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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왕실의 근친혼을 STOP시킨 이자겸의 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25. 22:07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 한켠에는 국보·보물 및 이에 준하는 석물들이 다수 전시돼 있다. 이름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으로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내에 존재했을 당시 그 마당에 놓였던 석물들을 이관할 때 일괄 옮겨온 것이다. 사실 경복궁 마당에 있을 때보다 유물의 숫자는 줄었는데, 박물관 내부로 들어간 것도 있고 보존처리 중인 것도 있고 더러는 고향으로, 즉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간 것도 있다. 모르긴 해도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꽤 있을 것이다. 
     
    이 유물들이 고향을 떠나 경복궁 마당에 위치하게 된 까닭은 조선총독부의 장난이 발단이었다. 1915년 일제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전시공간의 마련을 위해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였고, 한편으로는 공진회 장식용으로 전국 각지의 탑, 불상, 부도, 석등 등의 석물들이 옮겨졌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는 석물들은 그 일부가 남은 것이다.
     
    그중에는 개성 현화사지에서 옮겨온 석등도 있다. 이 석등은 관람객들에게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구석에 비껴 서 있는 느낌을 주지만 실은 사연이 많은 유물로서, 1911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헐값에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곤도는 경천사지 10층석탑의 일본 반출에도 관여한 거물급 도둑놈이나 덕분에(?) 경천사지 10층석탑, 개성 남계원 7층석탑, 현화사 석등 등이 한국 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 (그 자가 아니라면 현재 북한에 있을 거라는 야그)
     
     

    현화사지 석등
    높이 4.3m의 장대한 규모가 현화사의 위세를 짐작케 해준다

     
    현화사지 석등은 조성된 사연도 기구하다. 경기도 개성군 영북면 영추산 남쪽의 현화사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이전 창건된 절로 고려의 큰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가 열린 국찰(國刹)급의 사찰이었다. 현종은 이 절을 중건하고 제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한 7층석탑(북한국보유물 제139호)과 석등을 조성했는데, 앞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고려왕조의 근친혼'에도 말했듯 현종은 부모의 근친상간 +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다.
     
    앞서 말한 대로 고려 왕실의 근친혼은 매우 흔했으며 요즘 개념과 달리 도덕적 시빗거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륜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지탄받았다. 고려 7대 왕 현종 왕순(王詢)은 5대왕 경종의 셋째 왕비 헌애왕후의 자식이나 그렇다고 경종의 자식은 아니었으니, 왕순은 경종 사후 헌애왕후가 제 삼촌인 왕욱(王郁, ?~996 / 태조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로 훗날 안종으로 추존돼 안종욱으로도 불린다)과 사통해 태어난 아이였다. 물론 왕욱은 유부남이었다.
     
    우연찮게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왕 성종은 노발대발해 왕욱을 유배 보냈으나 제 친누이인 헌애왕후는 차마 어쩌지 못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헌애왕후는 제 집 문 앞에서 왕순을 출산하고 곧 죽었다. 이에 왕순은 천애고아로서 신혈사라는 절의 승려로 지내다 강조의 쿠데타 때 왕(현종)으로 옹립되었는데, 이후 현화사에 제 부모의 넋을 기리는 7층석탑과 석등을 건립하였다. 그 석등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의 석등이다.  
     

     

    개성 현화사 터 / 7층석탑과 석비는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왼쪽에 보이는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뉴스1 사진)

     

    여기서 이 석등을 조명하는 이유는 8대까지 근친혼이 이어지던, 그리하여 자칫 고착화되어 앞서 말한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심각한 유전병이 발생하여 멸족에 이를 뻔했던 위기가 현종 때부터 해소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석등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고려초의 이자겸이라는 자의 반란과는 관련이 있으니, 이른바 이자겸의 난 때 수좌(首座, 국사·왕사에 다음가는 승직)인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현화사 승려 300명을 이끌고 반군에 합류하여 왕궁인 만월대를 점거함으로써 승기를 잡게 된다.
     
    차제에 고려 현종 때의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우선 거란의 침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현종은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자 당시 북방의 패자(覇者)였던 거란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고려를 침입하고 현종은 공주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국정은 지리멸렬한 상태라 돌보는 사람조차 없게 되는데, 다행히도 공주 호족 김은부가 왕을 정성껏 옹위한다. 이에 현종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들이니 마침내 왕씨 일색의 고려왕실에 다른 혈족의 피가 섞이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거란이 얼마나 큰나라였던고 하니.... / 엄청 큼. 고려가 거란과 싸워 이긴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움.
    거란의 자취가 남은 케세이 퍼시픽 항공 /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을 거란의 음차인 케세이(Cathay)로 불러왔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 역을 맡게 된 하승리

     
    김은부의 세 여식은 고려왕실 내 왕씨 일색의 피를 희석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9대왕)과 정종(10대왕)은 원성왕후가 생산한 자식이다. 왕씨 피의 희석은 11대왕 문종 때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시작은 문종 때의 권신(權臣) 이자연 때부터이다. 이자연은 현종 때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문종 때 이르러서는 자신의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내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로서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上柱國 慶源郡 開國公)에 오른다. 인천 이씨 전성시대의 시작이었다. 
     
     

    원인재 / 인천광역시 연수동 119-4번지에 있는 인천 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재실이다. 원래는 연수구 신기마을에 있었으니 주택 조성사업에 밀려 1994년 무덤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원인재 첨소문과 강당인 돈인재 / 원인재는 인천이씨의 근본이 되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허겸 묘역의 산앙문
    이허겸의 무덤 / 이허겸은 문하시중 김은부의 장인이고, 현종비 원성왕후의 외할아버지이며, 이자연의 아버지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돼 있으나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악하고 권력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종이 이자겸이 친척 및 이자겸의 딸을 왕후로 맞으며 외척으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자정문경왕태후가 왕태자(훗날의 인종)를 생산하자 그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실은 왕위 계승으로 소란해졌던 바, <고려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예종 17년 4월 병신일 임금이 붕어하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은 새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었으나 평장사 이자겸 이 왕을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시켰다
     

    예종이 죽고 세자 왕해(王楷)가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13살이었다. 그러자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왕보, 대원공 왕효, 제안공 왕서 등이 왕위를 노리고 나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위 <고려사>의 기록은 이자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예종의 동생들을 물리치고 손자인 왕해를 왕위에 세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왕이 바로 인종이다.

     

    예종의 무덤 장릉 / 석물들은 사라지고 봉분만 남았다. 예종 이후로는 외척과 무인시대가 시작되는 바, 예종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한 마지막 왕으로 간주된다. (뉴시스 사진)

     

    이후 이자겸이 왕에 버금가는 세력가에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였을 터, 인종은 외조부 이자겸에게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恊謀安社功臣 守太師 中書令 邵城侯)라는 높은 지위를 내리고, 서(書)나 표문을 올릴 때에 신(臣)이라 칭하지 않아도 되게 하였으며, 잔치를 벌일 때 임금과 동급의 좌석에 앉게 하거나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방안도 모색했다.

     
    이중 마지막 두 개는 김부식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자겸의 자리가 흔들린 것은 아니니, 지위는 거듭해 높아졌고 그러함에도 그는 자신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예종의 아내였던 자신의 두 딸, 즉 인종의 이모 둘을 다시 인종과 혼인시켰다. 3촌 이내의 이중혼은 근친상간의 왕씨족보 내에서도 전례가 없었으므로 반대가 극심했지만 이자겸은 자신의 힘으로써 이를 성사시켰다.
     
    이는 무리수도 보통의 무리수가 아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다. 하지만 이 무리수는 고려왕실에 한편으로는 큰 이득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바,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결과적으로는 왕씨의 근친혼을 원천봉쇄시켜 더 이상 우성이 퇴화되는 일을 막고 악성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을 방어한 셈이 되었다. 
     
    나아가 이자겸은 3성6부 체제의 3성(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최고 관직을 독식하였고, 장남 이지미를 비롯한 그 아들들과 친척들은 6부의 중요관직을 꿰찼던 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던 그의 자리는 이제 국왕을 능가하는 지경이 되었다. 즈음하여 이자겸 본인 및 그의 혈족들의 과도한 축재는 백성들의 원성을 불러왔던 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인종은 1126년(인종 4) 군사를 동원해 이자겸 일파의 제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오히려 역공을 맞게 되니 이자겸은 무신 최고 실권자인 척준경을 끌어안았고, 승려였던 이자겸의 아들 이의장은 현화사의 승병들을 이끌고 와 척춘경과 함께 궁궐인 만월대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이때 왕당파에 섰던 많은 권신과 무인들이 살해되었으며 도망가던 의종은 붙잡혀 이자겸의 집에 유폐되었다. 이자겸은 이에 더 나아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으니,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파자(破字)인 유명한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과 '목자위왕설'(木子爲王說)은 이때부터 횡횡한 요설이었다. 
     
    하지만 만고 이래로 권력은 나눠가질 수 없는 속성을 지녔던 바,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비집고 두 사람을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 성공한 인종은 척준경의 힘을 이용해 마침내 이자겸과 그 일당들을 몰아낸다. 이후 이자겸은 아내와 아들들은 뿔뿔이 유배 보내졌고 왕비였던 두 딸들도 모두 폐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 땅으로 유배 보내졌는데, 이때 그가 그곳의 명산물인 조기라는 생선에다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꽤 유명한 속설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척준경은 윤관의 여진 정벌 때 공을 세운 바 있었고, 이자겸의 제거에도 공을 세웠으나 반란에 가담하여 궁을 불 태운 죄는 용서받지 못했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역대 무신 중의 최고 직위에 올랐으나 결국 정지상 등에 의해 탄핵당해 전남 신안 암태도로 유배되었다. 인종은 인정에 이끌려 척준경에 대해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의 이배(移配)를 명했지만 이배가 이루어지기 전 암태도에서 등창이 도져 죽었다.
     
    지금 척준경의 성씨 척씨(拓氏)는 아예 찾을 수 없으니, 국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환선길의 환씨(桓氏) 등과 함께 멸문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일세를 호령했던 이자겸의 인천 이씨(인천의 당시 이름이 인주였던 까닭에 인주 이씨로도 불린다)는 그 성세(盛歲)가 무색하게 전국 합계 21000가구, 68,000여 명으로 수가 적다.  

     
     

    국보 청자 참외모양 병 / 고려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고려 청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나 정작 장릉은 소실되었다.
    인종 때 편찬된 '삼국사' /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책이다. 책의 제목은 분명 '삼국사'임에도 여지껏 일제가 붙인 '삼국사기'로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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