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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역사문화공원의 권진규
    미학(美學) 2024. 1. 4. 21:19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망우리 묘지 내의 이중섭 화백 묘소에 성묘를 다녀온 이야기를 앞서 실은 바 있다. 그때도 말했거니와 나는 그와 아무런 친인척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 간 이유는 집에서 멀지 않기 때문으로, 요즘도 산책 삼아 가끔 간다. 재삼 느끼는 바이지만 그의 무덤가는 참 운치가 있다.
     
    오늘은 처음으로 권진규의 무덤을 찾았다. 사실 권진규는 망우리 묘지를 가게 되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는 인물이다. 재작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에 관리사무소와 시민휴식공간이 건립되며 그 앞에 그의 자소상 두상을 조성해 놨기 때문에 오가는 모든 사람의 눈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가 누구인지 알든 모르든.  하지만 그의 묘소를 찾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혹 찾아오실 분을 위해 말미에 루트 사진 첨가) 
     
     

    권진규 자소상
    안내문

     
    아무튼, 무연고유골 취장비 위쪽에 있다는 약간의 사전 정보와 201720이라는 묘지 번호 하나만을 가지고 권진규의 무덤을 찾았는데, 길도 없는 눈밭 속을 이리저리 헤매다 거짓말처럼 '권진규 묘소' 표지판을 발견했다. 화살표를 따라가니 산비탈에 표석이 서 있었다. 곁에서는 부모님과 형 권진원의 표석도 볼 수 있었지만 모두 봉분이 없는, 비탈 자체가 무덤인 특이한 묘지였다. 
     
     

    동물 발자국과 함께 발견한 201730 묘지번호석 / 권진규의 무덤이 곁에 있다는 뜻이다.
    부근의 권진규 묘소 표지판
    권진규와 부모의 묘표
    권진규 묘표
    부러진 소나무 가지가 걸쳐져 있는 권진원의 묘표

     
    그의 형 권진원은 일본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1949년 악성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권진규는 1973년 성북동 자신의 아틀리에(미술사가 최순우 옛집)에서 목 메 자살했는데, 두 사람 모두 후사가 없어 찾아오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그 황폐한 무덤 앞, 차가운 바람 속에 서서 잠시 권진규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사실 나도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기에.... <다음백과>에 소개된 그의 자취는 아래와 같다.
     
    1936년 함흥제1보통학교, 1942년 강원도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을 받았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일제의 징용을 피해 일시 귀국, 서울에 정착하여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김서봉·김숙진·임직순·김창렬·심죽자 등과 함께 연구했다.
     
    1947년 다시 일본에 가서 도쿄의 무사시노(武藏野)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지(淸水多嘉示) 문하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0년 28세 때 이과회전(二科會展) 조각부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1958년 니혼바시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화랑 측으로부터 전속작가 의뢰를 받았고 모교에서는 교수직 초청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마다하고 귀국했다.
     
    테라코타와 건칠기법으로 독자적인 표현방법을 구축했고 "걸작이란 필연적으로 오직 본질만을 남기고 있는 아주 단순한 것"이라 정의했다.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면서도 작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정제된 조형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만물에는 구조가 있으며 예술가는 그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서구의 실험적 경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풍토를 개탄하여 신라조각의 위대성을 계승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작인 〈자소상 自塑像〉·〈지원의 얼굴〉·〈비구니〉 등 많은 흉상들은 무거운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조용히 드러내는 경건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불교세계에 귀의, 비참한 생활과 뼈저린 고독 속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제작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혜곡 최순우의 집이자 권진규의 아틀리에였던 집
    2000년대 초, 성북동 일대에 다세대주택 바람이 불며 철거될 뻔했던 집이 2002년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해 보존됐다. 시민문화유산기금으로 보존된 '시민문화유산 1호' 건물이다. / 오마이 뉴스 사진
    권진규 (權鎭圭, 1922~1973)

     

    위의 설명대로 권진규는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로, 흔히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 불린다. 2021년 7월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보다 많은 사람이 작가의 미술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서울시립미술관에 총 141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이에 옛 벨기에 영사관으로 쓰이다 지금은 미술관이 된 관악구 남현동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는 2023년 권진규 작고 50주기를 맞아 상설전시관이 마련됐다. 이름하여 '권진규의 영원한 집'으로 아래는 그곳에 전시된 일부 작품들이다. 
     
     

    '권진규의 영원한 집'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의 다섯 개 전시실을 권진규 상설전시관으로 조성했다.
    '불상'. 1960년대, 화강석, 13x8x9cm
    '앉아있는 여인'. 1972년, 테라코타, 26x15x17cm
    '서 있는 여인'. 1968년, 테라코타, 40x27x19cm
    '춤추는 뱃사람'. 1965년, 테라코타에 채색, 58x79x7cm
    '도모'. 1951년, 테라코타에 채색, 25x17x23cm
    '도모'. 1950년대, 테라코타에 채색, 30x21x27cm
    '도모', 1960년대 초, 테라코타, 25x15x26cm
    권진규와 그의 아내 아내 오기노 도모 / 권진규의 첫 모델은 무사시노 서양화과 학생이던 오기노 도모였다. 이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졌으나 해방 후 한일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기사'(騎士). 1953년, 안산암, 65x64x31cm
    '마두 B'. 1953년, 안산암, 30x70x18cm / 위와 아래는 같은 작품임
    '카타멜라타 모사'. 1957~7년, 종이에 잉크, 28.3x22.5cm / 도나텔로가 제작한 청동 기마상의 말머리를 모사한 그림이다. '마두 B'의 제작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고양이 머리'
    '흰소'
    권진규가 소장하던 《황순원 전집》 / 권진규는 이 책에 실린 이중섭 그림 '황소'를 보고 위의 작품을 만들었다.
    '영희'는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땋은 머리 오사케'는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여성입상'(1954년, 석고에 채색, 58.4x14x14.6cm) 외
    '예선' / 신인 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여인 흉상
    여인 흉상
    '경자'. 1971년경, 건칠, 46.4x36.4x27.7cm
    권진규가 소장하던 《모딜리아니》 / 권진규는 부르델과 모딜리아니를 연구하기 위해 3년간 불어를 공부했다. 모딜리아니는 권진균의 위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자소상
    자소상
    자소상
    덕성여대 출강 시절의 사진
    아틀리에의 권진규

     
    ▼ 권진규 묘소 가는 길
     

    관리사무소에서 10분 거리의 노고산 천골 취장비
    1938년 마포 노고산 묘지가 택지로 개발되며 무연고 분묘를 옮겨 합장한 곳이다. 나는 권진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이 취장비의 뒤쪽 언덕으로 올라갔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취장비에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이와 같은 벤치가 나오고,
    벤치에서 조금만 오르면 망우산3보루 표지판과 권진규 묘소 표지판(화살표)을 만난다. 당연히 이 계단을 올라야겠죠?
    이후 이와 같은 묘표를 지나면
    다시 권진규 묘소 표지판(화살표)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묘소를 만나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 알게 된 루트로서 더 이상의 표지판은 없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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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