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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북촌의 돌우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28. 22:54

     

    요즘 세대들이 ☎의 표시를 보고 "이게 무어냐?"고 물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전화기의 표시로 이렇게 통째로 전화기를 그리거나 혹은 수화기만을 그려 나타내는 경우가 있지만 요즘 세대들은 그 어느 쪽도 모른다고 한다. 그것이 언뜻 기이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핸드폰 세대들은 위와 같은 전화기를 거의 본 적이 없을 터, 모르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나간 것은 잊히기 마련이니, 과거의 우물 또한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우리는 우물을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아주 오래 전의 우물은 잊혔다. 우물을 기억하는 세대라 할지라도 거의가 동그란 테두리의 우물만을 보았을 터, 우물의 기원인 井자 우물은 그저 '우물 정' 자의 한자로만 남아 있다.

     

    2004년 서울 천호동 풍납토성 정비과정에서 발견된 동문 밖의 우물은 놀랍게도 그 초기 井 자 형태가 온전했다. 필시 풍납토성을 건설했던 초기 백제 사람들이 사용했을 그 우물은 단단한 상수리나무로써 井자 형태로 결구해 만들었다. 부재들은 한성백제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인근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에서 나름대로의 성의로써 재현한 우물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우물이 아닐까 한다. 

     

     

    2004년 서울 천호동 풍납토성 정비과정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우물
    발견지 부근에 재햔된 우물

     

    신라의 우물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나정(蘿井)이 기록상의 최초 우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임자(壬子)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푸른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군(女君)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편)

     

    신라 최초 군주 박혁거세의 난생(卵生)설화가 어린 이 나정이 발견됐다 하여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지난 2002년 경주시 문화재 정비사업 중 현재의 나정 비석 부근에서 초기철기시대에 해당하는 구덩이 유구[隧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나정이 아닐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심층 발굴조사 결과 이곳은 우물시설물과 전혀 상관없는 나무기둥이 박혔던 시설로 밝혀져 초기의 흥분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다. 

     

     

    경주 나정 유적지


    하지만 경주 김유신 장군 집에 있었다는 우물 재매정(財買井)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사적(246호)으로 지정됐다.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던 김유신이 백제군이 다시 침범했다는 급보를 받고 재차 출정할 때,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고 그저 우물물을 떠 오게 해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 역시 따봉!"하고 갔다는 바로 그 우물이다. 

     

    그것을 본 군사들은 "대장군도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전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병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괴로워할 건가"하며 전의를 다졌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집은 없어졌지만 깊이가 5.7미터,  바닥지름이 1.2미터의 우물은 아직도  경주시 교동 89-7번지에 남아 있다. 

     

     

    방형(方型)의 재매정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진
    오른쪽 비석은 고종 때 세워진 것으로 김유신의 유허지임 밝히고 있다.
    재매정은 지금도 물이 고인다./ 이상 경주시청 제공 사진

     

    그밖에 황남동 쪽샘우물, 분황사 우물, 원성왕릉 우물 및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다곡길 394에 있는 모례정에도 물이 고인다. 앞서 '동서양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들(II)'에서 말한 대로 모례정은 이른바 묵호자(墨胡子, 얼굴이 먹처럼 검은 인도 승려)가 신라에 포교하러 왔을 때 숨었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우물이다.

     

    모례는 자기 집에 굴을 파고 묵호자를 숨겨 주며 포교를 도왔는데, 바로 이 집이 오늘날 '절'이라는 낱말의 기원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모례는 우리말로 털례이므로 털례네 집의 '털'이 곧 절이 됐다는 것이다. 어느 책에선가 본 얘기로, 우선 재미있고 그런대로 일리도 있어 가끔 써먹는데, 여기서도 또 한 번 썼다. 절이란 낱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설이 없어서. ^^ 

     

     

    경주 쪽샘지구의 이름이 유래된 황남동 쪽샘 우물 / 쪽박으로 떠마셨다 하여 쪽샘으로 불렸다 한다.
    용이 살았다는 분황사 8각 우물
    井 자가 뚜렷한 모례정 / 경북일보 사진

     

    이렇듯 우물의 역사는 길고 깊다. 그도 그럴 것이 우물은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생명수인 식수와 생활용수를 마련해 온 시설이니만큼 별의별 이야기가 모여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세 들어 상수도가 보급되며 우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까닭에 동네마다 있었을 우물을 이제는 찾아보기조차 어려운데, 그래서 서울의 북촌에서 마주한 우물은 정겹기 그지없다. 그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탑골공원 내 우물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 사업 중에 발견되어 상부 일부를 복원시킨 후 공개되었다. 조선 연산군 10년(1504) 원각사가 폐사되고 중종 7년(1512) 이후 현 지역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음용수를 얻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4대문 내에서의 민수용 우물 발견 예가 드물어 이 우물의 규모나 조성방법은 조선시대 후기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탑골공원 내 우물
    위 글이 쓰여져 있는 안내문
    근방에서 볼 수 있는 원각사지 석탑

     

    ▼ 운현궁 내 우물

     

    1863년 12월 안국동 골목에서 놀던 명복이가 졸지에 가마에 태워져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번째 왕이 되었다. 오랫동안 우물 속 잠용(潛龍)처럼 웅크리고 있던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드디어 용트림을 하여 제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후 명복이가 살던 집은 왕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로서 궁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운현궁이라는 이름은 안국동에서 창덕궁 쪽으로 향하는 낮은 고개인 '운현(雲峴)'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인지 운현궁 안의 우물들은 모두 범상치 않아 보인다.

     

     

    운현궁 마당의 8각 돌우물
    운현궁 유물전시관 앞의 둥근 돌우물 / 위의 두 우물이 운현궁 내에서 가장 큰 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당 뒤뜰의 우물
    이로당 뒤뜰의 우물은 안채 전용으로 쓰였을 터이다. / 왼쪽으로 보이는 문은 얼음을 저장하던 빙고(氷庫)의 문이다.
    이로당 뒤뜰의 경고비 / 고종은 자신의 집 뒤뜰에 있던 소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리고 비석을 세웠으나 지금 나무는 고사(枯死)하고 없다.
    '운하연지'(雲下硯池)라고 새겨진 수조 / 이로당 앞의 이것은 우물이 아닌 수조이다. '운하연지'는 '구름 아래의 벼루 갈 물을 담아 두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실제 용도도 그렇게 쓰였다 한다.
    조금 멀리서 찍었다. / 이하응의 글씨와 그림은 알아준다, 그는 서화 생각이 나면 즉석에서 이곳의 물을 뜬 듯하다.
    이로당 가는 길에 놓인 또 다른 수조
    조금 멀리서 찍었다. /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대문채

     

    ▼ 석정보름우물

     

    계동에 있던 마을 공동우물이다. 지금은 물이 말라 쓰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계동 주민에게 식수 등을 공급했던 이 우물은 천주교에서 보자면 성수 우물이기도 한데, 천주교단체에서 세웠음직한 안내문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료 및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 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석정보름우물

     

    ▼ 홍현 박제순 집 우물

     

    홍현 정독도서관 자리에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서광범이 살았다. 그들은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도망갔고 가족들은 도륙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그들이 살던 집은 주인이 바뀌었고 광무 4년(1900)에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들어와 살았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조약과 합일합방에 싸인을 해 이완용과 더불어 을사5적 경술7적에 모두 포함된 대표적 친일파이다.

     

    박제순은 글씨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홍현 집을 사들인 후 뒤뜰에 방치된 우물돌에 예서(隸書)로 아래와 같은 글을 새겼다. 그가 우물돌을 발견했을 때 우물은 폐정(廢井)되었으나 나름대로의 소회가 일었던 듯싶다. 박제순 집의 규모는 정독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고 하고 김옥균의 집 역시 행랑채가 딸린 대저택이었다고 하는 바, 누구 누구네 집을 가리는 것은 의미 없을 듯하지만 아래 사진에서는 김옥균 집터를 한번 지목해 보았다. 

     

     

    박제순 집 우물
    우물돌에 새겨진 글
    안내문
    안내문의 우물돌 글
    박제순 집터에서 바라본 김옥균 집터
    정독도서관 버려진 주초석에서 바라본 김옥균 집터
    정독도서관에서 찍은 한옥

     

    ▼ 종친부 우물

      

    종친부(宗親府)는 조선시대 왕가와 종실의 족보·서열·관혼상제에 관한 일과, 대군(大君)을 비롯한 제군(諸君)의 인사 문제 및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종친부는 경복궁 맞은편에 위치했는데,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는 한성부 북부 관광방에 속했다. 현재 종친부 터에는 1981년 국군보안부대가 들어서며 정독도서관 내로 옮겨졌던 경근당과 옥첩당이 2013년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서 있다. 

     

    현재 경근당 부근에 놓인 우물은 1984년 보안사 공사 중 앞마당 지하 3m에서 발견한 우물돌을 옮겨온 것으로 본래는 북부 관광방의 공동 우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우물돌을 자세히 살피면 동서남북을 표시한 4개의 돌출된 귀를 볼 수 있다. 

     

     

    종친부 터 우물 / 화강암 두 덩이를 둥글게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사방에 돌출된 귀가 조각돼 있다
    종친부 경근당 쪽으로 찍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쪽으로 찍은 사진
    안내문 : 이 우물은 조선시대 종친부에서 사용했던 것이며, 두개의 타원형 깃돌로 만들어졌다. 우물 깃돌의 네모형 괴임대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며, 물동이를 놓기도 하고 정수를 떠 놓고 소원을 기원했던 자리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앞 길에 놓인 한성부 북부 관아터 푯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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