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나 나이 든 지금이나 '탐험'이란 단어는 문득 피를 끓게 한다. 그것은 내가 허약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도 계속 인생의 로망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탐독했던 로버트 피어리, 로알드 아문센, 로버트 스콧, 링컨 엘즈워스, 움베르토 노빌레가 감행한 남·북극 탐험의 모험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유독 추위에 약한 몸이기에 그들의 모험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들의 백미는 아무래도 아문센과 스콧이 벌였던 남극점 선점 경쟁이다. 영국의 로버트 폴컨 스콧 대위가 이끄는 남극탐험대는 1912년 1월 18일, 81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1개월 전 경쟁자인 노르웨이 탐험대가 남극점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좌절감 속에 기지로 귀환하게 되지만 그나마 귀로마저 여의치 않았으니 기지를 18km 앞둔 지점에서 눈보라 속에 최후를 맞는다. 스콧의 마지막 일기 내용은 이러하다.
"내일 우리는 18㎞ 떨어진 기지로 출발할 예정이다. 텐트 문 밖에는 아직도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견뎌낼 것이다."
스콧에 앞서 남극점을 점령한 아문센의 이야기도 극적이다. 1909년 북극 탐험을 계획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은 그해 4월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선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남극으로 방향을 튼 아문센은 1911년 12월 14일, 4명의 동료와 함께 남극점에 최초 도달하였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1926년, 아문센은 자신이 최초가 되지 못한 북극점에 비행선으로 도달하기로 마음 먹고 미국의 링컨 엘즈워스, 이탈리아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타고 북극을 횡단했으나 그들이 과연 북극점을 지났는가 하는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28년 아문센은 북극해 스피츠베르겐 군도에서 비행선 사고를 당한 노빌레를 구하기 위해 날아가던 중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들과 성격이 다른 또 다른 탐험가들이 있었다. 영국의 마크 오렐 스타인(M. Aurel Stein, 1862~1943), 스웨덴의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독일의 폰 르콕, 미국의 랭던 위너 등이 그들이다. (랭던 워너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별명은 '중앙아시아의 약탈자', 혹은 '실크로드의 악마들'로서 별로 고상하지 못하다. 그들의 정체는 대체 무얼까?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써 일찍이 제국주의에 들어선 유럽의 국가들은 세계 곳곳을 침략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들 국가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각국의 탐험가들은 19세기 후반 그동안 미지의 내륙으로 알려졌던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까지 발을 뻗쳤다. 그동안 이곳이 미지의 땅으로 존속되었던 것은 교통의 불편함과 환경의 열악함 때문이었으니, 위구르어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타클라마칸'이라는 지명이 이를 대변해 준다.
하지만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영향으로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처음으로 이 미지의 땅에 발을 딛었다. 이어 스웨덴의 헤딩, 프랑스의 펠리오 등이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서 일대를 헤집으며 곳곳의 불교유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일대는 중국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던 바, 각국의 탐험대들은 불교사원이나 석굴 안의 불상, 불화, 서적, 벽화 등의 예술품을 제멋대로 수거하거나 뜯어 제 나라로 가져갔다.
그 무법자들 가운데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도 있었다. 오타니는 교토의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파(本願寺派) 니시 혼간지(西本願寺)의 제22대 문주(門主)로서,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탐험가 마크 스타인이 가져온 막대한 불교 미술품 '스타인 컬렉션'에 자극받아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꾸렸다.
위에서 말한 서구 열강들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대부분 국가의 지원이나 유명 박물관 등의 후원을 받아 팀을 꾸린 예였다. 하지만 오타니는 오직 개인적 역량으로 탐험대를 조직하였고, 이후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각지를 탐사해 엄청난 양의 유물을 수집했다.
그런데 그 유물의 반수 이상인 1500여 점의 미술품이 현재 우리나라에 보존돼 있다.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다. 그것들로 채워진 국립중앙박물관 3층 중앙아시아관의 유물들을 볼 때마다 그 양과 질에 감탄하게 되는데, 다음 회에는 유물들의 다양한 사진과 함께 오타니 탐험대의 경로와 활동 및 그가 수집한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놓이게 된 경위를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