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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의 기원(VII) ㅡ 보신각과 보신각 종 변천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12. 22:06

     

    서울 도성 4대문의 명칭이 유학의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를 좇아 붙여졌으나 유독 북대문에 ' 지' 자가 가 붙여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숙정문, 혹은 숙청문에는 문루가 존재했을까?'에서 잠시 다룬 적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 맹자께서 군자의 중요 덕목으로 여긴 '오상'(五常), 즉 '인 · 의 · 예 · 지 ·신'에서 유래된 것은 분명하다.  

     
     

    숙정문은 본래 문루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팩트
    2022년 찍은 숙정문의 홍예

     

    그렇다면 '신'(信)은 어디갔을까? 보신각(普信閣)이 가져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보신각은 서울시 종로 한복판에 위치한 누각으로 흔히 '종각'(鐘閣)이라 불려진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을 빠져나가면 바로 종루가 나오는 바,  종각역의 명칭도 이 누각에서 비롯됐다. 
     
    종루는 원래 태조 5년(1396)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쪽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던 다리 청운교(靑雲橋)의 서쪽에 건립됐다. 굳이 짚자면 삼일대로 초입 왼쪽의 인사동 골목 입구 부근이다. 하지만 이때는 보신각이라는 명칭 없이 그저 종루로만 불려졌고, 이후로도 보신각 명칭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출현하지  않는다. '신'을 보신각이 가져갔다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탑골 공원에서 바라본 최초의 종루 자리
    3.1운동 기념 터에서 본 보신각 누각

     
    차제에 말하자면 각(閣)은 단층집을 뜻하며, 면에서 떨어진 다락집을 말할 때는 통상 루(樓)를 사용했다. 이를 테면 경회루, 남대문루 같은 것인데, 우리가 말하는 보신각은 대부분 종루로 불렸고 종각은 광화문에 있던 부어교 종각(鮒魚橋鍾閣)을 지칭했다.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8월 26일 기사)   
     
    종루는 태종 13년(1413) 광통교 북쪽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보신각 자리 부근으로 옮겨졌다. 이어 세종 22년(1440) 정면 5칸, 좌우 4칸의 이층 누각을 세웠는데, 지금의 보신각과 비슷한 모양새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위층에는 종을 달고 아래로는 인마(人馬)가 다니게 하였다고 하는 바, 운종가의 한복판에 자리했던 웅장한 누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때도 누각은 보신각이 아니라 종루였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5월 13일 기사는 '鍾樓成', 즉 '종루가 완성됐다'이다). 

     
     

    보신각과 보신각 종 /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종루는 임진왜란 등으로 여러번 불탔고 또 새로 지어졌다. 근대 들어서는 고종 6년(1869) 화재로 불타 새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인 건물을 지었고 1895년 3월 15일 고종이 이 종각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것이 보신각 명칭의 시작으로 종각이 세워진지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이다. 명칭도 그러하니 단층집을 뜻하는 '각'을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 보신각은 '보신루'가 보다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보신각 2층 누각은 1979년 옛 보신각 터 부근에 철근 콘크리트조(造)로 새로 지은 것으로서, 서울시는 이후 1990년 '보신각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했다.(1990년 6월 18일) 현재의 보신각 건물은 복원도 아닌 아예 새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건물 그 자체는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없고, 원래 보신각이 있던 자리만 기념물로 지정받은 것이다. (<위키백과>) 
     
    하지만 원칙대로 라면 이곳은 ' 보신각 터'로서의 가치 매김도 하기 어렵다. 보신각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종로 거리가 확장되며 자리가 동남쪽 뒤로 밀려났고, 1956년 도로가 넓혀질 때 다시 20m 뒤로 물러났으며, 1979년 8월 15일 준공된 현재의 건물도 1953년 12월에 새로 지어진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 지어진 까닭이다.
     
    놀랍게도 이 가운데  세종 22년에 만들어진 종루의 주춧돌로 여겨지는 유구(遺構)가 1972년 10월 지하철 1호선 공사 도중 지하 3m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이 유구에 미루어 종루는 십자각으로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가 뚫려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초석의 배치 길이는 남북 4칸 13m, 동서 5칸 18m, 면적은 70여 평 규모임이 밝혀졌는데,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혹 왕림할 기회가 있다면 친견하시길)  

     
     

    일제강점기의 보신각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의 보신각 초석
    초석 안내문

     

    종루을 세운 이유는 그곳에 종을 걸어 종소리에 따라 4대문의 성문을 여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타종은 파루(罷漏)라 하여 인시(寅時, 오전 4시경)에 33번을 쳤고, 유시(酉時, 오후 10시경)에는 인정(寅正)이라 하여 28번을 쳤다.(도성 안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종을 쳐 알렸다) 이 숫자는 불교의 '28계 33천' 우주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국초(國初)까지도 불교신앙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루에 걸렸던 그 종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인사동 청운교 부근에 걸렸던 최초의 종은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로는 폐사된 원각사의 종이 운종가 종루에 걸렸다. 이 종은 세조 14년(1468) 제작돼  흥천사에 걸렸던 것인데 원각사로 옮겨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종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종은 몸체에 '성화 4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주조 시기를 명확히 전해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제2호 보신각 종
    높이 3.18m, 아래 지름 2.28m, 무게 19.66톤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다음으로 크다. / 이 사진은 종각에 걸렸을 때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것을 찍은 사진이다.

     

    이 종은 흥인지문에 이어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제야의 종이 타종되며 존재를 각인시켰으나 1979년 3월 균열이 발견되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야외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종의 제작된 흥천사는 현재의 돈암동 흥천사가 아니라 덕수궁 자리에 있던 흥천사로, 태조 이성계의 두번 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의 원찰에서 제작되었다. 이후 흥천사가 폐사되며 원각사로 옮겨졌는데, 다시 원각사가 폐사되며 종루에 걸리게 된 것이다.
     
    종루는 처음 건립된 이후 적어도 여덟 차례의 소실과 중건이 있었다. 종 또한 그와 맞먹는 횟수의 고난을 겼었으니 고종 때는 두 번의 화재로 종각이 소실되었고 한국전쟁 때도 종각이 불탔다. 하지만 용케도 용해되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1979년 3월 균열이 확인돼 결국 현역을 은퇴하게 되었다. 지금 보신각에 걸린 종은 본래의 것과 비슷한 크기(높이 3.82m, 아래 지름 2.22m, 무게 19.885톤)로 1985년 제작되었다. (본래의 종과 성덕대왕신종을 짬뽕해 만들었는데, 디자인도 종소리도 모두 별로다) 
     

    보신각종이 은퇴해 박물관으로 간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종에 금이 가 더 이상의 타종이 종을 망가뜨릴 염려가 있다고 판단된 까닭이다. 말하자면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행해지는 제야의 종 타종 때 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인데, 그런데 따지자면 제야의 종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행사로서 굳이 타종의 필요성이 따르지는 않는 일이다. 이 타종식은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없던 일이고, 광복 후로도 없었다가 1953년, 한국전쟁 때 불탄 종각이 새로 세워진 후 처음 타종됐다.
     
    그런데 그와 같은 타종 행사의 뿌리를 찾아가니 의외로 일재의 잔재이다. <매일신보> 1939년 12월 9일자 기사에는 개성 남대문루에 있는 연복사종(演福寺鐘)을 제야의 종으로 타종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는데, 요점은 "1940년 정초 '황기(皇紀) 2600년'의 새날을 기원하고 '흥아(興亞)의 신건설'을 알리는 제야의 종을 쳤다"는 것이다. '황기'는 일본 황가의 기원을 뜻함이요, '흥아'는 부흥하는 대동아공영권을 뜻함이니, 제국주의 일본이 표방했던 모토가 그대로 담긴 셈인데, 그 뜻을 우리가 매년 연말에 계승하여 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종 / 종군사진가 임인식이 찍었다.
    1956년 촬영된 보신각 사진 / 보신각은 1953년 12월 10일 새로 세웠으나 도로가 확장되며 1956년 20m 뒤에 이측됐다.
    1959년 4월 촬영된 보신각 사진 / 오른쪽은 1899년 건립된 옛 대한천일은행 건물이다.
    철거되는 보신각 옆 건물 / 대한천일은행 본점 건물은 이후 동일은행, 조흥은행 종각지점으로 사용하다 1976년 8월 4일 철거되었다. 오른쪽으로 옛 서울빌딩이 보인다.
    현재의 보신각종
    개성 남대문의 연복사종 / 연복사종은 1346년 제작된 높이 3.2m 크기의 동종으로 북한 국보유적 124호이다.
    연복사 종이 걸린 개성 남대문
    보신각 앞의 이건 뭐지?
    수준점(水準點)이라 불리는 수도권 전철의 높이 및 깊이의 척도가 되는 바로미터 돌이다. 종각의 이 수준점을 기준으로 지하철 깊이와 터널의 높이,역사(驛舍) 높이 등이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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