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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월대 앞에 서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17. 23:48

     

    지난 10월 15일 문화재청이 복원한 광화문 월대를 이제야 보고 왔다. 광화문 월대는 현재 서울의 4개 궁궐을 포함한 모든 문 중에서 유일한 것으로, 1394년 이성계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시설물이 아니라 1866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되었다. 월대는 1923년 일제가 광화문 코앞으로는 지나가는 전차노선을 가설하며 없앴는데 그것을 최근 복원공사에 들어가 2023년 10월 15일 완공시킨 것이다.

     

     

    광화문과 월대
    동구릉에 보존돼 있던 일부 난간 부재 &
    호암미술관 마당의 서수(瑞獸)가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두 마리 서수는 '왕의 길'을 지키던 동물이었다
    광화문 앞의 월대가 사라지고 전차가 다니고 있는 흥미로운 사진이다. <동아일보> 1923년 10월4일자 지면에 실린 사진인데 광화문도 철거 중이다.

     

    동십자각과 짝을 이루던 서십자각도 1923년 전차노선이 가설되며 사라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총독부 건물이 건립되며 광화문이 사라졌다. 조선총독부는 원래 남산 왜성대, 옛 통감부 자리에 있었다. 통감부 자리에 지은 것이 아니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총독부가 설치된 후에 통감부 건물을 명칭만 바꿔 사용했다. 이후 1924년 경복궁 앞에 총독부 건물이 새로 건립되며 광화문, 흥화문, 근정문, 영제교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다리가 철거되었고, 월대는 흔적마저 땅에 묻혔다.   

     

     

    남산 조선총독부
    1926년 경복궁 근정전을 찍어누르듯 건립된 조선총독부
    보다시피 이때 광화문과 월대는 철거되어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 1930년대 사진으로 돌다리는 종친부 앞에 있던 다리이다.
    1968년 거의 옛 자리에 철근 시멘트조(造)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며 존속하다가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비로소 철거되었다. / 위 사진은 광화문 월대 공사가 한창인 2022년 여름에 찍은 것이다.

     

    따라서 광화문 월대의 존속기간을 생각하자면 길게 잡아도 60년에 불과하다. 그래서 2018년 월대 복원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일각에서는 겨우 60년간 존치됐던 유물을 굳이 거금의 세금을 들여 복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었지만, 문화재청은 「세종 때 만들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엉터리 용역보고서에 근거해 복원을 밀어붙였고 올해 드디어 완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월대의 경우, 비록 60년간이라도 있기는 있었던 것이니 개인적으로는 별로 시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또 해놓고 보니 보기가 괜찮다. 그리고 위의 사진처럼 기존의 부재를 찾아내 끼어넣기식으로 복원을 한 까닭에 새하얀 화강암의 풋내로부터 비롯되는 거부감도 덜하다. 

     

    하지만 월대와 함께 새로 만들어 붙인 광화문 현판에는 거부감이 팍팍 들었다. 위 사진 대로 광화문은 일제강점기 경복궁 동쪽 중학천 앞으로 이축됐다. 그리고 이곳에 걸려 있던 옛 광화문 현판은 한국전쟁 때 누각과 함께 불탔다. 그리하여 1968년 광화문이 본래의 자리에 철근 시멘트조(造)로 복원될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을 걸었다가 2010년 목구조 전각으로 복원할 때 다시 본래의 글씨(19세기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을 썼던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모사해 걸었다. 

     

    그 중간, 유홍준 씨가 문화재청장일 때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걸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정조와 광화문이 무슨 연관이 있냐는 지적에 다시 없던 일이 되었고,(정조시대에는 광화문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국 임태영의 글씨가 걸리게 되었다. (아무튼 이때 박정희의 글씨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발생했던 바, 이 새 현판은 석달 만에 금이 가고 뒤틀리며 부실 복원임이 드러났는데, 뒤이어 바탕색과 글자색의 고증 오류 문제도 불거졌다.

     

    이에 문화재청은 고증과 제작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자료와 <경복궁영건일기> 및 구한말 궁중화가 안중식의 작품을 토대로 광화문 현판을 새로 제작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것이 이번에 공개된 황동 글씨 현판이다. 그런데 올려다보니 기존의 현판과 색상 배치만 완전히 뒤바꿔 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를 써 넣은 것뿐이고, 글자도 1868년 고종 때 걸렸던 흐릿한 한자현판 사진에서 비롯된 과거 임태영의 글씨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간 것이 없었다.

     

     

    광화문과 광화문 현판

     

    그리고 더욱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 검은 바탕에 금색 동판을 오려 붙여 만든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옛것의 복원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언커니와 조선시대 이와 같은 제작기법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고종 초의 <경복궁영건일기>에는 현판이 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임을 뜻하는 '흑질금자'(黑質金字)라고 되어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금자 동판을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내구성은 강할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2010년에 이은 또 한 번의 국민 기망일 터이다.   

     

    광화문 현판은 <근역서화징>의 기록을 근거로 정학교 설이 유세했었다. 그러다 2005년 <일성록>에 수록된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무관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의 서사관(書寫官, 글씨를 쓴 관리)임이 밝혀졌다. 임태영은 수군절도사,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의 무관직을 역임한 사람으로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경신박해의 주모자라는 것과 부정한 행실로 파직당했다는 기록 외에 구체적인 생애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의 글씨가 1868년 사진 속의 흐릿한 광화문 현판으로만 확인될 뿐 다른 글씨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까닭에 집자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근거 있는 현판 글씨는 1968년에 쓴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뿐이나 독재자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글씨를 다시 걸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한글학회는 무엇보다 나라가 망할 때의 '광화문' 글씨가 다시 걸렸다는 데 문제를 제기하며 재차 한글현판으로 돌아옴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박정희의 옛 현판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1968년 박정희가 광화문 현판을 썼을 때도 그것은 기실 박정희의 뜻이 아닌 한글학회 이은상, 정인섭, 한갑수 선생 등이 대통령을 설득한 결과였다. 이 기회에 백성들을 위해 우리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정신을 되살림과 함께 사대주의와 식민지 근성에서 비롯된 관행을 바로 잡자는 주장이 통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홍준 청장 때 정조의 글씨 어쩌고 하더니 다시 한자 글씨로 회귀되고 말았다.

     

     

    1968년 박정희 글씨에서 2010년 임태영의 글씨로 바뀌었다.
    바꾼다더니 2013년 새로 바뀐 것은 바탕색과 글자색뿐이다. 장난하니?
    이 추운 날씨 속에도 경복궁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경복궁은 우리나라의 어머어마한 관광자원이 된 지 오래지만 활용성은 뒤떨어진다. 경복궁에서 한글이 태어났다는 사실도 알리고 자랑스런 한글현판을 달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팽배하다.
    '2023 광화문 빛초롱 축제' 때 찍은 사진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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