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오버 랩되는 '서울 고종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이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이 길에 서서 630년 전에 도읍한 고도(古都)에 세종대로와 같은 넓을 길이 구획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630년 전에 건립되었다는 조선 법궁의 대문 광화문에 감탄하며, 조선 어떤 왕의 황제 즉위 기념비가 있다는 기념비전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나는 다만 그들이 그저 거기까지만 알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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