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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전공동묘지 무연고 합장묘와 덕은동 쌍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13. 20:54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한국항공대 가는 길은 서울임에도 시골냄새가 풀풀 난다. 그래서 서울에 남은 마지막 시골처럼도 여겨지는데, 경기도로 들어가 한국항공대 부근에 이르면 적지 않은 규모의 공동묘지도 나타난다. 까닭에 일대가 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로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은 서울 용산역에 못지않은 요지 중의 요지가 될 뻔한 장소였으니, 이름하여 수색 조차장(操車場)이 있던 곳이다. 
     

     

    용산역
    한국항공대 전철역에서 바라본 화전 공동묘지
    부근의 농가

     

    위 사진의 대비를 보자면 이곳이 용산역에 버금갈 곳이었다는 말이 더욱 믿어지지 않겠으나 약 80년 전 이곳에는 거의 완공단계의 초대형 조차장이 있었다. 조차장(Classification yard)이란 철도역의 한 종류로, 화차 및 객차 등 철도차량의 조성과 입환을 위하여 별도로 설치한 장소이다. 이것이 조차장에 대한 사전적 정의이나 부가 해설이 필요할 듯하니, 이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조차장은 행선지가 각각 다른 화차 및 객차가 섞인 열차의 각 차량을 행선지별로 분류하여, 행선지가 같은 한 편성의 열차를 만드는 작업을 위해 존재한다. 이런 새로운 열차 편성을 만드는 작업을 '조성'이라고 한다. 열차의 조성을 위해 열차를 역 시설 내에 유치하고, 열차에서 객차와 화차를 분리하여 분류작업을 실시한다. 이 분류작업을 '입환'이라고 한다. 입환 중인 철도차량은 기존 열차에서 분리되어 나와 각 행선지별로 분류된 선로, 분류선으로 이동하여 다른 차량과 결합, 같은 행선지로 이뤄진 새로운 열차로 만들어진다.
     
     

    콜로라도주 덴버 조차장 / 위키백과

     

    일제가 수색에 이와 같은 조자창을 건설한 이유는 중국침략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대륙침략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던 바, 용산 군사기지 및 보급시설과 연계된 대규모 조차장을 수색에 조성했다. 그리하여 부산~용산~수색~평양~신의주를 잇는 철도 보급라인을 계획했는데, 그 모델을 기존의 용산역으로 삼았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 직전 용산역과 용산조차장을 건설해 경의선을 통한 군대와 물자 보급에 성공한 바 있었기에, 중일전쟁에 앞서 용산을 모델로 용산보다 큰 조차장을 조성한 것이었다. 

     
     

    용산조차장 / 철도경제 사진
    일제강점기의 용산역 / 1906년 경의선의 시발역으로 건설된 서양식 건축물로 1925년 경성역사가 준공되기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역사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군용철도 경의선 건설공구 약도
    수색조차장의 흔적이 남은 수색역 차량기지

     

    부산, 평양과 더불어 3대 조차장을 목표로 만들어진 수색 조차장은 내부 선로 길이만 1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로서 1300만 원이라는 천문학적 건설비용이 집행됐다. 시공은 훗날 전범기업으로 지목된 하자마구미(間組)가 맡았는데 이미 경부선, 한강철교, 압록강 철교, 대전 유성비행장, 수풍 수력발전소 등에 참여한 바 있는 유수의 건설·토목업체였다.
     
    2015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위원회'가 연구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하자마구미는 이 과정에서 1226건의 강제동원 관련 피해 건수가 확인됐으며 관련된 한국인 생존자는 17명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런 하자마구미가 수색 조차장에 있어서는 무사고건설을 지향했을 리 없을 터, 다수의 희생자를 만들었지만 그 수는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적은 역력하니 화전 공동묘지 내에 있는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京城操車場弟三工區內無緣合葬之墓)라는 비석이 그것이다. 
     

     

    화전 공동묘지
    공동묘지 입구의 무덤군
    무연합장묘 묘표 & 묘표 없이 무덤번호만 있는 무덤군
    무연합장묘 묘표 / 2m는 족히 넘어 보인다.
    안내문
    무덤 옆 '기림의 나무' / 2019년 이재준 고양시장이식수했다. 돌에는 선조들의 희생과 아픔을 잊지 않겠다'고 새겼다.

     

    하자마구미가 만든 이 화강석 묘표 주변에는 무덤번호만 표기된 무덤이 여럿 존재하는데, 묘표 뒷면을 보면 이 무덤들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수색리와 고양군 신도면 덕은리에서 이장되었다고 각자되어 있다. 연희면 수색리는 현 은평구 수색동에 있는 수색조차장을 말하는 것일 터이고, 신도면 덕은리는 현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20-1번지 일대에 위치한 덕은동 쌍굴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덕은 쌍굴은 무덤군과 직선거리로 1km 안쪽이나 길이 구불구불하고 표지판이 전혀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물어 물어 찾아간 덕은동 쌍굴은 낮은 능선의 위아래로 거리 10m에 3m 정도의 단차를 두고 뚫려 있었다. 위쪽은 현재도 차도와 인도로 사용하기에 터널 앞뒤와 내부를 모두 사진에 담을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선로가 깔려 있다는 아래쪽 터널은 폐쇄돼 볼 수 없었다. 위 터널 앞 안내문에는 이 쌍굴이 '경성 수색조차장'에 속한 터널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한다'는 취지의 글이 쓰여 있다. 


     

    고양 덕은동 쌍굴
    반대편 입구
    터널 내부
    안내문
    아래쪽 터널 / 페이스북 사진
    경의선 철도가 지나가는 덕은동 쌍굴 앞 도로
    수색조차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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