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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당동의 광희문·서산부인과 병원·희극인 김희갑의 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13. 23:02

     

    최근 어릴 적 살던 신당동 시구문 시장 부근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 시구문 시장은 없어졌지만 시구문(광희문)은 그대로 있었고, 이제는 다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신당동 대장간거리의 철공소들도 일부 남아 있어 반가웠다. 정말이지 이곳은 한양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많지 않은 곳으로, 지금도 1890년대 이사벨 비숍 여사가 찍은 성문과 성벽 모습, 혹은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린 광희문 밖 모습이 고스란하다. 
     
     

    이사벨 비숍 여사가 찍은 광희문과 성벽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린 사진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의 사진은 1907년 8월 1일에 벌어진 대한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남대문전투에서 전사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대한제국 군인의 시신과, 시신을 찾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 군인은 장교 13명을 비롯한 68명 사망, 100여 명 부상이라는 참패에 가까운 결과를 냈으며, 포로는 516명이 발생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불꽃같은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광희문은 많은 역사적 대형 사건이 거쳐간 곳으로, 1624년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했던 이괄이 안현전투에서 패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빠져나간 문이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갈 때 빠져나간 문 역시 광희문이며, 숙종 때 희빈 장씨(장희빈)의 시신이 나간 곳도 이곳이었다. 한때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세자(훗날의 경종)의 어머니였음에도 폐서인(廢庶人)의 연유로 4대문으로의 시신 운구가 허락되지 않아 평민과 동일하게 시구문으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1907년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광희문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
    현판은 1975년 문루를 복원할 때 여초 김응현이 썼다.
    한국전쟁 이후 1975년까지는 내내 이 모습이었다.
    한양공고 쪽 방향으로 찍은 사진
    문루
    문루 오른쪽의 각자성석
    여장과 각자성석

     

    시구문, 즉 광희문 주위로는 나름대로의 역사 산책길, 이름하여 '광희문 달빛로드'가 조성돼 있으나 기실 신당동떡볶이 골목 외에는 볼거리, 먹거리가 별로 없다. 거리지도에는 조선시대 빈민의료기관이었던 동(東)활인서가 표시돼 있지만 표석은 물론 위치조차 짐작되는 곳이 없다. 무당고개라고 표시된 곳도 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산 본인에게마저 생소한 지명이다. 
     
    신당동은 죽은 자에 대해 염을 하거나 굿을 하는 신당(神堂=무당집)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다가 갑오개혁 때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었다. 광희문 역시 도성 안 시신들이 나오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렸는데, 무당고개는 이와 관련 있을 듯싶지만 위치는 못내 억지스럽다.  
     

     

    어느 집 단장에 그려진 달빛로드
    길 위의 광희문 달빛로드 상세 지도
    보도블록의 한양도성 순성길 동판

     

    다만 광희문 지척에 있는 서산부인과 병원 건물과 희극인 김희갑이 실던 집은 들러볼 만하다. 광희문 맞은 편으로 보이는 서산부인과 병원 건물은 지금은 아리움이라는 디자인 회사 사옥이 되었다. 이 건물이 주목받는 이유는 유명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기 때문으로 1964년 서산부인과 서병준 원장의 의뢰로 설계한 것이다. 
     
    평면도를 보면 산부인과 건물답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했다는 건축가의 뜻을 읽을 수 있는데, 겉보기도 라운드로 처리한 외관이 보통 특이한 게 아니다. 이와 같은 유니크한 디자인은 당시 김중업이 제주대 본관과 함께 채택한 것으로, 그는 자신이 설계한 이 두 건물을 "20세기에 지어진 21세기의 건축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제주대 본관이 철거된 지금은 아리움 건물이 유일하다. 다만 예전 서병준 원장이 "라운드 코너로 인해 가구와 의료기기 배치가 어렵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산부인과 평면도
    계단처럼 보이는 건물의 돌출부는 경사로로서, 환자의 편의를 고려했다.
    제주대 본관 /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불릴 정도로 찬사를 받은 건물이었으나 바닷모래를 사용해 지은 탓에 건물의 조기 부식이 발생해 결국 1995년 철거되었다.
    본관 측면 사진
    여러 각도에서 본 아리움 건물 / 서울시 등록문화재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에게 사사한 김중업은 1956년 귀국하여 종로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고,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를 겸임하며 주한프랑스 대사관을 비롯한 유명 건축물을 설계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획일적 밀어붙이기식 개발정책에 반대해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데, 결국 추방되어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그는 1978년 11월 다시 돌아와 1988년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걸작을 남겼다.


     

    김중업 (金重業, 1922~1988)


    광희문 부근에는 유명 희극인 김희갑이 살던 집도 있다. 1923년 함경남도 개마고원 산골에서 태어난 김희갑은 어릴 적 양친을 잃고 어렵게 살았다. 하지만 그는 17세에 일본에 밀항해 메이지대 상학과에 입학했을 정도로 의지가 뚜렸했는데 결국은 생활고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후 전기회사, 신문사 등에 취업했다가 영화에 뜻을 두고 영화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에는 배우에 뜻이 없었고 영화감독을 지향했다. 그러다 초보 프롬프터 시절, 배역이 모자라 단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가극단에 입단하였고, 1956년 국내 최초 뮤지컬 영화 '청춘쌍곡선'(1956)을 통해 히어로가 되었다. 이후 "한국 영화는 '김희갑이 나오는 영화'와 '김희갑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1962년 후로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 되고자 희극인의 길을 걸었던 바, 구봉서 양석천 양훈 배삼룡 이기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코미디극의 첫 장을 열었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구봉서와 함께.
    정극도 겸해 그가 출연한 '팔도강산'은 대박이 났다. / '팔도강산' 시리즈의 완결판 '우리의 팔도강산' (1972년)의 포스터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의외로 폭력사태로써, 1959년 자유당 홍보를 위한 영화인 결성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정치 깡패 임화수에게 심한 폭행당한 이른바 ‘합죽이 구타사건'으로 인해서였다.('합죽이'는 그의 별명이다) 그는 당시 구타로 늑골이 부러지는 상해를 당해 입원했고, 맞고도 쉬쉬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언론에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려 사회문제화했다. 그는 보기와 달리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으니, 이후로도 '생활의 윤리감'과 '페이소스'를 지향한 철학 있는 희극인이었다.
     
     

    사건을 보도한 1959년 12월 1일 <동아일보> 기사 / 사진은 임화수

     
    그의 집이 시구문 시장 부근에 있었고 김계주라는 예쁜 여자 아이가 그 집에 살았다. 물론 그의 딸인데, 미인으로 소문이 났던 그 분은 지금 미국에 산다. 김희갑의 신당동 233-19번지(퇴계로 358)의 집은 한때 갈비집(한양숫불갈비)으로 이용되며 외관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지금은 '풍뉴'라는 퓨전 한정식집으로 단장되며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풍뉴'는 깨끗하고 고급진 분위기의 음식점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으나 김희갑의 흔적은 없다.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졌으면 좋겠다. 
     

    김희갑(金喜甲, 1923~1993)
    '풍뉴' 입구
    주차장에서 보이는 김희갑의 옛 집
    주변의 옛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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